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 5일 인문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박선영 교수

   1. 천의 재능을 지닌 인물, 톨스토이
   1828년에 태어나 파란만장한 여든 두 해를 살다 1910년에 세상을 떠난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만큼 전세계적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한 꼬마 독자에서부터 삶의 연륜과 경륜을 터득한 노인 독자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기 작가라 할 수 있다. 톨스토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90권짜리 전집은, 야스나야 폴랴나 저택 서재에 소장되어 있는 2만 5천여 권의 장서와 함께 작가이자 종교사상가, 그리고 교육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의 굴곡진 지적 편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2.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화신, 톨스토이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 (1920)에서 모든 생명체에는 '생명본능(Eros)'과 '죽음본능(Thanatos)'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본능이 내재되어 있음을 역설한다. 통상 대립적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생명체를 생명체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근원적 요소로,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가 없다. 게다가 '삶의 적'으로 인식 되어오던 죽음을 고통스러운 삶의 과정으로부터 완전한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죽음과 죽음본능에 긍정적인 성격을 부여하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경우,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이처럼 치열하고도 맹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교차 반영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의 삶과 창작에는 이 두 본능이 아주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온갖 육체적·정신적 쾌락에서 벗어나 금욕적이고 소박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한 톨스토이즘을 강력히 설파했지만, 정작 자신은 청년 시절부터 도박과 술, 여자에 빠져 방탕하게 살았었고 노년까지 원기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러한 강인한 생명본능을 지니고 있었던 만큼이나 죽음본능에 자주 이끌리기도 했다.
   그 일차적인 원인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주변을 끊임없이 감돌았던 죽음의 그림자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살이 채 되기 전에 어머니를, 9살이 되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난 뒤, 톨스토이 가의 다섯 남매들은 친인척들의 손에서 길러졌다. 이후 군에 입대한 톨스토이는 크림 전쟁에 참전하여 수많은 사상자들을 목격하게 되었고, 1856년에는 셋째 형의 죽음을, 1860년에는 큰형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었다. 큰형 사망의 충격으로 톨스토이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주변인들의 죽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톨스토이에게 모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친척 아주머니 예르골스카야가 1873년에 사망하였고, 1875년에 고모 유슈코바가 사망하였으며 1873년에서 1875년 사이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자식 셋을 연이어 잃었던 것이다. 그에게 죽음은 온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을 만큼 실체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특히, 1869년 아르자마스라는 곳에서 한밤중 갑작스레 체험한 15분간의 죽음에의 공포와 불안은 평생토록 잊히지 않았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겉보기에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50세 즈음에,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자살 충동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참회록』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톨스토이에게 타나토스는 에로스만큼이나 강력한 것일 뿐 아니라 에로스와 흡사한 힘으로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톨스토이 평생의 궁극적 화두가 다름 아닌 '인간'이었던바, 그의 창작 전반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근본적인 테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82년에 완성한 『참회록』을 통해 '회심'을 공표한 이후에 톨스토이는 이 문제에 더 한층 집착하게 되어 그에게 있어 삶과 죽음의 문제는 예술 차원에서뿐 아니라 종교철학적이며 윤리적인 차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논의 대상이 되었다.

