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보도되는 총리의 3.1절 골프파동을 접하다보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온갖 정치적 사건이 권력의 이름으로 태연히 자행된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로서는 ‘이 일로 총리가 사퇴하다니, 이러저러해도 우리나라 수준이 나아지기는 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확한 내막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권력·경제력·인맥을 이용해 이득얻는 방법을 잘 터득할수록 성공확률이 높아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물론 어느 시대/사회에든 있는 일이지만, 개인의 능력이나 객관적 공정성보다 ‘혈연·지연·학연’이 앞서는 우리사회에서는 ‘맥’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이 도가 지나치다. 이에 대한 부끄러움도, 그리고 이웃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과 불이익에 대한 책임의식도 찾아보기 힘들다. ‘내편’에 이득이면, 그것도 ‘능력’이 된다.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 1791-1824)가 그린 <메두사의 뗏목>(1818-19)은 ‘인맥과 권력에 결탁하여 얻은 부당한 이득’이 낳은 처참한 비극을 고발한 작품이다. 프랑스 배, 메두사호는 1816년 7월 승객 400명가량을 싣고 프랑스령 식민지, 세네갈로 항해하던 중 파선했다.

 난파요인은 능력과 자격이 없음에도 왕실과의 인맥 덕분에 메두사호의 지휘를 맡은 선장에게 있었다. 파선 직후 선장과 귀족, 장교들은 구호선들을 차지했고 남은 150여명 승객들은 메두사호의 목재로 급조한 뗏목에 올라탔지만, 이들을 밧줄로 끌고 가기로 했던 구호선들은 도망가고 말았다.

 악천후와 병마 속에서 죽은 동료들의 시신으로 허기를 채우며 13일 동안 표류하다가 구조되었을 때, 생존자는 15명에 불과했고, 그 중 5명도 곧 사망하고 말았다.

 생존자 2명이 이 사건을 기록·출판하여 세상에 알리자 권력층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20대의 제리코는 생존자를 만나 직접 이 사건을 취재하고, 가로 7m, 세로 5m의 큰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목수를 고용해 모형 뗏목을 만들고, 부패한 시신들을 찾아 관찰하고, 처형당한 죄수들의 머리와 정신 수용소에 갇힌 병자들의 표정을 스케치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는 미술작품이 ‘예술을 위한 예술’로써가 아니라 주로 정칟경제·종교적 지도층의 주문으로 제작되던 시대였다. 제리코가 주문받지 않았고 팔릴 가능성도 없는 대작을 제작한 것은 매우 용감한 일이었다. 

 그가 포착해낸 장면은 화면 앞 부분에 시신을 붙들고 있는 남자와 무엇을 먹는 남자 등, 카니발리즘이 연상되는 현장과, 화면 뒷부분에 멀리 구조선을 보고 일부가 환호하며 흰 천을 흔드는 희망의 순간이다.

 이는 제리코가 목격한 프랑스의 당시 정칟사회적 상황, 곧 편재했던 혼란과 잔혹성과 죽음 가운데서도 희망을 갖는 사람들의 삶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온갖 형태로 일어날 수 있는 ‘가진 자의 이기적 욕망’, ‘권력과 인맥으로 얻은 부적절한 이득’이 예상치 못하게 낳은 무서운 한 결과를 고발한 이 작품은 1819년 살롱전에서 파리시민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비평계에서는 상반된 평가가 엇갈렸다.

 권력층의 환심을 사기 원했던 대다수 프랑스 비평가들은 정치적 판단에 따라, 제리코가 이 사건을 지나치게 낭만적/영웅적으로 묘사했다고 비난했고, 이 작품은 1820년 영국에서 전시되어서야 호평을 받게 되었다.

 정치적 계산에 따르는 이러한 비평의 반응 역시 인간사회의 풍토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니, 미술은 이래저래 정치와 떼어낼 수 없는 관계라고 하겠다.
 조 은 영 (순수미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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