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영국의 과학철학자 화이트헤드(A. Whitehead)는 17세기를 "천재의 세기"라고 불렀는데,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그 "천재의 세기"를 연 첫 번째 사람이고, 『신기관』은 그의 대표작이다. 17세기부터를 근대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베이컨은 근대의 문을 연 사람이고, 근대정신의 특징을 과학적 접근방법이라고 한다면, 베이컨이 귀납적 관찰방법을 주창한 『신기관』은 근대정신의 초석을 닦은 저작이다.

▲  세계고전강좌에서 강연 중인 진석용 교수

   『신기관』이라는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인 『오르가눔(Organum)』에 대한 대항의 의미를 담고 있다. 라틴어 'organum'(영어 'organ')은 우리말의 '기관(機關)', 혹은 '틀'에 해당한다. 기관이라는 말은 화력이나 수력과 같은 에너지를 기계적인 힘으로 바꾸는 장치를 일컫는 말인데,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를 이 장치 속에 넣으면 지식이 생산된다는 뜻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의 논리학에서 '오르간'이라는 말을 사용해왔다. 사람의 손놀림을 오르간이 음악소리로 바꾸어 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논리학을 지식의 생산 '기관'으로 여긴 것도 일리 있는 유추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베이컨은, 제목에서부터 스콜라학자들의 연역 논리학과 결별할 뜻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참된 귀납법'을 통해서 얻는 지식만이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다고 역설한다.
   『신기관』은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은 '(우상) 파괴편'이고, 제2권은 '(진리) 건설편'이다. 제1권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하는 널리 알려진 경구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편견들, 즉 네 가지 '우상'을 하나하나 논박하고, 자신이 제창한 귀납법의 개요를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중세를 뚫고 솟아나는 근대정신의 파릇파릇한 싹을 만나게 된다. 제2권에서는 우상에서 해방된 인간의 지성이 과학적 발견을 위해 걸어야 할 길, 즉 '참된 귀납법'의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참된 귀납법'은 "개별적인 사례에서 저차원의 공리로, 그 다음에 중간 수준의 공리로, 계속해서 고차적인 공리로 차차 올라간 다음, 마지막으로 가장 일반적인 공리에 도달하는 길이다. 저차원의 공리는 감각적인 경험 그 자체와 별로 차이가 없고, 가장 고차적인 일반적 공리도,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실질적 가치가 없다."
   그러나 '참된 귀납법'을 채택하기만 하면 저절로 자연의 진리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편견, 즉 '우상(idola)'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에는 네 종류가 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및 극장의 우상이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성 그 자체에 인간이라는 종족 그 자체에 뿌리박고 있는 우상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 하는 주장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지각은 "우주"를 준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준거로 삼기 쉽다. 베이컨은 종족의 우상에 사로잡힌 인간의 지성을 "표면이 고르지 못한 거울"에 비유하였는데, 이런 거울은 "사물을 그 본모습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서 나오는 반사광선을 왜곡하고, 굴절시켜 보여준다."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우상이다. 개개인은 '자연의 빛'을 차단하거나 약화시키는 제 나름의 '동굴' 속에 갇혀 있다. 그것은 개인 고유의 특수한 본성일 수도 있고, 그가 받은 교육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가 읽은 책이나 존경하고 찬양하는 사람의 권위일 수도 있다. 인간의 정신이 각자의 기질에 따라 변덕이 심하고, 동요하고, 우연에 좌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시장의 우상'은 인간 상호간의 교류와 접촉에서 생기는 우상이다. 인간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그 언어는 일반인들의 이해수준에 맞추어 정해진다. 여기에서 어떤 말이 잘못 만들어졌을 때 지성은 실로 엄청난 방해를 받는다. 잘못된 언어는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모든 것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인간으로 하여금 공허한 논쟁이나 일삼게 한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철학의 다양한 학설과 그릇된 증명방법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생기게 된 우상이다. 베이컨은 기존의 철학 체계들이 극장에서 상연하는 각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극이 "실제 역사로부터 이끌어낸 진실한 이야기보다 더 진짜 같고, 더 우아하고, 더 신나는 것"처럼, 기존의 다양한 철학 체계들도 겉보기에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이 철학 체계들은 "대체로 적은 것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이끌어 내어 그들 철학의 토대를 세우기 때문에, 실험과 자연사(自然史)의 기초가 박약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자들의 궤변과, 플라톤 학파의 미신적인 철학이 여기에 속한다.

