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라는 제목으로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와 2012년 1학기부터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물'은 '살아 있다'는 것과 '물체(또는 물질)'의 복합어이며 물체 중에서도 살아 있는 물체를 생물이라고 부른다. 실제 우리 주위의 대부분은 살아 있지 않다. 교과서에서는 생물을 정의하기 어려워 대신 생물의 특성을 나열하며 실제로 세계 유명 사전들에서 소개하는 생명의 정의는 일반적인 순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날마다 생명을 말하면서 그저 백인백색의 주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관념으로서의 생명에 천착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질이 살아 있음을 얻게 될까? 실제로 우리는 어머니의 태 안에서부터 시작해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먹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거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표현들이 있지만 그중 백미는 "나 밥 안 먹어!"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 뭔가를 조르다 튀어 나오는, 누구에게나 한두 번쯤 있었던 경험이리라. 다 큰 정치인들조차 종종 들고 나오는 단식은 왜 최후의 압력수단으로 쓰이는 것일까? 
 
살아 있음의 과학적 정의
 열역학 제1법칙은, 주어진 계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며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되거나 또 모양이 변환될 수도 있지만 창조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과 연결된 제2법칙에서는 운동 에너지가 위치 에너지로, 위치 에너지가 다시 빛 에너지로, 빛 에너지가 전기 에너지 등등으로 이전되거나 변환될 때 유용한 에너지를 조금씩 잃게 되며 이처럼 쓸모없게 된 에너지는 계 전체를 어지럽히는 데 기여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잘 조직되고 질서를 가진 모습에서 점차 무질서한 모습으로 흩어진다는 것이다. 엔트로피, 즉 무질서도의 증가이다. 당신은 그 그림이 흩어지는데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으며 뭔가 놀라운 일을 하지 않는 이상 그 그림이 원래대로 회복되는 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을 우리는 "자연스럽다"라고 말하며 엔트로피의 증가는 곧 자연의 이치라는 의미이다. 
 우리들의 몸에 붙어 있는 손을 보자. 우리는 자신의 그 손이 내일 아침에도, 그리고 1년 뒤에도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의 몸에 붙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언젠가 먹는 행위를 중단하는 순간부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손은 산산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모든 세포들과 세포를 구성하는 질료들은 원자라고 하는 최소 단위의 재료들이 체계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우리는 이렇게 구성된 것들이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존재, 즉 한시적으로나마 음의 엔트로피를 갖는 물체이다. 그렇다면 왜 어떤 것들은 흐트러지고 어떤 것들은 흐트러지지 않는지, 또 흐트러지지 않는 우리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더해진 것일까? 
 비밀은, 물질이 질서를 만나면 의미가 되는 현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상품에 찍힌 바코드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가느다란 막대와 굵은 막대를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바코드는 나름의 메시지, 즉 의미를 띄게 되지만 하나하나 따로 분리된 상태로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어떤 모양의 물체일 뿐이다. 곧 물체가 순서를 부여받는 순간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1과 0 역시 단순한 수학의 기호이지만 우리는 이들의 배열로 의미를 만들어내며 놀라운 디지털의 세계를 펼쳐낸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정보의 개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발생 중이거나 이미 발생했던 각각의 상황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기호들의 연속된 배열이다. 즉, 물체를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은 의미라는 몸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표현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그런 질서에 의한 의미를 갖는 물체이며 그 의미를 재생산(reproduction)하여 영속을 추구하는 물체를 말한다.
