<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성숙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2014년 8월로 한국과 중국은 수교 22주년을 맞는다. 1992년 8월에 이뤄진 한ㆍ중 수교는 1905년 한ㆍ일 합병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함으로써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된 이래 87년만에 한ㆍ중 교류의 문이 다시 열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22년이 흐르는 동안 한국과 중국은 활발한 경제교류의 바탕 위에서 정치, 문화적 교류와 인적 교류의 폭을 점차 확대해왔다. 중국은 특히 북한과 정상적인 정치적 교류를 해온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국가의 하나라는 지위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대북한 정책과 통일 전망에 미국과 함께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7월 3일부터 이틀간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시진핑 주석의 이번 방한은 지난 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한 데 대한 답방(答訪)으로 이뤄졌다. 시 주석의 이번 방문은 특히 지난 2013년 3월 국가주석 취임 이후 평양을 방문하지 않고 서울을 먼저 방문함으로써 주변국들의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중국은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 취임 이후 평양을 먼저 방문하고 서울을 방문하는 관례를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 관례는 깨어졌다. 시주석이 평양을 먼저 방문하지 않은 것은 북한 김정은이 지난 해 12월 대표적 친중파(親中派)인 장성택(張成澤)을 숙청해서 북한과 중국 사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김정은이 잇단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위협을 가하는데 대한 경고의 목적인 것으로 판단됐다.
  시진핑 주석은 이번 방한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과 한ㆍ중 관계를 '성숙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다고 규정했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는 2008년 4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방중(訪中)해서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과 맺은 관계로, 지난 해 6월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내실화 하기로 합의했었다. 두 나라 정상은 양국관계와 관련 '성숙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이외에도 시 주석이 두 나라 관계를 "한국과 중국은 친척"이라고 말할 정도로 두 나라 관계가 지난 1992년 8월 한ㆍ중 수교 이래 어느 때보다도 양호한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과시했다.

  1905년 이전의 한 중관계
  전통적으로 중국 대륙의 왕조들이 한반도의 왕조들과 대외관계를 맺는 데 적용된 사상적 근거는 유가(儒家)사상이었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프레데릭 넬슨(Frederick Nelson)이 1946년에 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구(舊)질서(Korea and Old Orders in Eastern Asia)』에 따르면, 중국의 왕조들은 인간사회의 기본구조를 상하관계로 파악한 유가사상에 따라 주변국과의 관계를 상하관계, 또는 중심과 주변의 관계로 설정하려고 했으며, 유가사상에 따라 중국은 구주(九州)로 이루어진 천하(天下)의 중심부로, 한반도는 구이(九夷), 팔적(八狄), 칠융(七戎), 육만(六蠻)으로 이루어진 사해(四海)의 일부인 구이(九夷)의 한 부분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중국의 그런 천하관은 유럽의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원양항해가 가능해져서 중국을 침공한 영국을 비롯한 서양국가들과의 전쟁과정에서 무너졌다.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계속된 유럽국가들의 침공 앞에서 중국이 더 이상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청의 동치제(同治帝)는 1876년 6월29일 중국의 황제가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요구하던 삼궤구고(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로 바닥을 두드리는 것)를 폐지했다. 대신 허리만 앞으로 굽히는 국궁(鞠躬)의 예를 갖추는 것만으로 외국사신들이 황제를 만날 수 있도록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했다. 4개월 이후인 1876년 10월에는 영국에 공사(公使ㆍminister)를 파견하는 것을 시작으로 외국에 사신을 파견하기 시작함으로써 청도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인정했다. 1648년 10월24일 유럽국가들 사이에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Treaty of Westphalia) 이래의 국제사회에서 인정된 주권국가 간의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국제법도 받아들였다.
  청이 1898년 8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친 조선에 공사(公使)를 파견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외교행위였다. 일본과의 청일전쟁에서 패한 결과 때문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국제법적으로는 대등한 주권적 외교 관계를 대한제국과 대청제국이 체결한 것이었다. 대한제국과 대청제국이 양국에서 서로 3명씩의 상대국 주재 공사를 차례로 파견한, 주권국가끼리의 대등한 외교관계는 1905년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1905년까지 7년간 유지됐다.
 
