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도덕법칙의 수립자로서 만 자율적 주체이며,
   그러한 자율성 위에서만 인격체가 되어 비로소 존엄성을 가질 수 있다

 

 

▲ 백종현(대학교수) 저 철학과현실사 2007.03.10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 이 물음은 응당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불러온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답이 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산다. 인간은 동물이되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다. 인간의 이 이중성이 인간 삶의 씨줄과 날줄이며, 인간은 동물성과 이성성의 직물(織物)이다.
   무릇 '동물성(animalitas)'은 무엇인가? 동물성은 기본적으로는 생명성을 지칭한다. 그러나 생명성이 한낱 생장력 있음을 넘어 '감각하고 지각할 수 있음'(anima sensitiva)으로 이해됨(『孟子』, 告子章句 上3: "生指人物之所以知覺運動者而言" 참조)과 동시에, '생명'이 '욕구능력의 법칙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으로 규정되고, 욕구능력이 '자기의 표상들을 통해 이 표상들의 현실성의 원인이 되는 그런 것의 능력'(Kant)으로 정의된다면, 생명체란 자기 욕구 실현을 위해 능동적으로 운동하는 생물, 즉 동물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물 가운데는 말(logos)하고 셈(ratio)할 줄 아는 것과 그리 할 줄 모르는 것이 있으니, 전자를 인간이라고, 후자를 '여타 동물들' 또는 '비이성적 동물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은 감각하고 지각할 줄 알며, 자기 욕구 실현을 위해 능동적으로 활동한다는 유적(동물적) 성질에 더하여, 말을 할 줄 알고, 셈을 할 줄 안다(anima rationalis)는 종적(인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시한다. 인간의 여타 동물과의 이러한 차이[種差]를 두고서, '짐승 동물(animal brutum)'과 '이성 동물(animal rationale)'의 구별이 생겼다.
   한국어 '이성(理性)'은 본디 '성정을 다스림', '정념의 통제'를 뜻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리스어 '로고스(logos)'의 번역어이기도 하다. 로고스, 말하기(道)에서 누가 말하는지에 따라 무엇이 이성인지가 드러난다. 그에 따라 대별하면 이성 개념에는 세 부류가 있다.
   첫째, 사물(res)·존재자(ens)·자연(natura)이 시원(arche)/원리(principum)로서 말한다는 자연주의,
   둘째, 자연 너머의 어떤 것, 가령 신(deus)이 주재자로서 말한다는 초자연주의,
   셋째, 인간 자신이 주체로서 말한다는 인간(중심)주의.