 우리의 세포들이 갖고 있는 유전정보는 네 개의 기호(AGTC)를 사용하는데, 기호의 가짓수가 늘면 다루는 차원도 매우 높아지지만 기본 개념은 동일하다. 이 네 기호들을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가 생성되고 이는 다시 단백질에 투사되어 시공간의 차원에서 '일'을 수행한다. 사실 단백질들은 유전정보의 화신이며 대리자들인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우리는 유전정보를 실어 나르는 그릇이다"라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는 '정보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우리가 곧 정보라는 점에 주목하자. 정보는 특정한 배열을 통해 생성되는데 그 배열의 주체가 다름 아닌 물체이니 정보와 그릇이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말하는 유전자란 곧 의미를 갖는 기호의 배열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 배열의 질서도 결국 '일'에 의한 개입이 없다면 곧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일 = 힘 × 거리'로 정의된다. 흐트러진 물질 더미가 다시 정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하며 무질서한 것들이 질서 있게 변하는 것을 엔트로피가 감소했다고 말한다.  1944년『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이란 에너지의 투입을 통해 음의 엔트로피를 구현하는 존재라고 말한 에르빈 슈뢰딩거의 정의는 살아 있음의 물리학적 속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먹는 밥(음식)은 우리가 음의 엔트로피를 유지하는데 투입하는 에너지의 한 형태이며 음식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과학적 결론이 도출된다. 자연스러움에 배치되는 현상이 기적이라고 정의될 때 우리의 살아 있음이야말로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의 주체일진대  살아 있음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희귀하고 또 오묘하다. 
 
나는 왜 네가 아닌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은 생명의 존귀함을 설파하는 의미로 하늘과 땅 사이에 내가 얼마나 존귀하고 유일하며 완전하고 무결한 존재인지를 뜻한다고 들었다. 한편, 흔히 하는 말 중에 "짚신도 다 짝이 있다"는 표현이 있다. 사람들이 짝을 찾는 기준에는 상대방의 직업, 능력, 비전, 집안, 외모, 그리고 신뢰도까지 다양한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인지가 담겨 있고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아래 감정적으로까지 충분히 사랑할 만한 상대방을 찾아간다고 스스로 믿는다. 
 집쥐들도 사람과 같이 성선택을 하는데 암컷이 훨씬 까다롭게 짝을 찾는다는 연구보고가 있다. 인간들이 그렇듯이 수컷은 외양에 큰 비중을 두지만 암컷 쥐는 그보다 훨씬 신중하게 두 가지 조건을 살핀다고 한다. 우선 조건은 '먹을 것을 잘 물어올 수 있는가'하는 점이지만 또 다른 주요 조건은 냄새로 가늠한다. 즉 수컷 쥐 소변의 냄새가 자신과 다른지를 확인하는 이 기준은 냄새를 만들어내는 물질이 특별한 유전자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미국 대도시의 백인 부부들과 나이지리아 원주민 부부들의 유전적 연관성을 분석한 한층 정교한 연구에서도 누군가가 특별히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짝을 찾을 때 특정 유전적 배경이 자신과 다른 짝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이 유전적 배경의 핵심은 MHC(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주조직적합성복합체)이며 이들이 만드는 단백질은 질병에 대한 면역기능에 관련된 것으로서 각각의 음식종류에 따라 디자인된 여러 모양의 접시와도 같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약 100조 개의 세포들은 살아 있는 동안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서로가 같은 편임을 확인하고 증명해야 하며 이는 다세포 생명체의 숙명이다. 한 사람의 몸을 만들고 있는 모든 세포들은 세포 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종류의 단백질을 대상으로 자기(self) 것인지 혹은 자기 것이 아닌지(non-self)를 확인하는데 이 일에 매우 중요한 일을 맡은 단백질이 MHC 유전자가 만드는 단백질이다. 
