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새로운 시각의 요청

   21세기를 고비로 인류의 문명은 커더란 방향 전환의 계기를 마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인류는 자연이라는 위력적 존재 앞에 공포와 굴종의 수동적 생존을 지속하면서 그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든 투쟁을 해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특히 근대과학의 성취 이후 인류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 온 과학과 기술에 힘입어 자연의 위력적 지배로부터 하나하나 벗어날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개조하여 인간이 원하는 새로운 형태의 여건을 조성해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이러한 인간의 노력이 오히려 자연의 질서를 깨트리면서 장기적으로는 인류의 멸망을 포함한 엄청난 파국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청되는 것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주요 내용들을 전부 포괄하면서도 이 모두를 하나의 일관된 틀 안에 정리해냄으로써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왜곡됨이 없이 보여줄 새로운 형태의 학문이 요청된다.
   아직 이러한 학문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알려진 몇몇 중요한 사실들만 연결해보더라도 우리의 생명과 그 안에 놓인 인간 자신에 대해 기존에 이해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림들이 그려진다.

 생명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우선 생명이라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복합질서를 이루는 것으로서 이를 '온생명'이라 부를 수 있으며, 우리가 그간 우리가 '생명'이라 여겨왔던 하나하나의 낱생명들은 그 자체로 생명이 될 수 없고 오직 온생명의 나머지 부분과 적절한 관계를 맺음으로서만 생명의 기능을 하게 되는 '조건부적' 생명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정된 한 낱생명에 대해, 이와 함께 함으로써 생명을 이루게 되는 이 나머지 부분"을 개념화하여 이 낱생명의 '보생명'이라 부를 수 있다. 이렇게 할 경우 모든 낱생명은 그것의 보생명과 더불어 진정한 생명 곧 온생명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또한 이 온생명 안에 있는 하나의 낱생명이지만 여타의 낱생명들과는 달리 강력한 주체의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통해 주체적 삶을 영위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개체로서의 자아의식에 그치지 않고 서로 간에 상호주체적 연결을 이루어냄으로써 하나의 집합적 주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주체의 영역 안에 마련하는 문화공동체로서의 자아이다. 이것은 인간이 마련하고 또 인간이면 누구나 숙명적으로 속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의 주체이다.
   이처럼 인간은 문명을 통해 자신의 집합적 주체를 심화시키고 확장시켜나간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인간의 집합적 주체 안에 담겨있던 자아의 내용은 '인류' 곧 생물 종으로서의 인간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집합적 자아의 내용이 부족이나 민족을 넘어 인류에 이르게 된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연을 인간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고 자연 속에서 인간의 자리를 넓혀나가는 것을 문명의 한 지향점으로 여겨온 것이다.

▲ 저자 장회익|한울아카데미 |2014.01.17

 진정한 '나'로서의 온생명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진정 살아있는 존재는 온생명이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내 몸은 온생명 전체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체 의식이 아직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오직 낱생명 안에 놓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탓이 크다. 그리고 설혹 이를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진정 '나'라고 느끼게 되기까지는 또 몇 가지 장벽을 넘어야 한다. 그 하나는 심정적 장벽이다. 설혹 나도 너도 아닌 '그것'이 내 몸의 일부라는 것을 지성에 의해 수용하드라도, 많은 경우 심정적인 저항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온생명 안에 속하는 다른 참여자들이 실은 나눌 수 없는 전체 곧 온생명으로의 내 몸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깨우친다면, 여기에 맞는 심정적 변화 또한 따라올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온 몸이 건강하고 조화로울 때 우리가 평온을 느끼고, 그 어디엔가 조화가 깨지고 무리가 생길 때 우리가 아픔을 느끼듯이, 온생명 어느 부분이 상해를 입을 때 우리가 마음 속 깊이 아픔을 느낀다면 우리는 이미 이러한 깨우침에 다가서는 셈이다. 실제로 일부의 사람들은 온생명에 대한 명시적인 이해 없이도 그 어떤 직관을 통해 자신을 온생명적 자아로 받아들이고 온생명과 함께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만일 인간의 집합적 주체가 온생명으로의 의식을 가지고 온생명적인 삶을 이루어낸다면, 이는 곧 우리 온생명이 스스로 깨어나 명실 공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온생명 안에서 인간이 담당하게 될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바로 인간 신체 안에서 신경세포들이 담당하고 있는 기능과 같다. 인간의 의식이 두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의 활동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과 같이, 온생명 의식 또한 인간들의 집합적 지성과 집합적 감성이 이루어내는 활동을 통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온생명의 이러한 깨어남이 완성되어 우리 온생명이 그 자체로 의식의 주체가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히 '우주사적 사건'이라 불러야 할 일이 된다. 우리 온생명은 약 40억 년 전 우리 태양-지구 체계를 바탕으로 태어나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겪으며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대부분의 식물들이 그러하듯이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생존 그 자체만을 수동적으로 지속해왔다. 그러다가 이제 인간의 출현과 함께 이들의 집합적 지성에 힘입어 40억 년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를 의식하며 이 의식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해나가는 존재로 부상할 계기를 맞이한 것이다.

