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인문대학 2층 제1시청각실에서 세계고전강좌 강연을 하는 한성국 교수

  1900년대는 과학의 황금기였다. 진화론을 비롯하여,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과 불화정성의 원리, 수학의 기초이론과 불완전성의 정리, 사이버네틱스와 정보과학의 태동, 전자기학, 심리학 등 모든 과학 분야에서 인류 역사상 유래 없는 폭발적인 성과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과학이 급격하게 진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 발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미흡하였다. 몇몇 뛰어난 천재 과학자나 연구자가 과학 발전을 주도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지층 탐사식의 인식으로는 과학을 발전시키는 근본적인 원동력을 발견할 수가 없다. 생물의 진화가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에 의해 구동되는 것처럼, 과학의 진화를 구동하는 원리를 발견하여야 과학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의 진화가 우연한 발견이나 이론의 확장 이상의 중요한 요소에 의하여 구동되고 있다면, 과학의 역사는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하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 발전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 과학의 본질을 규명하고 과학의 진화에 내재한 심층구조를 패러다임 (paradigm)으로 추상화하여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하였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철학과 과학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여 엄청난 충격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다방면 심대한 영향을 끼친 20세기 최고의 과학분야 고전이 되었다.

■ 쿤의 패러다임 이론
  쿤의 과학관의 핵심은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이란, 어떤 주어진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믿음,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말한다. 또한 패러다임은 과학 공동체의 한가지 구성 요소인 구체적인 문제 풀이를 지칭하는데, 이것이 모델이나 예제로서 사용될 때 명시적 규칙을 대신하여 정상과학의 남은 퍼즐을 푸는 기초가 된다. 요약한다면, 어떤 시대에 과학자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체계와 문제 해결방식이라 할 수 있다.
  쿤의 패러다임은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연상하게 한다. 동굴 속에 꼼짝하지 못하고 벽만 바로 볼 수 있는 죄수들이 있다. 죄수 뒤에는 새, 나무, 젖소 모양의 허수아비가 모닥불에 반사되어 벽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죄수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가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죄수가 사슬에서 풀려나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된다. 동굴 밖의 죄수는 실제의 새, 나무, 젖소를 보게 되고 눈부신 태양도 알게 된다. 그 죄수는 지금까지 보아온 동굴 벽의 세계가 모두 가짜라는 것도 깨닫고,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온다. 이제 그에게는 동굴 벽의 그림자는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하며, 이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굳게 믿는 나머지 죄수들이 한심하고 불쌍하게 생각된다. 그가 밖에서 본 것을 다른 죄수에게 말해주면 어떻게 될까?
  쿤의 패러다임은 동굴 속의 죄수들처럼 과학자 공동체가 소통을 위해 공유하고 있는 인식체계라 할 수 있다. 과학을 집단 공약의 집합체로 생각하는 그의 패러다임 중심의 과학관은 상대주의적 관점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 과학혁명의 과정
  찰스 다윈이 생물의 진화 원리를 자연선택과 돌연변이로 정의한 것처럼, 쿤은 과학의 진화를 패러다임 전환으로 정의하고 있다. 쿤에 의하면 과학은 4단계를 거쳐 패러다임 전환이 발생한다.
  과학자 공동체는 자신들의 연구를 가능케 하는 도구와 문제의 집합체인 패러다임을 수용하면서, 과학은 정상과학(normal science) 단계에 진입한다.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의 틀 속에서 자연현상의 본질을 탐구하고, 관측된 사실과 이론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패러다임을 보완 또는 수정하여 명료화 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정상과학이 형성이 되면, 과학의 연구는 패러다임의 틀 속에서의 퍼즐(puzzle)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쿤은 생각한다. 정상과학 단계에서는 답은 있으나 여태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퍼즐을 풀어낸 뛰어난 퍼즐 풀이자’가 뛰어난 학자로 평가 받는다. 간혹 풀리지 않는 문제 발생하거나 오류가 있을 경우에는 과학자들은 문제를 무시하게 된다. 쿤 이전의 과학철학 또는 과학사 연구에서는 관찰된 결과가 과학이론의 결과와 다를 때는 이론을 폐기된다고 생각하였지만, 쿤은 과학자 공동체가 패러다임을 유지하기 위해 문
제를 폐기한다고 주장한다. 즉, 한두 가지 사례 때문에 확고한 믿음인 패러다임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문제나 설명할 수는 없는 사례가 두드러지게 증가하게 되면, 이런 변칙현상은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변칙현상이 심각해지면 기존 패러다임에 위기가 발생한다. 위기는 정상연구가 아닌 비정상적 연구를 촉발하고, 패러다임에 대한 불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고 하는 의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논쟁이 야기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기존 패러다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변칙현상이 장시간에 걸쳐 관측되고 누적되어 더 이상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때, 과학자 공동체는 점차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정하고, 과거의 패러다임을 폐기하게 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덜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것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 전환을 쿤은 종교 개종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패러다임이 전환은 과학연구 방법과 가치 추구에 변화를 가져오고 과학자 공동체의 세계관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패러다임이 변한다고 해서 자연이나 세계 자체가 변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과학자의 시각이 변화함에 따라 자연현상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거의 예외 없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자는 아주 젊거나 그 분야를 새롭게 접하여 기존 패러다임에 사고방식이 고정되지 않은 사람이다.
  과학의 진화는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정상과학, 위기, 패러다임 혁명, 새로운 정상과학의 순으로 변화하며 과학혁명이 발생하게 된다. 기존에는 과학발전은 과거의 성과를 누적해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쿤은 구체제의 과학자 공동체 패러다임이 새로운 체제의 패러다임으로 단절적으로 변화하는 혁명적 과정으로 주장하고 있다.

