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외국문학을 하다 보면 가끔 진짜 어려운 질문들을 받는다. 예를 들면, '우리  문학이 지금 세계 수준에 와 있는거야?'라든지, '우리 문학에는 언제 쯤 노벨상이 떨어질까?'라든지, 겉으로는 제법 심각한 것 같지만 하나도 심각하지 않은 문제들이 우리의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먼저 이런 질문이 심각하지 않는 것은 문학에 '세계 수준'이라는 게 없고, '노벨상'은 상당히 운수와 정치, 로비가 작용하는 변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오늘 주제가 "한국문학 세계화"인 것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 문학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라는 주문이다.동남아 여자들과 국제 결혼으로 우리 농촌에도 혼혈아가 많고,안산에 가면 제법 다문화시대다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백의민족, 단일민족이라는 이상한 자의식(사실 우리민족은 남방계,북방계, 김알지의 흉노족설까지 다민족적 바탕에서 이루어진 사람들이다.) 속에 살아온 우리로서는 요즘 '세계화'니 '글로벌시대'라고 떠들어대는 게익숙하면서 사실 낯설다. '익숙한 것은'은 하두 매스컴이 시끄럽게 해서이고, 아직도 혼혈아나 '튀기'가 이상한 사람으로 왕따 당하는 사회에서(우리의 인종차별은  아직 심각하다) 우리 문학의 세계성이 문제 있는 게 사실이다. 이미 우리 경제가 수출로 먹고 살고 우리 이웃에 중남미인, 흑인,백인,아프리카인이 있다는 생각이 상식인 글로벌 시대에 우리의 일반적 의식이나 민족 문학적 사고는 문제이다.
 막상 우리 문학을 우리로서 읽고 외국 문학과 비교를 하면서 읽는 학자,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문학 풍토는 서구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장점으로 보면, 작품을 발표할 월간지, 잡지의 수와 그 지면의 양이 서양보다 월등하게 좋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지금 우리의 '현대문학'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은 아픈 일이지만, 내가 알기로 문학지가 우리나라처럼 수와 양에서 풍성한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지 않나 생각된다. 거기에다 최근 조정래의 『한강』 같은 여러 권으로 된 대하소설이 팔리고 있는 현실도 외국문학자들이 보면 부러워 죽을 지경이리라. 서양에서의 문학 활동은 주로 책 출판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노벨상에까지 이르게 한 마르께스의 『백년간의 고독』도  여러 권이 아니라 단 한권의 책이다.
 어떻게 보면 문학하기에 이렇게 좋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계에 내놓을만한 좋은 작품이 잘 나오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우리 문학이 외국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자기 민족중심적이고 감상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주제에 있어서 폭을 말하면, 지나치게 우리의 정치 사회 현실, 특히 역사 현실을 엄청나게 중요한 문학적 영역으로 보고 있지는 않는가.예를 들어, '남북분단'의 아픔이나 이산가족의 만남이 미국인이나 중국인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자기 일 같은 깊은 감동을 줄까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남북 이산가족을 한 개인의 비애나 가족사의 비극으로 보면 세계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통일, 남북의 화해가 하늘을 열게 한다는 사고는 속 좁은 래시즘(racism)이, 즉 흑인 차별주의보다 더한 인종 차별주의이다. 그런 생각의 민족시와 문학이 유럽인들과 스웨덴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노벨상을 주게 되리라 믿는가?
 베트남, 필리핀인, 중국계와의 혼혈아가 한국인의 구성 부분으로 눈에 뜨이게 될 때, 우선 우리는 지금까지 혼혈아를 왕따시키던 우리의 편협한 시각과 안경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 우리가 수출을 가장 많이 하고 핵우산을 같이 쓰고 있는 미국인은 혼혈아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 구태여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쪽 혼혈이라고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미국인이 백인이어도 그 핏줄은 게르만계, 영국계, 라틴계, 프랑스계, 아시아계 등 수없이 얽히고 섥혀 있다. 폐일언하고, 도대체 그런 혈통을 따진다는 자체부터가 신라의 왕정시대 왕위 승계를 눈앞에 둔 현실이 아니고서야 오늘에는 넌센스에 불과하다.
