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불타는 황혼

 과거 역사를 돌아보는 시선의 귀결점은 결국 현재의 나이고 우리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기 위하여 우리는 역사를 돌아본다. 여기 잊혀진 역사의 한 대목이 있다. 때는 1898년 3월 열흘께, 어떤 나그네가 있어 한양의 종로 거리를 거닐고 있다면 그는 눈앞의 광경에 몹시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거리가 온통 시위 인파로 넘실거리고 있지 않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위 군중들은 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을 규탄하였다. 이는 즉각 당시 서울의 외교계와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한국 민중의 성장에 모두 놀라움을 표시하였다.(신용하, <독립협회 연구>). 시위를 주동했던 정교는 <대한계년사>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러시아 측은 절영도 조차를 요청했던 일을 취소했다. 이로부터 재정권과 군사권이 다시 우리 정부로 돌아오게 되었다."

 백성들이 군중 시위를 통해 외세를 일거에 물리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만민공동회'는 어떻게 귀결되었는가? 몽둥이를 든 보부상패들이 시위대를 가격하고 종내는 군대가 동원된다. 그 해 12월 25일 만민 공동회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한 번 깨어난 민중의 집단의식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암흑 속에서 더욱 불타올랐던 불꽃들을 찾아 볼 것이다.
  

▲ 우당 이회영

 2. 소리 없는 우뢰- 아나키스트 혁명가 이회영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할 때 충신열사가 수없이 나왔지만, 우당 이회영 가문처럼 6형제가 모두 결의(決意)하여 거국한 사실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진실로 6형제의 절의(節義)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되고 우리 동포의 절호(絶好) 모범이 되리라. 나라가 해방되는 날 우당 가문의 재산을 돌려주어야 한다.> (월남 이상재)

 이조판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이회영은 나라가 망하자 6형제를 설득하여 전 재산을 급히 처분한 후 현재로 치면 약 600억 원을 가지고 만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군관 학교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한다. 자금이 고갈되자 본인과 가족 형제들이 극빈의 생활고를 겪는다. 65세의 노령으로 뤼순 감옥에서 최후를 마친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증언을 남겼다. 그 중 일부이다.

 <우당 선생은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에 초탈하였다. 선생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나는 본래 벼슬을 싫어한다. 때문에 나는 독립한국도 반드시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이 평등한 가운데, 만인이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따라서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자유발전 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것이 나의 독립관이며 정치이상이다. 나도 남에게 지배받고 싶지 않으니 나도 남을 지배해서는 아니 될 것이 아닌가. 지배 없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이 우리 독립한국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일관된 의견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신분제도의 불평등을 배척하고, 관료들의 권위주의, 지배욕을 저주해서 벼슬 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또 자기과시를 싫어하고 헛된 명성을 구하는 일이 없었다. 선생은 위험이 따르는 혁명공작에 있어서는 젊은 동지들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젊은 동지들이 만류하면 선생은 이런 말씀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하였다.
'생과 사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 해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더욱이 혁명공작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일 없이 놀고먹다가 큰 소리 헛된 소리만 치고서 사라져 가는 어릿광대의 삶보다는, 사명과 임무를 다 하려다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가 있는가.'
우리들이 과연 선생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지 두렵기만 하다.> (우관 이정규)

 <남개(중국의 천진)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 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딸 규숙의 옷까지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기 때문에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정화암)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눈물어린 수기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이다

 <북경에서 나온 지가 어언 4년이 되어 가는데, 하루는 우당님에게서 온 편지를 보니, 급한 사정으로 딸 규숙, 현숙을 천진 빈민 구제원으로 보내어 성명은 홍숙경, 홍숙현으로 고쳤으니, 편지할 때엔 '구제원 홍숙경'이라고만 하면 받아본다 하시고, 당신은 규창을 데리고 무전여행으로 상하이로 향하면서 편지를 부친다고 하셨으니,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으리오. 나는 혼절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하루는 바느질감을 구하려고 종일 유곽 근처를 여러 군데 다니고 있었다. 나이 한 45세쯤 된 여자가 나를 보더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 여자는 포주인데…>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두 딸을 빈민원에 맡겨야 했고, 귀족의 부인이라는 신분으로 아내는 유곽에서 삯바느질을 하여 푼돈을 얻어야 했으며, 막내아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야 했던 명문대가 출신의 이회영. 그 앞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라는 말마저 오히려 무색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가?

