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라는 제목으로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와 2012년 1학기부터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광고는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한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효율적이고 극적으로 드러낸다. 시대 분위기를 선도하기도 한다. 십수 년 전의 '부자 되세요'라는 카드 광고가 그랬고, 암반층에서 뽑아낸 암반수로 만든 맥주 광고가 그랬다. 요즘 자주 보이는 남성 화장품 광고는 남성들의 용모꾸미기 세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이 광고는 무엇을 반영, 혹은 선도하는 것일까.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일도 맥락을 떠나 존재하지 않고, 어떤 진실도 맥락 없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은, 어떤 문맥에서 발화된 것인지를 고려할 때 옳게 파악될 수 있다. 가령 "내 딸을 구해 온다면 나라의 절반을 자네에게 주겠네"라고 어떤 왕이 말할 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주절은 "내 딸을 구해온다면"이라는 조건절에 제한적으로 걸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물론 이 광고 속 남자의 말 - "안하고 싶다" -도 맥락 속에서 나온 것이다. 계산대에 앉은 여자가 속사포처럼 빠르게 묻는다. "마일리지 있으세요? 포인트 카드 있으세요? 할인 되는 카드 있으세요?" 남자의 말은 이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시류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부정
 좀 과한 반응처럼 여겨질 수 있는 이 남자의 말에서 일종의 저항의지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말의 내용과 함께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말의 내용보다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 더 많이 더 분명하게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광고 속 남자의 표정은 단호하고 격렬하다. 무슨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처럼 엄숙하기까지 하다. 
 왜 하는지 자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 하도록 종용하고, 과도하게 소비하게 하는, 그것을 발전과 행복의 표징으로 광고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으로 읽을 수 없을까. 물론 이 광고가 촉진하는 것 또한 왜 하는지 자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 하도록 종요하는 이 시스템의 역설적인 전략이라는 걸 놓치면 안 되겠지만, 거기서 얻을 교훈이 있다는 것 또한 역설이다. 
 너무 복잡해진 스마트폰과 어플리케이션을 생각해 보라. 유용한 것이 없지 않지만, 꼭 필요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것들도 많다. 어떤 것들은 그런 것이 생긴 다음에야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꾸로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상품이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없던 '필요'가 그 상품이나 프로그램을 소비시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격이다. 필요가 발명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투명사회』와『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은 자기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하는 신자유주의의 착취 방법에 대해 말한다. 착취당한다는 의식 없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자신을 착취한다는 것. 밤새워 인터넷게임을 하고, 미래에 대한 단순한 불안감 때문에 꼭 필요한지도 알 수 없는 자격증을 여러 개 따러 다닌다.      
 물론 '하면 된다'는 식의 긍정과 적극성의 사고방식이 발전과 진보의 원동력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까지 인류를 끌고 온 것이 그런 가치들이었다. 미래를 위한 마땅한 준비까지 부정해선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발전과 진보에 한계점은 없는 것일까, 물어야 할 시점이다. 인류는 더 발전하고 진보할 것이다. 들고 다니는 전화기에 불과했던 핸드폰-스마트폰은 어떻게 진화할지 모른다. 인류는 인간 복제도 해낼 것이다. 더 엄청난 것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온실 가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지구의 시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발전과 진보의 부작용이다. 핵개발의 위험은 어떤가. 편리와 발전을 앞세운 인간의 탐욕이 초래할 파멸과 종말에 대한 각 분야의 예고와 경고가 그냥 해보는 소리일 리 없다.