 한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자기 성찰부터가 많은 경우 비극적이다. 예를 들면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우리 민족의 '한(恨)의 전통', '한의 힘'에 대한 외국인의 시각을 들어보자.『맥시멈 코리아』의 저자 J.스코트 버그슨이 인용하듯, 한국인의 전통을 한(恨)에 두고 있는 해석부터가 그렇다.
 "…나는 한(恨)이 어떻게 한국적 정체성의 정수가 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단일민족의 거대한 경험보다는 각기 다른 개인의 경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데 말이다. 나는 한을 명시적으로건 암묵적으로건 이데올로기적 협의사항으로 억지로 꿰맞추는 것에 대해선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20 세기 초,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학자들은 일본의 식미지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한이라는 개념을 이용했다. 한(恨)은 한국인들을 비극적 역사의 잔인한 운명 속의 영원한 희생자라는 역할에 어울리게 했다. 그리고 70년대와 80년대 민중 운동의 지도자들에 노동자 계층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은 사회의 거대한 요구 앞에 늘 제한 받는 개인의 욕망 사이의 충돌에서 야기된다. 한은 오히려 그 사회와의 조화와 융합 고정에서 달게 감수해야 하는 일종의 운명의 힘이다. 즉, 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긍정적인 힘의 원천인 것."
 나는 우선 이 한 전통론이, 일본인의 식민사관과 함께 전수된 한국인에 대한 편견이 우리 지성인들에게 의해 그대로 전수되었다는 것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나 저자 스코트가 알고 있는 사회 정의 구현과 저항 정신의 뿌리로 '한의 전통'을 내세운 해석도 정말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부조리적 현실에 융화하려는 긍정적 힘으로 본다는 것도 저항정신으로 본다는 말 만큼이나 우리민족을 소수민족의 고난과 고통, 설음의 눈으로 보려는 뒤틀린 색안경이 있다.
 나는 우리의 한 전통에서 우리 민족의 사랑 중심적 인생관을 본다. 말하자면, 우리의 한에 대한 정서는 사회적 정치적, 심지어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심미주의의 특성의 일면인 것. 중국의 기록에서처럼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낭만적 기질을 가졌으며, 그와 함께 사랑에 대한 욕구 또한 남달랐던 것 같다. 우리 민요에 '한'을 대변하는 노래들, 예를 들어 '아리랑'이나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를 들어보자. 거기에는 어떤 사회적 환경 이야기도 속된 저항 의식도 없다. '아리랑'에는 "나를 두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고 투정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싶지 않는 마음이야 동서가 어찌 다르랴. 그것을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고 유머스럽게 소매 끝을 붙드는 어여쁜 아녀자의 눈길이 그냥 손에 잡힌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한 오백 년 살자는데 왠 성화요."하는 노래 가사만 들어보아도, 우리는 이것이 엄청난 사랑의 욕구인 것을 알 수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간사지만, 막상 사랑하는데 헤어져야 하는 아픔은 누군들 다르랴. 여기에 '한 오백년 사자는…' 이런 사랑에 대한 초월적 욕구는 영원히 사랑하며 살고픈 사랑 감정이 갖는 본질적 특성이리라. 그게 한이라면, 그것은 이 크막한 사랑의 욕구 앞에 인간 실존의 한계에 대한 아픔이다.
 어떻든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인식하는데 너무 성급하게 감정적으로 정의를 내리거나, 그것을 일반화하는 데만 급급해온 느낌이다. 어느 나라 민족사나 국가 문학 연구는 어느 정도의 애국주의적 견지가 용납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배자 '일본이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썼던 논리를 어떤 다른 해석이든 그대로 고집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우리 민족의 자기 비하이며 잘못된 시각이다. 그것은 우리 집안, 우리 민족만을고집한 좁은 시각의 산물이다. 모든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배척하고 백안시하고, 마침내는 강화도로 쫒기고 무릎꿇고, 침략 당하고, 결국 한 속에 식민 지배를 감수해야 했던 우리 역사의 질곡의 슬픈 무늬이다.