   자연주의나 초자연주의는 결국 '인간 위에 이성'을 놓는 것으로서, 그를 일컬어 '우주 세계의 질서'라 하니, '도(道)', '이(理)', '성(性)', '천(天)', '자연(natura)' 등을 말하는 고대 중국의 유가 사상, 고대 로마의 스토아 사상 등은 자연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예컨대 "하늘이 지정한 바가 본성이니, 본성을 따름을 일러 도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中庸』) 또는 "자연에 맞게 살라(naturae convenienter vive)"(Cicero, Tusculanae disputationes, V. 82)라는 가르침은 그런 주의주장이라 하겠다. 그 반면에 '성령(聖靈)'을 말하는 기독교 사상은 일종의 초자연주의라 할 것이다.
   "태초에 말씀[道·理性]이 있었다. 말씀은 하느님[神]께 있었으며, 말씀이 하느님이었다. […] 만물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며, 말씀 없이는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에 있어서 말씀 가운데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인간의 빛이었다. […] 그것은 이 세상에 온 모든 인간을 비추는 참다운 빛이었다"(『성서』, 요한복음, I, 1-9)
   이런 관점에서 인간이 이성적으로 산다 함은 곧 하늘/자연의 이치에 맞게 산다거나 신의 교시에 부합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대해 이른바 '근대인'들은 세상 이치의 원천인 이성이란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은 그런 이성을 갖춰 갖고 있다고 본다.
   "이성 혹은 양식(良識)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고 우리를 짐승과 구별되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므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Descartes, Discours de la Methode, I, 2)
   그러나 인간이 말하기의 주체임을 받아들이고 나면, 인간의 이중성의 우위 다툼이 전면에 부상한다. 곧 인간에서는 이성성뿐만 아니라 동물성 그리고 그 동물성에 비롯하는 정념/욕구도 발언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야흐로 '이성'의 위상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 이성은 '정념의 통제자'인가, '정념의 종복'인가 하는 쟁론이 일어난다.
   이른바 '이성주의자'들은 '이성'(raison)은 지혜(Sagesse)이고, "지혜는 정념들의 지배자(maistre)가 되어 이것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줌으로써, 정념들이 야기하는 해악들을 능히 견뎌낼 수 있고, 오히려 그로부터 기쁨조차 이끌어낼 수 있다"(Descartes, Les Passions de l'ame, art. CCXII)고 보는 반면, '감각경험주의자'들은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오로지 노예여야 하며, 정념에 종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직분도 결코 가질 수 없다"(Hume, Treatise, II, 3, 3[p.415])고 본다. 감각주의자들이 볼 때 이성은 감성적 욕구 실현의 꾀를 내는 것이 그 직분이다.
   이른바 '도구적 이성'이 이성의 참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이 한낱 욕구 실현의 도구로 쓰일 때 "이성은 모든 자발성과 생산성,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내용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연(實演)하는 힘을 상실하며, 곧 바로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한다"(Horkheimer, Eclipse of Reason(1947), New York: The Continuum, 1996, p. 55)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성은 법칙수립자이며, 이성은 인과율과 같은 자연법칙의 수립자로서, 인간이 세운 일정한 법칙 아래서만 자연은 비로소 인간에게 파악될수 있으며, 또한 인간은 도덕법칙의 수립자로서만 자율적 주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자율성 위에서만 인격체가 되어 비로소 존엄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수단인 것은 항상 무엇을 위해서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상대적이고 비교적이 되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가격을 갖게 된다. 어떤 것이 일단 가격을 갖게 되면 그것은 교환이 가능하게 되거니와,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것, 교환할 수 있는 것을 일컬어 '물건'이라 칭한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인데 그 '이성'이 수단인 것이라면, 인간은 그 '이성'의 역량 정도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고, 그러고 나면 그 가격에 따라 시장에서 거래가 되고, 결국 일종의 '물건'이 된다.
   이에 대응하여 '법치수립적[입법적] 이성'론자는 인간이 결코 물건으로 전락할 수 없는 인격체, 즉 자율적 주체이며, 오직 그런 한에서만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 즉 목적적 존재자이고, 다시금 오직 그런 한에서만 존엄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현대의 물리적 자연과학은 인간이 자율적 존재자라는 것에 강한 회의를 제기하고, 이른바 '현대 문명사회'에서 주체적 이성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가치는 전도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따르는 공리주의는 '이익=즐거움=행복=선'이라는 등식을 주장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 아래에 두어왔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지시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고통과 쾌락일 뿐이다. […] 공리성의 원리는 이와 같은 종속을 승인한다"(Bentham,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I, I)

"공리성 또는 최대 행복의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받아들이는 신조는, 행위들은 행복을 증진시키는 정도에 비례하여 옳으며 행복의 반대를 산출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그르다고 주장한다. 행복이란 쾌락을, 그리고 고통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며, 불행이란 고통을, 그리고 쾌락의 결여를 의미한다"(J. S. Mill, Utilitarianism, ch. 2)
   만약 공리주의가 세상의 근본 이치가 된다면, 감성적 욕구 충족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선한 것이고 장애가 되는 것은 악한 것이다. 이런 가치관 아래서는 '무분별한' 욕구 충족이란 없겠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것이 제아무리 욕구 충족에 효과적인 것이라도 그것이 악한 것이면 취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곧 이익 되는 것이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다.
   다시 물어보자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통칭 '이성적 동물'인 사람은 '동물'로 살면서 '이성적 존재자'로 산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생장 생식 능력이 있으며, 이동 능력이 있고, 감각지각과 욕구 능력이 있는 것은 뭇 동물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리분별력이 있고, 가치판단능력이 있어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지향할 줄 아는 것은 이성(理性, logos, ratio)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적 경향성에 의해 자주 도덕법칙에 어긋나게 행동하도록 촉발되지만, 자유의 힘에 의해 이러한 경향성을 멀리하거나 물리칠 수 있다. 그러한 행위가 인격체인 인간의 의무이다.
   인간이 의무를 갖는다는 것은 동물적 자연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약 순전히 신성한 존재자라면 도덕법칙을 위반할 아무런 충동도 갖지 않을 터이고, 따라서 아무런 강요도 받지 않을 터이니 의무도 없을 것이고, 오로지 이성에 의해 인지된 행위의 객관적 필연성에 의해서만 이끌어질 것이다. 반대로 인간이 오로지 동물적 자연본성만 가지고 있다면, 아무런 자기 강제를 하지 않을 터이니 역시 어떤 의무의 감정도 없을 것이다. 의무는 불완전한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로서 '존엄성의 이념'을 갖는 데서 기인한다.
 

  백종현 교수(서울대 철학과)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석사 과정 후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하대 교수 · 한국철학회『철학』편집인·한국칸트학회 회장·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 『존재와 진리·칸트 <순수이성비판>의 근본 문제』, 『서양근대철학』,『철학의 개념과 주요 문제』,『시대와의 대화 : 칸트와 헤겔의 철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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