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일연상인 존안 (후쿠오카 묘안사장)

 양 은 용
(한국문화학과 교수)


「상인은 번성한 교화터전 향정사(香正寺)를 제자들에게 물려주고, 고향 쪽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암자를 지어 5년을 살다가 입적하였다.」일본 에도(江戶)막부 초기인 17세기에 활동했던 법화종(현재의 日蓮宗)의 고승 니치엔(日延, 可觀院, 1589-1665)상인의 최후 모습이다. 
 암자는 현재의 해복산 묘안사(海福山妙安寺), 후쿠오카(福岡)시 중앙구 당인(唐人)마을에 위치한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높고 낮은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지도상으로 확인하면 후쿠오카만의 기슭이며, 상인이 그토록 돌아가고자 비원(悲願)을 안고 바라보던 바다 저쪽의 고향이란 현해탄 넘어 조선땅이었다. 그는 과연 누구이며, 왜 이국에서 고향을 그리며 생을 마감해야 했는가?
 상인이 생을 마감한 마을 이름인 「당인」이란 원래 대륙인, 곧 한국사람들을 가리킨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가야(加羅)에 연유하여 한(韓)과 당(唐)을 「가라」로 통칭해 오는데, 그렇다면 당인마을이란 한국인들의 거류지라는 말이 된다. 임진왜란(1592-8) 때 포로로 일본에 건너간 그를 따르던 조선출신 신자들의 생활상이 지명으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으니 위대한 생애의 후영(後榮)이라 할만하다.

임진왜란에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어
 이러한 상인의 존재를 증명할 직접적인 자료를 고향 땅인 한국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다르다. 당시 일본불교계의 고승반열에 올랐던 그는 이르는 곳에서 민중의 귀의를 받는 선지식(善知識)이었고, 따라서 7-8곳에 이르는 창건사찰과 주석처는 한결같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는 「고려상인(高麗上人)」, 「조선왕자(朝鮮王子)」 등의 이름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한다. 4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의 숨결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상인은 특별한 출신성분 때문에 이름을 감추고 살기 어려웠다. 그러기에 불도의 수행에 더욱 정성을 쏟았고, 그러한 그를 민중은 어버이처럼 따르고 받들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임진왜란이라는 악세를 당하여 일본에 끌려갔던 포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유학자 강항(姜沆, 1567-1618)과 같이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송환된 인물도 있다. 그러나 포로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다가 적지에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고국에는 관련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 중에는 심수관(沈壽官), 이삼평(李三平)과 같이 도자기의 원조로 받들리는 인물도 있고, 여대남(余大男)과 같이 승려가 되거나, 오타 쥬리아와 같이 그리스도교신자가 된 인물도 있다. 특히 경남 하동출신의 여대남은 상인처럼 법화종의 고승이 되어 니치요(日遙, 本行院, 1581-1659)라는 법명과 법호를 얻고, 구마모토(熊本)에 교화의 터전을 견고하게 닦았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는 이른바 조선통신사를 통해 고국의 부친과 몇 차례의 편지내왕을 할 수 있었다.
 편지에서 일요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결혼하지 않고 있는 심경과 함께 포로로 끌려온 몇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동료 중에 왕자가 있음을 전하고 있다. 같은 범화종의 구도자가 된 상인과 니치요는 같은 시기, 같은 기관에서 수학과정을 보내게 되는데, 아마 그 과정에서 상호간의 신상을 확인했을 것이다.
 어떻던 상인과 관련된 일본의 현지조사 결과를 토대로 생애를 재구성해 보면 당시의 정황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는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臨海君, 1572-1609)의 아들, 즉 선조의 장손으로 파악된다. 임해군은 광해군과 함께 공빈 김씨(김희철의 딸)의 소생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왕실에서는 서둘러 세자를 책봉하게 되었는데, 의빈왕후 박씨(1555-1600)를 통한 적자가 없었으므로 장자인 그가 장자상속의 원칙에 따라 왕위계승의 우선순위였으나, 인성이 사납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아우인 광해군(1575-1623)에게 세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임진년에는 임해군이 21세가 되는데, 광해군의 장자인 폐세자 질이 13세에 결혼한 것처럼 조혼이 관습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보면, 결혼하여 자녀를 둔 것이 아닐까? 왕과 신하들이 백성들의 원성을 들으면서 왕도를 버리고 피난길에 오를 때, 그는 근왕병을 모집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함경도로 떠난다. 물론 왕자인 순화군을 비롯하여 김귀영(金貴榮), 윤탁연(尹卓然) 등의 무리를 이끈 대규모 집단이었다. 피난길을 겸하고 있어서 이들 일행에는 가족들이 함께 했으며, 임해군도 부인과 6살난 딸, 그리고 4살난 상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행이 회령에 이르렀을 때 국경인(鞠景人) 등의 모반자들에게 체포되어, 그해 7월 23일, 그곳까지 밀고 들어온 왜군대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겨진다. 포로의 몸으로 고원에 유폐되었다가, 이듬해(1593) 2월 4일, 나베시마(鍋島直茂)에게 맡겨진 다음 일본군과 함께 남하를 시작하여 4월에 부산에 이른다. 이 사이에 강화교섭이 빈번하게 열렸고, 드디어 6월 2일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방면되어 조선군에 인계된다.     
 그런데 일본이 제시한 강화조건을 보면 왕실관계자가 두 왕자만이 아니었음이 나타난다. 7개항의 조건 중에, 「5.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할 것, 6. 생포한 두 왕자 및 관리를 조선에 돌려보낼 것」이라 하였다. 생포한 두 왕자가 임해군 등이라면, 저들이 요구한 왕자의 인질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임해군의 아들이 왕자이므로 일본에서는 이를 인질로 삼았고, 조선왕실에서는 세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묵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만약 이러한 상상이 가능한 것이라면, 이후 왜장 가토가 임해군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띄었을 때, 국정을 염탐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임해군이 이상행동을 하게 된 연유를 말해주는 것이 된다. 「너희들을 꼭 데리러 오마」라고 다짐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는 어린 남매를 임해군은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토의 손에 붙들린 혈육의 생사를 걱정하는 어버이의 정은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당시 사람들에게 오히려 질시의 대상으로 확대 재생산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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