 그런 시대는 이미 끝났다. 지구촌 시대에서 사라져야 할 의식이다. 다민족시대는 우선 좋으나 굳으나 함께 살아야 할 우리 이웃이 다민족이고 서로 각각 전통이 다를 수 있음을 인지하는 현실이고 환경이다. 거기에서 우리의 시각이나 다른 민족, 다른 문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바뀌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른 문화는 우리의 얼굴을 비쳐보는 거울이며, 동시에 우리의 다른 꿈, 다른 희망, 다른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창이다.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있을 때 가장 선명하게 우리를 본다. 거울은 나와 다르다. 거울은 항상 남의 거울이다. 그만큼 이질적, 이국적이다. 그러나 그 거울을 통해서만 보다 선명하게 우리 스스로의 얼굴을 읽을 수 있다.
 나의 눈은 나의 눈을 보지 못한다. 내 민족은 내 민족주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남의 문화에 비쳐보지 않고는 그 같음과 다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거울 속의 나의 얼굴은 거울 속의 얼굴이지 나의 진짜 얼굴은 아니다. 거울 속의 비치는 저 얼굴이, 사진에 나오는 이 얼굴이 나의 진짜 얼굴이라면, 나는 일정한 얼굴이 없는 사람이다. 정체성이 없는 내가 된다. 거울마다, 사진사의 렌스마다 내 얼굴은 다르게 나올 테니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나와 나의 얼굴은 있고,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데는 거울이 필요할 뿐.
 나는 지금 세계화 시대에서 우리 문학이 배워야 할 시각을 말하고 있다.말하자면 우리의 시각은 이제 우물안 개구리 시절을 떠나서 더 넓고 깊은 나를 발견하고, 누구에게나 공감을 줄 수 있는 범세계성과 더욱 깊은 자아인식과 자기성찰에 투철한 문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것은 민족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배우고 즐기며, 창으로 삼자. 동시에 그 다양하고 어지럽고 풍성한 다른 전통, 다른 문화 속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인 피와 따스함이 있음을 발견하자. 그리해야 내가 참다운 인간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서양문학 속의 동양』(고대 출판부, 2010.265-293 쪽)에서 우리 문학의 세계화의 미래를 말한 적이 있다. 19세기부터 20세계까지 중국 시와 일본 하이꾸(俳句)가 서양시를 가르쳐왔다면, 이제 우리의 전통 시(한시와 시조)와 풍류(風流) 정신이 21세기의 서양을 새로운 시정신과 정서로 일깨울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실 서양 현대시는 19세기 영국의 핏제랄드(Edward Fitzgerald)의 페르시아 시인 오마 카얌의 「rubaiyyat(4행시)」 번역과 에즈라 파운드(Ezara Pound)의 중국 당시 및 고전시 번역 「Cathay」이 새로운 풍조를 일깨웠다고 말한다. 둘 다 원어를 몰랐던 작가들의  엄청난 오역인 점에서 일치한다. 또한 엄청난 인기와 성공, 그리고 많은 영향을 끼친 점에서도  비슷하다.
 이런 예에서 본다면 우선 우리 문학의 훌륭한 번역이 급과제이다. 번역된 책이 성공할 때 세계 문학에 파문이 커지기 때문이다. 시 번역은 무척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오역일망정 이미지즘을 주도한 파운드 같은 영향력 있는 시인이면 그 파장이 대단히 클 수 밖에 없다. 우리 문학은 번역의 중요성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외국어만 알면 번역이 가능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번역어로 시나 소설이 되어야 세계에 알려진다. 여기에는 정확한 번역보다 중요한 것이 번역된 시어나 소설이 번역일망정 얼마나 힘과 향기, 재미와 감동을 수반하느냐에 성공 여부가 달렸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외국의 저명한 작가 시인들이 우리 문학의 선전원으로 나서야 가능하다. 그만큼 문학 전파 로비도 필요하다는 이야기, 이미 우리 시조에 관심을 보이는 서양 시인들도 더러 보았다. 이제 우리의 우리 문학의 어떤 것이 브랜드화할 수 있는가를 궁리해야 한다. 
 
민용태(고려대 명예교수, 스페인 한림원 위원)

   <필자 소개> 
 ·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문학 학사
 · 마드리드콤플루텐세대학교 대학원 서반아문학 박사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 고려대학교 국제어문학부 서어서문학과 교수
 · 한국서어서문학회 회장, 아시아서어서문학회 부회장

 · 저서로는 『서양문학 속의 동양』, 『행복의 과학』, 『행복의 기술』 등과 시집으로『바람개비에는 의자가 없다』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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