▲ 저자 장회익|돌베개 |2009.11.02

 인류가 당면한 비극적 역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지금 낙관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 온생명이 신체적으로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온생명의 신경세포 구실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암세포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마치도 암세포가 자신을 더 증식시켜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증식만을 해나가듯이 인간 또한 암세포처럼 온생명의 중요한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온생명의 정상적인 생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번영과 증식만을 꽤함으로써 온생명의 몸 곧 생태계를 크게 파손시키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비극적 역설이다. 우리 온생명이 태어난 지 40억 년 만에 드디어 높은 지성과 자의식을 갖고 진정 삶의 주체로 떠오르려 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하리라 기대되는 바로 그 인간이란 존재가 이미 암세포로 전환되어 이 온생명의 생리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문명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대략 가늠해볼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는 암세포로서의 기능에서 벗어나 우리 온생명으로 하여금 더욱 건강하고 풍요롭게 성장해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과연 우리 온생명으로 하여금 건강하게 하고 풍요롭게 성장하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우리 모두는 아직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다음의 두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는 개략적으로나마 어느 것이 옳은 길인지 어느 길이 그릇된 길인지를 분별하여 그릇된 길을 버리고 옳은 길을 택해 온생명이 처한 당면한 위험을 극복하도록 하는 일이다. 사실 지금 온생명이 처한 위험은 너무도 명백해보이므로 이 점에 대해 커다란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이러한 점에 대한 우리의 지적 탐구를 더욱 심화시켜나가야 한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들은 이전에 알고 있던 것들에 비해서는 월등이 우월한 것이지만, 최종적인 진리는 아니기에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만에 하나 잘못 알고 있는 점들이 드러나면 지체 없이 수정하여 우리의 진로를 바꾸어야 한다.

 

▲ 저자 장회익|현암사 |2012.07.05

 앎의 연결고리: 뫼비우스의 띠

   우리는 오늘 자연의 기본원리들을 동원하여 우주내의 (거의) 모든 물질현상들을 이해할 단계에 놓였고, 이러한 이해의 연장선에서 생명이라고 하는 훨씬 더 특이한 현상과 그 안에 놓인 인간이란 존재가 지닌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자신 의식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삶의 여건을 개척하고 개조함으로써 문명이라는 것을 이루게 되고, 그 문명의 일환으로 자연의 기본원리들을 찾아내어 우주내의 모든 것을 파악해 나가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가 매우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자연의 기본원리들을 동원하여 우주와 생명을 이해하고 다시 그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인간이 지닌 인식의 구조를 통해 다시 애초에 동원되었던 자연의 기본 원리들의 성격을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곧 이해의 순환 고리를 통해 출발점으로 되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를 굳이 하나의 기하학적 모형을 통해 설명하자면 시작점과 끝 점이 서로 만나면서도 시작점의 앞면이 끝 점의 뒷면과 서로 맞물려 연결되는 '뫼비우스의 띠'에 해당하는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띠의 앞면을 객체적 양상이라 하고 뒷면을 이것의 주체적 양상이라 한다면, 우리 이해의 순환 고리는 객체적 양상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주체적 양상에 대한 이해로 되돌아 와 맞물리게 되는 셈이다.
   우리가 지적 탐구를 통해 이해를 심화시켜나간다는 것은 이러한 '뫼비우스의 띠' 전체를 부단히 점검함으로써 행여 전체를 파악함에 있어서 어떤 과오가 없었는지를 살핌과 동시에 부분 부분의 약한 고리를 계속 보강함으로써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앎의 체계를 다듬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행여 신뢰할만한 띠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문명은 그만큼 더 위태로워진다.

장회익(서울대 명예교수)

  <필자 소개>
·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 미국 루이지아나 주립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박사
· 서울대학교 물리학교수 역임,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겸임교수로 활동.
· 저서로는『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공부도둑』,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물질,생명,인간』,『공부의 즐거움』,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등 다수.
·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