  1905~1992년의 한ㆍ중 관계
  1894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권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한 일본은 1905년 러시아와 벌인 러ㆍ일전쟁에서도 승리해서 그해 9월5일 포츠머스(Portsmouth)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의 제2조는 "러시아제국은 일본제국이 한반도에서 배타적인 정치, 군사, 경제적인 이익을 소유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구절을 담고 있었다. 1894년에 시작한 청일전쟁의 결과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전통적으로 중국대륙의 영향권 내에 있던 한반도를 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데 이어, 일본제국은 조선에 대한 정치ㆍ경제적인 배타적인 권리를 인정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87년 뒤인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까지 중국과 한국은 지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일체의 교섭이 없는 단절의 기간을 보내게 된다. 이 기간에 한반도는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과,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됐으며,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공산당 간의 접촉과 1950년의 한국전쟁 당시의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이름의 중국군의 개입을 통한 접촉 등 두 차례의 접촉을 가졌을 뿐이다. 1948년 8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정부 수립 이후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대만섬의 중화민국과의 외교관계는 단절했다.
  1950년 10월에 이뤄진 중국군의 한국전쟁 개입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불과 1년 만에 이뤄진다는 점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반대했으나, 마오의 결단에 따라 단행됐다. 이후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3년간 계속된 한국전쟁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해 사상 처음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 40년만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중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이 추진한 개혁ㆍ개방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은 197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에 성공한 NIES(Newly Industrializing Economies)의 일원으로 한창 세계의 주목을 받고있던 한국의 경제력에 주목했다. 중국 외교부장을 지낸 첸치천(錢其琛)의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 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한국과의 경제교류와 대만의 외교적 고립을 시도하기 위해 북한과의 관계를 희생시켜 가며 대한(對韓) 접근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 1992년 8월24일의 역사적인 한중수교가 이뤄졌다. 한국으로서는 1905년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이래 87년만에 주권국가 대 주권국가의 대등한 관계로 다시 중국 대륙과 외교관계를 맺게 됐다.

  1992~2014년의 한 중 관계
  1992년 8월 한중수교 이후 2010년 4월30일까지의 한중관계는 덩샤오핑이 설정한대로 경제교류를 바탕으로
하는 대등한 주권국가간의 관계 위에서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중 때 '21세기를 향한 협력 동반자 관계 로',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방중 때는 '전면적인 협력 동반자관계'로 발전한 다음,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2013년 6월에 이뤄진 박근혜ㆍ시진핑(習近平) 정상회담에서는 "2008년에 체결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내실화"를 이루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는 이전의 관계들이 한국과 중국 양국 간의 문제만을 다루는 관계였지만,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서는 한국과 중국 양국이 양국 간의 쌍무적인(bilateral) 관계 논의뿐만 아니라 북한을 포함한 제3국과의 관계를 포괄하는 다자적인(multilateral) 관계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중국의 입장과 관련해서 커다란 주목을 받아왔다.
  1992년 수교 이후 양국 관계 확대를 위해 긍정적인 발전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이던 한 중관계는 2010년 3월26일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발생한 천안함 피격 침몰사건을 계기로 냉각되는 국면으로 진입했다. 4월30일 이명박 대통령의 상하이 엑스포 참관을 계기로 한 한중정상회담에 나온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겸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천안함 침몰과 관련 "우리는 한국정부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조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해 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객관적 조사를 촉구하는 듯한 언급을 했다. 사흘 후 인 5월3일에는 베이징을 방문한 김정일 북한 노동당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인민대회당에서 회담을 갖고 중국과 북한이 우호 선린 관계임을 과시함으써 한 중관계는 수교 이후 18년만에 처음으로 냉각기에 접어들었다.
  한ㆍ중 관계는 2012년 초에 출범한 박근혜 대통령 체제와 시진핑 체제 간에 접근이 이뤄져서 현재 밀월기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한국은 통일로 향해가는 과정에서 중국의 협조가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중국은 2011년에 시작된 미국의 중국에 대한 '재개입(re-engagement) 전략'에 따른 중국 봉쇄정책의 포위망을 뚫기 위한 필요성에 따라 상호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 양국의 접근은 2013년 박근혜ㆍ시진핑 정상회담 당시의 합의에 따라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 파견됐던 중국군의 유해를 한국정부가 64년만에 중국으로 반환해줌으로써 한국전쟁으로 형성됐던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해원상생(解寃相生)'의 단계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대등한 한 중 관계를 위한 전제조건
  2010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 피격침몰 사건과 연평도 피격 사건 과정에서 중국은 미 항모 조지 워싱턴호의 백령도 근해 진입에 대해 "절대로 반대한다"는 등의 표현을 구사해가며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최근 들어 양국 관계의 접근이 이뤄짐으로써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정책을 바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중국이 북한에 대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철회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고 있으며, 현재의 한ㆍ중 접근은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 후진타오 시대의 북ㆍ중 밀월과 한ㆍ중 관계의 '정냉경열(政冷經熱)'의 상황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부정되지는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2000여년간 한반도와 중국 대륙은 서로 교류하면서 역사를 이어왔고, 1894년에 청과 일본 사이에 발생
한 전쟁으로 한반도와 중국은 100년 가까이 소원했으나, 1992년 역사적인 한ㆍ중 수교로 교류의 이어가고 있
다. 앞으로도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교류는 두 지역의 수도가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가까운 지리적 위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중국대륙의 번영이 한반도의 번영에 영향을 미치며, 한반도의 번영이 중국대륙의 번영에 도움이 된다는 시각을 두 나라 정치지도자들이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박승준(인천대 초빙교수)


  <필자 소개>
ㆍ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석사,박사(국제정치학)
ㆍ공군사관학교 중국어 교관
ㆍ조선일보 홍콩 베이징 특파원, 국제부장
ㆍ북중전략문제연구소장
ㆍ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위한 양국 전문가 공동 위원회 위원 역임
ㆍ현 한국 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ㆍ상하이 푸단대학교 국제문제연구원 한반도 연구센터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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