 만약에 자신의 세포에서 만들어진 단백질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확인되면 우리 몸의 면역세포들이 그 세포를 죽여 버리고 장기이식의 거부반응 이 현상에서 비롯된다. 만약 짝이 되어 서로의 유전자를 섞어 만든 새 MHC를 아기에게 물려주게 될 두 사람이 똑같거나 비슷한 접시 세트(MHC)를 가지고 있다면 그 위에 올라가는 조각들도 비슷한 종류로 제한될 수밖에 없고, 그 경우 낯선 병원체가 아이의 몸에 침입했을 때 면역체계가 찾아내어 물리칠 가능성도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결국, 이러한 커플이 낳은 아이는 질병에 걸릴 위험이 훨씬 높아져 생존이 어려워진다는 뜻이며 오늘날 치타가 멸종위기에 놓인 이유도 MHC의 다양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과 얼마나 다를까? 사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고 성체가 되는 과정도 놀랍지만 정자든 난자든 생식세포가 생성되는 과정에서는 그동안 한 세포에 같이 있던 부모의 염색체(2n)들이 헤어지게(n) 된다. 생식세포, 즉 배우자가 되기까지 수십 번 이상의 세포분열과 감수분열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전적 변이와 재조합 그리고 서로 다른 이성 간의 무작위한 만남의 가능성을 수리적으로 정리한 각 사람의 유전적 고유성은 1/10422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이 지구에 사람이 태어난 숫자를 모두 합해도 1500억, 즉 1× 1011~12 정도에 불과하니 우주의 시작부터 멸망까지 보더라도 각 사람은 오직 한 번만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놀라운 고유함이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형이하학적' 속성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많은 젊은이들이 때론 성적이 안 나와서, 좋은 대학에 못 가서, 취업에 실패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 빚이 많아서 식음을 전폐하거나 죽음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내팽개쳐버리기에 우리는 너무도 고귀한 존재이며 어쩌면 붓다가 설파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바로 이 뜻일지도 모른다. 생물의 종들도 다양하지만 한 종 안의 개체들도 놀랍도록 서로 다르며 이 다양성을 잃으면 그 종은 멸종한다. 수많은 자연 조건이 주어졌을 때 모두 다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가 죽을 때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지만 아무리 변화무쌍한 자연 조건이 주어져도 서로 다르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 다양성의 핵심이며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인간
 우리 모두 이렇듯 다르다면 인간은 본질 자체가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나칠까? 사실 민주주의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데 그 기반을 두며 우리의 다양함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지향성으로 연결된다. 구성원 각자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인류가 이 험한 생존의 투쟁을 견뎌온 전략은 공동체의 삶이었다. 그렇다면 인류의 이성은 우리의 이기적인 속성을 잘 다스리고 있을까?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가게 되면 부모들은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 싸우지 마라. 친구가 잘못을 해도 웬만하면 용서해라"라고 가르친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가능하면 아량을 베풀도록 교육받아왔다.  
 인간은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에 죄수 둘만이 아니라 여기에 이리저리 관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내가 도와줄게. 걱정하지 마" 하는 무조건적 협력자가 있는가 하면, 항상 누군가를 배신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무조건적 배반자도 있다. 또 누군가를 도와주되 상대방을 보고 도와주거나 배신하는 사람, 즉 선택적 협력자나 선택적 배반자, 때로는 상대방이 배신을 해도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는 관용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도덕주의자, 공정한 강자, 분별 있는 이타주의자도 있다. 선택적 배반이든 무조건적 배반이든 배반으로 잠시 잠깐의 이익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공동체에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 대상을 결정하는 핵심 잣대는 '평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평가 본능'은 우리 몸에 잠재되어 있다. 600만 년 동안 침팬지와는 다른 길을 택해 인간의 삶을 이어 오며 사회적 동물로서 누군가와 항상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려면 이 '평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했기 때문이리라. 즉, 궁극적인 이기를 완성하는 전략은 다름 아닌 이타인 셈이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또 무엇일까? 육체와 정신은 따로 분리 가능하지 않은 하나의 몸이며 살아 있다는 것은 질서를 통해 의미를 지니는 본질, 즉 생명의 속성이다. 태초부터 종말까지 '나'의 정체성은 이 우주에 단 한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진정 유아독존의 존재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이기적 본질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진화적 성공은 이타에 의존한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다면 이웃을 도울 때만이 그 진정한 이기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지없이 놀라운, 우리는 모두 이미 기적의 존재가 아닌가! 
 정용석 교수(경희대 생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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