▲ <과학혁명의 구조> 저자 토마스 쿤 역자 김명자, 홍성욱 까치글방 2013

 ■ 과학 혁명의 쟁점
   일반적으로 과학은 자연현상에 내재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쿤은 과학이란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믿음,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인 패러다임으로 생각하여 과학적 진리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하면 물질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통계 또는 확률적으로만 인식 할 수 있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이어야 할 과학이 비과학적인 우연 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과학적 진리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쿤은 이러한 사례가 과학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패러다임의 정당성을 지지 해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은 언어와 같이 본질적으로 어느 한 집단의 공통된 속성이며,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과학을 이처럼 사회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 쿤의 주장은 과학의 본질을 호도하였다는 과학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과학의 연구는 절대적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 쿤의 주장이다. 과학의 연구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한 적이 없고, 정상과학을 명료화 하기 위한 퍼즐풀이 라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 이전에는 유기체는 점차 고등한 형태로 변화한다는 목표지향적 발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화론은 신이나 자연에 의하여 설정된 궁극적인 목표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유기체는 자연선택에 의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도록 복잡해지고 더욱 세분화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과학 역시 패러다임의 선택에 의하여 궁극적 목표 없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진리라는 개념이 불명하다는 것이다. 쿤은 과학이 더욱 세분화 되고 있는 것은 이런 특성 때문이라고 한다. 쿤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 연구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과학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고, 과학이 패러다임인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은 절대적 진리를 향하여 발견된 진리를 누적하여 점진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 패러다임의 단절적 변화라는 것이다. 경쟁하고있는 패러다임은 양립할 수 없고 어느 패러다임이 우수하다고 할 수 없는 공약불가능한(incommensurable)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전환은 확실한 증거없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으며 패러다임 선택은 이성적 또는 논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의 가치관과 집단적 합의에 의해서 선택된다고 한다. 결국 패러다임 선택에는 합리적인 기준이 없게 되고 과학자체가 비합리적인 활동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쿤의 이러한 주장은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쿤을 상대주의자로 보이게 하는 논란을 야기하였고, 과학자들은 과학의 발전을 군중심리로 격하시켰다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혁명적 주장을 통해 과학에 대한 인식 변화를 주도하였다. 출간 즉시, 과학의 정체성에 대한 충격과 논란을 가져 왔으며, 과학철학과 과학사뿐만 아니라, 종교,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쿤의 주장처럼 모든 학문 분야에서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패러다임 이라는 용어가 누구나 사용하는 유행어가 된 것을 보면, 『과학혁명의 구조』가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쿤의 주장 속에 내재한 과학의 본성에 한 이해, 과학자 공동체의 사회성과 문화에 대한 인식, 과학 발전의 비합리성 등에 대한 급진적 논리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출간된 지 50여년이 지난 현재, 쿤의 설득력이 많이 약화되고 있다. 하지만,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촉진제가 될 것이다. 과학은 쿤의 주장처럼 시대의 패러다임일까?

한성국 교수(컴퓨터공학과)


<필자 소개>
 인하대학교 전자공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인공지능 , 차세대 인터넷 서비스 , 인지 과학 전공)
 펜실베니아 대학교 방문교수
 오스트리아 인스부룩대학교 연구교수
 한국 의미 기술협의회 회장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는 『XML워크샵』,『PC 및 통신 활용』, 『전자우편 참 쉽네요』등 다수.
 현재 원광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