 3. 『이반 일리치의 죽음』 (Смерть Ивана Ильича, 1886)
   3-1. 죽음과 죽어감
   1881년에 사망한 툴라 지방법원의 검사 이반 일리치 메치니코프(노벨상 수상자인 생물학자 일리야 일리치 메치니코프의 형)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엄밀히 말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아니라 '죽어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소설이다.
작품이 시작되면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등장한다.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판사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신문 부고란을 본 그의 절친한 친구의 입을 통해 짤막하게 전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인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사망 소식에 동료들이 처음 생각한 것은 그의 사망에 따른 '자리 이동과 보직 변경'이었고, 이후 그들은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다. 조문을 가서도 진심으로 애도를 하기 보다는 그날 저녁 있을 카드놀이 따위에나 신경을 쓰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과 남편 사후 지급될 국고 지원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미망인의 모습을 통해 상류사회의 가식과 허위, 속물성이 작품 초반부에서 이미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다.
   인간의 일생을 숫자로 형상화한 듯, 총 12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계기로 인간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의 과정 전체를 돌아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삶과 죽음에 접근하는 양상은 자못 흥미롭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삶과 죽음을 다소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조망하다가 점점 이반 일리치의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듦으로써 독자들이 이반 일리치의 내밀하고도 고통스런 내적 고백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만든다.
   '죽어감'을 체험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퀴블러-로스(Elisabeth Kubler-Ross)가 『죽음과 죽어감에 대하여』 (1969)에서 밝힌 죽음의 5단계 과정(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을 따르고 있는 듯 보인다. 그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단계에서 이반 일리치가 보여준 사고의 인식 과정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다름 아닌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이중적 태도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키제베터 논리학의 삼단논법('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그는 키제베터의 삼단논법은 카이사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남과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인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오류는 비단 이반 일리치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1장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바로 이런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병으로 죽어가면서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본 뒤 결국 삶이 허위로 가득 차 있었음을 힘겹게 인정하고 나서, 그리고 타인을 연민하고 용서하고 나서 비로소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마침내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렇듯 이 소설에서 죽음은 상실이나 부재, 공포라는 부정적인 성격을 넘어서서 긍정적 성격까지도 획득하게 된다. '죽음은 삶의 반영'이라고 생각했던 작가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관심을 쏟았던 만큼이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사색하였다.

 3-2.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 앞에서 돌아보는 '올바른 삶'에 대한 명상
   작품 속 인물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엄격하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인물로는 이반 일리치의 법원 동료들, 그의 부인과 딸, 예비 사위 그리고 그를 치료했던 의사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타인의 죽음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그 죽음이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다.
   이반 일리치가 과시를 위해 번쩍이는 것들로 공들여 꾸며놓은 '좋은 집'과 아파서 누워있는 그를 제외한 가족 전체가 한껏 차려 입고 나들이 가게 되는 '극장'은 위선의 가면을 쓴 이들이 거하는 허위의 공간을 표상한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건강한 상태였을 때 이 첫 번째 그룹 인물들의 위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스스로가 이런 허위와 위선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어가면서 그는 결국 그들의 속물적이고도 위선적인 삶을 눈치 채게 되고 그들 속에서 살아왔던 자신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삶을 깊이 성찰하게 된다.
   한편, 이처럼 위선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도 진실의 빛은 미약하나마 꾸준히 빛을 내고 있었다.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인물들, 즉 하인 게라심과 김나지움에 다니는 아들 볼로쟈/바샤가 이 진실의 빛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인물은 1장에서 이미 여타의 인물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농부 출신의 하인 게라심은 "다 하느님의 뜻이지요. 모두 가야 할 길입지요"라며 주인의 죽음을 자연의 순리로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우느라고 퉁퉁 부은 두 눈"을 한 아들은, 마치 연기 하듯 조문객 앞에서 "깨끗하고 얇은 면 손수건"을 꺼내 들고 눈물 흘리기 시작하는 부인이나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의 결혼식이나 이후의 삶에 끼칠 영향을 염려하는 듯 "잔뜩 화난 모습"을 보이는 딸과는 달리, 아버지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톨스토이가 말하는 올바른 삶이란 지극히 단순하다. 진실과 순수로의 회귀!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평생토록 천착해왔던 톨스토이가 찾아낸 이 간결한 해답이 21세기의 우리들에게까지 유효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그 진실과 순수를 도외시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 것인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꼭 한번 물어볼 일이다.


박선영(서울대 및 충북대 노문과 강사)
<필자 소개>
· 충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대학원 노어노문학과 석사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러시아학술원 러시아문학연구소(IRLI RAN)에서 「오시프 만델슈탐의 유기주의 시학」(2008)으로 박사 학위 취득
· 저·역서로는 『오시프 만델슈탐의 유기주의 시학』(상트페테르부르크, 2008), 『사모 일로프 시선』(서울,2012) 등 다수.
· 현재 서울대학교 및 충북대학교에서 강사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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