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세대'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이는 연애·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뜻인데, 취업이 안 되니 결혼을 할 수 없고, 결혼을 할 수 없으니 아이도 낳을 수 없다는 뜻이다. '오포세대'는 여기에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 포기를 더한다. 'N포 세대'는 포기할 것이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보다 심각한 유행어가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그것이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에 따라 자녀의 인생(계급)이 결정된다는 의미인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자신들을 분류한다.
   <한겨레>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성인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3명 중 2명(61.6%)이 한국 사회를 '부모의 지위에 따라 자녀의 계층 상승 기회가 닫혀 있는 폐쇄적 사회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특히 20대와 30대에서는 그 비율이 75%나 됐다. 이어 자녀가 성공하는데 '부모의 경제적 지위'와 '개인의 노력' 중 어느 것이 더 영향을 끼치는지를 묻는 질문에도 '부모의 경제적 지위'라는 답변(54.9%)이 '개인의 노력'(44%)보다 우세했다. 25세∼29세에서는 그 비율이 71.9%나 됐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나라. 요샛말로 '헬조선'이다. '헬조선'은 말 그대로 '지옥(hell) 같은 한국'으로, "아무리 해봐야 이 땅에선 안 돼"라며 절망한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에 붙인 이름이다. 여기에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은 끝까지 흙수저 인생을 살 뿐이란 자조가 담겨 있다. 헬조선에서는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면 빨갱이나 패배자가 되고 젊은이들이 아프면 청춘이 된다. 또한 이곳에서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 부리지 말고 '열쩡'과 '노오력'으로 모든 사회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이번 중간고사 기간에 우연히 '고려대학교 대나무숲'(페이스북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흙수저 일기를 보게 됐다. 이 글은 네티즌 사이에서 큰 공감을 얻으며 1만 3천 700개가 넘는 '좋아요'를 받고 1천 100회 이상 공유됐다. 글을 쓴 학생은 '흙수저'가 싫다고 했다. '부모님이 흙수저라는 말을 알게 되면 본인이 자식에게 흙수저를 준 건 아닌지 생각할까 봐'서다. 그는 '나에게 해준 게 없다'는 엄마, 아빠에게 '내가 깊게 뿌리 내리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좋은 흙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적었다.
   기자 역시 금수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생활을 접하게 되면 부러운 감정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쩔 것인가. 나는 현실을 살아야지 누구를 원망해야 하나. 부모님이 능력껏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어쩔 수 없이 자식을 고생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도 가슴 아픈 건 나의 몫이 아니라 부모님의 몫일 것이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내 자식이 힘겹게 사는 걸 봐야 한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는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불공평한 사회 풍토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모님을 원망한다거나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말해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흙수저'라는 생각은 가지지 말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바꿀 방법을 찾는 걸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올여름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영화 흥행 순위 3위에 오른 영화 '베테랑'은 금수저보다도 한 수 위인 '다이아몬드 수저' 조태오의 악행을 흙수저인 형사 서도철이 응징하는 내용이다. 극 중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서도철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조건을 알고 있다.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일이 뭔지 잘 알고 있다. 어느 기자의 말처럼 연립주택에 살면서 집 화장실에 비데가 없는 게 '조건'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운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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