▲ 저자 프랜시스 베이컨|역자 진석용|한길사 |2001.06.20

   이러한 우상들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연히 얻은 경험이 아니라 계획된 실험을 통하여 얻은 경험에서 중간 수준의 공리를 이끌어내고, 이 공리에서 다시 새로운 실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중간 수준의 공리"란 바로 사물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상'이라는 말은 스콜라 철학자들의 어법에서는 '목적인'을 의미하지만, 베이컨의 어법에서는 '법칙'을 의미한다. 즉, 베이컨은 "어떤 질료나 물체 속에 들어 있는 단순본성들, 이를테면 열이나 빛이나 무게와 같은 단순본성들이 그 물체를 지배하고 구성하고 규제하는 활동 법칙"을 '형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물의 본성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아야 어떤 물체에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거나 추가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의 힘이다. 그러므로 학문의 과업은 "어떤 물체의 본성의 형상이나 혹은 그 본성의 진정한 종차(種差)를, 혹은 그러한 본성을 낳는 본성을, 혹은 그러한 본성이 유래되는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며, "작용인과 질료인이 형상을 만들어내는 연속적인 과정을, 즉 모든 물체의 생성과 운동 속에 숨어있는 '잠재적 과정'을 발견하는 것"이며, "운동하지 않고 정지해 있는 물체에 대하여는 그 속에 숨어있는 '잠재적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 즉 "자연을 해석"하는 문제는 두 부문으로 나뉘는데, 한 부문은 "경험으로부터 공리를 추론하는 것"이고, 또 한 부문은 "공리로부터 새로운 경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근대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경험적 기초 위에 가설을 수립한 다음, 이 가설을 검증할 관찰을 그 가설로부터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학문에 종사한 사람들은 경험에만 의존하였거나, 독단을 휘두르는 사람들이었다. 경험론자들은 개미처럼 오로지 모아서 사용하고, 독단론자들은 거미처럼 자기 속을 풀어서 집을 짓는다. 그러나 꿀벌은 중용을 취하여, 뜰이나 들에 핀 꽃에서 재료를 구해다가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한다. 참된 철학의 임무는 바로 이와 비슷하다. 참된 철학은 오로지 (혹은 주로) 정신의 힘에만 기댈 것도 아니요, 자연지(自然誌)나 기계적 실험을 통해 얻은 재료를 날 것 그대로 기억 속에 비축할 것도 아니다. 그것을 지성의 힘으로 변화시켜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베이컨이 한 말 중에 가장 널리 인용되고 있는 이 구절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는 두 가지 능력, 즉 경험(실험)의 능력과 이성의 능력이 "긴밀한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꿀벌이 꿀을 만드는 것처럼 지식을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눈으로 베이컨을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자신이 제안한 귀납 추론의 정당화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그 자료들을 두어 가지 기준에 따라 잘 분류해 놓기만 하면, 자연의 법칙이 저절로 발견될 것으로 낙관하였다. 그의 말을 빌면, "발명 자체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자신이 그것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는 귀납법적 탐구의 위력을 자나 컴퍼스로 직선을 긋거나 원을 그리는 일에 비유했는데, 오늘날처럼 방법론이 세련된 과학에서도 진리를 발견하는 자동 기계는 없다. 또한 전제가 옳다면 결론도 반드시 옳음을 보장하는 연역적 추론과는 달리, 귀납추리의 결론은 언제나 '정당화'의 문제를 야기한다. 베이컨에게서 이런 문제에 대한 주의(注意)까지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료들을 일별하면서 그의 머리에 떠오른 '이성적 추론'은 더 이상의 정당화가 필요 없는, 누구에게나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다.
   둘째, 그는 물리학에서 수학이 하는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을 '작용' 또는 '효과'라는 근대적 관념으로 바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수학적인 양으로 관찰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질적으로 서로 다른 구분을 하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러므로 베이컨은 예컨대, 오늘날에는 '온도'라는 동일척도에 의해 파악하고 있는 '열과 냉'을 질적으로 서로 다른 개념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이 귀납적 방법론과 과학철학에 기여한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그는 인간의 지성이 빠져들기 쉬운 편견과 오류를 타파하고자 하였으며, 지식 생산을 위한 '신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신기관'이 실제로 필요했고, 베이컨이 예상한 것과 꼭 같지는 않았지만 '실험 물리학'과 같이 그가 주창한 기본 관념을 반영한 새로운 방법론이 나타났다. 17세기와 18세기를 통해 혁명적으로 발전한 과학의 세계는 데카르트와 갈릴레이의 수학적·실험적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19세기에 이르러 발달을 보게 된 근대의 생물학이나 심리학과 같이 계량화가 어려운 학문 분야에서는 베이컨 류의 '질적 구분'이 다시 부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중세 후기까지의 학문 방법을 '형이상학적 명상에 의한 질적 분류'로, 17세기 이래 19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근대 과학의 방법을 '실험에 의한 양적 측정'으로 단순화하여 표현할 수 있다면, 베이컨의 '실험에 의한 질적 분류'는 두 시대의 경계선상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석용 교수(대전대학교 정치언론홍보학과)

 <필자 소개>
·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 오하이오주립대학과 구마모토학원대학에서 연구 및 강의.
· 저서와 논문으로『칼 마르크스의 사상: 인본주의와 사적 유물론』,『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 「홉스의 ‘시민철학’의 과학적 기초」등과 역서로『신기관』,『리바이어던』등 다수.
·현재 대전대학교 정치언론홍보학과 교수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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