 신채호와 나눈 대화를 들어 보자.

 "여러 선진국의 현 정치제도를 그대로 답습 모방한다면 부자유와 불평등에 의해 불만, 불평, 억압이 생겨나는 저주스러운 현대사회의 결함이 새로이 독립할 우리나라에서도 반복되지 않겠는가?"

 독립투사 김종진과의 대화 내용을 들어 보자.

 김종진: "장차 우리가 독립을 전취(戰取)한다면 어떤 사회를 건설해야 하겠습니까?"
이회영: "자유 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어야 하네. 국민 상호간에는 일체의 불평등, 부자유가 있어서는 안 되네. 자유 합의를 바탕으로 한 운동가들의 희생으로 독립이 쟁취된 것이라면 독립 후의 내부적 정치 구조는 권력의 집중을 피하여 지방분권적 지방자치제를 확립해야 하고, 아울러 지방자치체들의 연합으로 중앙 정치 기구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네."
김종진: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회영: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비용으로 부담하고 실시되어야 하네. 가난하다고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면 안 될 것이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인간상호간, 사회상호간의 증오와 불신은 과도기적인 것이요, 불변의 것도 아니네. 태고로부터 연면히 내려온 인간성의 본능은 선한 것이네."

 3. 불꽃같은 예술혼들

▲ 영화황제김영

 1) 영화 황제 김염
일제강점기 중국인들에게는 영화 황제로 널리 알려졌으나 한국에선 알려지지 않은 스타가 있다. 본명은 김덕린, 중국에서는 진옌이라 불린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김필순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필순은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중 일본인에게 독살 당한다. 이에 따라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며 영화에 빠져든 김염은 1927년 상하이에 뛰어들어 1932년 <야초한화(野草閑花)>란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  정율성

 2) 노래로 항일 혁명을 지폈던 정율성
중국의 정식 군가인 <인민해방군가>는 놀랍게도 전남 광주 출신의 정율성(1914-1976)이 지은 것이다. 1939년 연안에서 이 노래를 지었을 당시의 제목은 '팔로군 행진곡'이었다. 1945년 10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가 1988년 7월 25일 등소평에 의해 공식적으로 <중국인민해방군가>로 확정된다. 그는 1933년 형을 따라 중국 남경(南京)으로 가서 비밀 항일 활동을 하면서 음악에 심취했다. 상해에서 소련 음악가에게 성악을 배웠다.

 

▲  세기의 무희 최승희

 3) 춤사위로 세계를 매료시킨 최승희
최승희는 일본 중국 뿐 아니라 유럽각국, 중남미 여러 지역에서 무용으로 격찬을 받았다.
아래는 최승희 춤에 쏟아진 찬사의 극히 일부분이다.

 <최승희는 일본 제일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조선 민족 전통의 강인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노벨 문학상 수상자)

 <최승희는 현재 세계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한 사람이다. 그녀의 춤은 화가의 예술처럼 관객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그림이 되었다.> (L. A. Times)

 <진정한 예술가는 시대의 꿈과 이상을 창조적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당신이 바로 그런 예술가요.> (피카소)

 <다양한 감정을 절묘한 독창성으로 표현했다. 더 이상 없을 만큼 우이하고 경쾌한 연기를 통해 매우 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관객들은 전 곡목에서 완전히 황홀경에 빠졌다.> (파리 Le Matin지)

4. 나가며
이회영 선생의 통찰력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더욱 놀랍다. 권력 집중이 없는 자유와 자치의 세상, 위선과 거짓을 벗어난 지행합일의 행동주의, 일체의 지배와 억압이 없는 대동 세상을 이루기 위해 그는 한 평생을 바쳤다.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 이회영의 불굴의 정신과 푸른 꿈, 어둠 속에서 더욱 타올랐던 예술혼들은 우리 모두의 값진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삶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강하며, 또 불가사의한 것인가를 전율처럼 느끼게 된다. 알고 보면 우리는 굉장한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잊지 말자.

                                                                                          김선흥(김대중 평화센터 사무총장)

 <필자 소개>
· 1980년에 외무부 입부(외무고시 14회)
· 청와대 의전비서실 행정관, 외교부 부대변인, 주칭다오 총영사관 총영사 등
· 김대중 전 대통령 국제의전비서관 및 광주광역시 국제자문대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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