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 철을 넘기고 올해 처음 띄워 보는 한글 문서 창이다.

 생각도 못하고 놀다가 부랴부랴 막판에 쫓겨 쓰는 리포트와 씨름할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인연이 없는 사이다.

 다만 틈틈이 읽어낸 책으로 A4 한 장 남짓 될까 말까한 분량의 원고를 써내려가는 덕분에 이 소원한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막막한 여백의 종이 앞에서 피도 살도 못되는 말들을 뽑아 올리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철모르는 코흘리개 시절에나 한 두 번씩 반강제로 읽고 써낸 일기나 독서 감상문 따위에 비할 바 아닌 고통이 뒤따른다. 깜빡깜빡 졸면서 강의노트를 필기하는 능숙함이 알게 모르게 몸에 숙달된 대학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요즈음 시대에서는 책이나 영화 또는 인터넷 등의 어떤 매체를 통하여 접하는 관점이나 생각은 모두 적극적이고 즉발적인 참여와 차이를 엿보인다. 사고와 가치판단의 다원화나 상대주의도 물론 좋은 얘기이자 사회생활의 밑거름이 분명 될만한 것이다.

 더욱이 때가 때인지라 필자뿐만 아니라 무심결에라도 얇은 귓가에 솔깃한 어학연수니 취업이니 하는 냉정한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뭐, 오해하지 말고 현대생활백수나 팔자에도 없을 니트족도 못될 바엔 착실하게 사는 것도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짧거나 긴 생각의 낙서를 늘여놓은 이 ‘포스트 잇’은 만만치 않은 시선의 포착과 함께 우리가 일상의 풍경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물과 사건에 하드보일드(hardboiled)한 딴죽을 적절하게 건다.

 포스트 잇, 공부한 티 좀 내려고나 간단한 메모 용도로 세절지에서부터 차압딱지 크기까지 알록달록 다종·다양·다색한 묶음들. 참고사항이 될 것도 아니지만 김영하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다(하물며 소설은 더더욱).

 3M사의 발명 동기처럼 우연에 의한 대박을 기대하자는 것도 아니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고 불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살아가는 전쟁도 경각에 달려있는 판국인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밑에는 월세도 못 받아먹는 괴물이 산다.

 정작 작자는 포스트 잇에 해당하는 소제목에서 ‘아무 흔적없이 떨어졌다 별 저항없이 다시 붙는, 포스트잇 같은 관계들. 여태 이루지 못한, 내 은밀한 유토피아이즘’이라는 목소리로 그리 두껍지도 않은 이 산문집의 세계를 전부 말해버린다.

 그때그때 깔짝깔짝 써놓고 금세 잊고 마는 복잡하지도 구질구질하지도 않은 관계. 쿨하기는 하겠지. 영화 메멘토의 단기기억상실증환자처럼 몸에 한국적 여백의 미를 어기면서 문신을 새기지 않아도 되니까. 전화 다이얼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는 묘한 중독성을 남기는 가운데 이 산문집과 어울리는 음악 추천! ‘Cake의 Never there’ 필자 역시 언제 어디가 꼭 아니라도 사라지지 않으리란 사랑을 믿는 척 하기는 하지만.
천 명 구 (인문학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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