 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계속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그만 하자고, 핵개발도, 인간복제도 하지 말자고, 인류가 선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것이 불가능한 희망이라는 걸 나는 안다. 인간의 욕망이란 게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을 용기 
 쓰이고자 하는 것이 힘의 속성이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사용하지 않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예수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신약성경은 공생애 초기에 그가 겪은 광야 시험에 대해 말한다. 유혹자는 40일 굶주린 광야의 예수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다. 이 유혹은 보통 사람에게는 유혹이 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은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유혹이 예수에게 유혹이 된 것은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돌을 떡으로 바꿀 능력이 있었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 
 사랑이 진짜 힘이고 능력인 것은, 사랑이 자기가 가진 힘을 자발적으로 쓰지 않기로 하고, 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소박한 윤리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물론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기는 어렵다. 힘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의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이 광고 속의 남자가 '격렬하게 안 하고 싶다'는 이상한 문장을 사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문장은 모순이다. 상식적으로 '격렬하게' 안 할 수는 없다. '격렬하게'는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안 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아니다. 하기 위해서는 격렬함이 필요할 수 있지만 안 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이 모순의 문장은 우리에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린다. 안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암시한다. 안 하려면 '격렬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친다. 
 특히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시스템화되고 거리가 좁혀지고 투명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을 안 하기가 어렵다. 이 시대는 하라고 하고 더 하라고 한다. 가만히 있으면 이 시대의 과도한 '함'의 물결에 휩쓸려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치 런닝 머신 위에 올라 있는 것과 같다. 런닝 머신 위에 올라선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없다. 시대의 흐름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렵다. 욕망에 저항하는 것은 어렵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단호함이 필요하다는 것, 격렬이 요구된다는 것이 이 문장의 핵심일 것이다. 
 
 단식 광대의 단식
 카프카의 단편 「단식 광대」에는 밥을 굶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 사람이 나온다. 그는 서커스단의 일원이다. 서커스단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매우 역동적으로 '하는' 것을 보여준다. 구경꾼들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매우 역동적으로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보려고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불을 지나가든가 공중에서 그네를 타든가 접시를 돌리는 사람들. 그런데 그 모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단식 광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그는 왜 밥을 먹는 일을 하지 않는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단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 왜냐하면 내 입에 맞는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야." 
 자본주의가 차려준 맛있고 풍성하고 화려한 식탁 앞에서 매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현대인은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식당은 끊임없이 새롭고 근사한 음식들을 내놓는다. 다 맛보기 전에 새로운 요리가 식탁에 오른다. 물릴 틈을 주지 않는다. 
 지본주의 사회는 수시로 신상품을 내놓고 소비를 부추기고 욕망을 개발하고 필요를 창출한다. 더 하라고 하고, 더 가지라고 하고, 더 즐기라고 하고 더 출세하라고 한다. 더 하는 것을, 더 가진 것을, 더 즐기는 것을, 더 출세하는 것을 보여주라고 한다. 옷으로, 몸으로, 자동차로, SNS로 전시하라고 부추긴다. 현대인이 있는 모든 곳이, 심지어 가상공간까지를 포함해서, '하는 것을 보여주는' 서커스장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하기도 한다. 예컨대 블로그에 글을 게시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행을 가거나 어떤 음식을 먹기도 한다. 이 유혹, 더 하고, 더 하는 것을 보여주라는 이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가. 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거부하기 위해 격렬함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광고 문장의 메시지일 것이다.
 
 한 사람이 한 오멜 - 만나 거두는 법
 할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을 앞에서 했다. 선행이나 기부와 같은 거창한 무언가를 '하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되지 못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헤매고 다닐 때 하늘에서 내려와 먹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호와는 아침 일찍 나가서 한 사람이 한 오멜(약 2리터)씩 거두라고 했다. 그런데 부지런하거나 욕심이 있거나 걱정이 많은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일찍 나가 한 오멜보다 더 거뒀다. 다음 날을 위해 남겨두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고,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다." 다음 날을 위해 남겨둔 것은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신적 통치라는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하던 시대에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런 평등,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똑같아지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신기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무한 경쟁, 욕망이 무한대로 증폭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그런 신적 통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시스템을 국가나 시장이나 경제 제도에 기대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욕망을 극한대로 끌어올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오히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간극이 넓어지고 신분과 계층이 굳어지는 식으로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나치게 하려고 하고 만족을 모르고 너무 살려고 하는 이 과도한 '함'의 시대 기류를 거슬러 나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아주 소박한 윤리의 기초다. 그러나 이 소박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격렬함'이 필요하다. 
이승우 교수(조선대 문예창작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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