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생애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6가의 전형적인 중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서울의 부유한 중인계급 출신이라는 점은 식민지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넓은 의미의 비극적 세계관의 담지자로 운명 짓게 된다. 돌아갈 과거와 전통은 사라져 없거나 부정하고 눈앞의 현재와 나아갈 미래는 자기의 것이 아닌 비극적 상황은 그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는 몰락해가는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병약하고 예민한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이른바 명문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 일본유학까지 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연극에 몰두하였다. 해방과 함께 그는 박인환 등 모더니스트들과 어울리면서 한편으로는 임화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로의 경사를 보이게 된다. 
 전쟁 동안 의용군에 지원했던 김수영은 1951년 1월 경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1952년 12월 석방된다. 이 의용군 체험과 수용소 체험은 심약한 김수영의 혼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이런 지독한 체험은 그의 좌에서 우로 걸친 복잡한 열등감을 씻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시는 시대와의 숨 가쁜 대결을 그 중심과제로 삼게 되었으며 실존적 비애, 비극적 자기고양, 현실과의 속도경쟁, 죽음을 담보로 한 초월의지, 생활과 일상성의 발견, 현대성의 추구 등 그의 시세계의 핵심을 이루는 문제들에 깊이 파고들게 된다.
 4·19와 함께 60년대를 맞은 그는 자신의 시와 세계인식의 근본적 변화를 꾀했다. 그는 민주당정권과 미국, 소련에 대한 공격은 물론 북한과 남한의 비교 등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산문적인 시들을 써냈고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뒤이어 일어난 5.16 쿠데타는 이러한 그의 정신적 고양감을 좌절시킨다. 군사정권의 서슬은 심약한 그가 추구하던 '혁명'을 직접적 실천이 아닌 문학과 문화의 영역에 가두어 놓았다. 그는 현실의 혁명을 시의 혁명으로 대체하였고 시를 쓰는 자기 자신의 나태한 의식을 비판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언어와 사유에 대한 학대와 고문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다른 시인들과 작가들의 의식의 개변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1968년 들어 그는 그의 일생 중 최대의 논쟁이었던 이어령과의 '불온논쟁'을 벌였고(4월), 그 특유의 '온몸 시학'을 역설한「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하의 문학강연을 하였으며(4월), 최후의 시「풀」을 썼다. 그리고 그해 6월 15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는 거의 죽음에 이르러 마치 유언을 남기듯 격렬한 논쟁과 시론, 그리고 아름다운 묵시록적 시 한 편을 남긴 것이다. 그의 삶과 시는 수락할 수 없는 것들을 수락하고 살아야 하는 근대적 존재조건과 그의 결벽하고 섬세한 영혼이 일으킨 불화의 산물이었다. 그는 세계와 화해하는 대신 비타협적으로 불화 그 자체를 살아냈다.  
 
   김수영의 시와 사상
 그의 시가 본격적으로 시대와의  대결에 나서는 것은 전쟁 이후의 일이다. 처음 그것은 전쟁 이후의 단절과 상실감에서 출발하지만 조만간 비극적 자기고양을 통해 시대와의 속도경쟁을 위한 내적 동력을 마련하게 된다.
 「달나라의 장난」에서 그는 처음 비애(설움)를 말하는데 그 비애는 생활의 비애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생활의 비애를 이기는 정신의 힘을 지켜나가야 하는 자의 운명적 비애이다. 그리고 그 비애는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운동적인 것이다. 이 움직이는 비애의 정서를 통해 시인은 일상적 삶으로부터 자기 갱신의 삶으로 비극적인 도약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그의 '비애의 전략'이다. 
 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의 시에서는 비애가 점차 사라지고 훨씬 절박한 속도와 그에 비례한 절제와 계산이 자리 잡는다.(「폭포」, 1957) 이것은 그가 현실을 이기는 속도에 가속도를 주면서도 이제는 그 속도를 제어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넓어진 시야에 담겨진 것이 바로 '현대'이다. '현대'란 곧 과거 인류사의 누적이며 이 '현대'와 속도를 맞추거나 이를 이기기 위해서는 죽음과 시간조차 극복하는 막대한 노력이 요구된다. 무언가 창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현대'를 추수해서는 부족하며 그것을 타고 이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단순한 반근대주의를 넘어서는 창조적인 야심이다. 
 이러한 야심은 시와 예술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시로써 주어진 시대를 극복한다는 것은 시 자체가 지금까지 축적된 시간 모두를, 현존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바뀌어진 지평선」, 1956) 세상의 허위와 경박함과 너절함을 통과하지 않은 예술가의 '순수한' 양심만으로는 도저히 세상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는 비극적 딜레마에 빠지지 않고도 자신의 존재기반인 일상세계를 넘어서는 현대적 전망을 가지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며 허무주의자 박일영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생활세계의 적극적 수용은 나아가 동시대인들과의 '공동의 운명'을 생각하고(「광야」, 1957), 이웃사람들, 즉 민중을 '어제와 함께 내일을 사는' '강력한 사람들'로 인식하고(「예지」, 1957), 마침내 자유를 이행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질타하는 정치적 수준의 인식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에 4·19가 먼저 도착한 것이기도 했다. (「사령」, 1959)
 혁명은 김수영을 또 한 번 바꾸었다. 50년대 말까지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생활과 시의 모순, 세상의 허위와 예술가의 양심 사이의 모순을 이기고 이제 막 자기가 발 딛고 선 구체적 현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그에게 4·19는 하나의 혁명적 충격이었다. 그것은 그가 추구한 '현대'가 멀리 떨어진 세계적인 것, 문명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눈앞 이 후진국 남한 땅에서 작열하고 있음을 보여준 극적인 사건이었다. 
 혁명 이후 그의 시는 두 개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나는 혁명을 거의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육법전서와 혁명」,「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가다오 나가다오」) 또 하나의 방향은 혁명적 앙양과 그 좌절이 시인 자신에게 주는 의미의 시적 수용이다.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푸른 하늘을」)는 강인한 고독은 창조의 원동력이고 혁명이란 위대한 창조적 추진력의 복본이므로 혁명은 고독해야 마땅하다는 삼단논법에 의해 설명된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혁명은 정치·경제·사회적 프로그램이나 그 실천주체의 문제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것, 즉 어떤 정신적 치열성의 역사적 총화인 것이다. 이러한 근원적이고 순수한 치열함으로서의 자유와 고독은 김수영이 이미 50년대 내내 추구해 온 현실극복의 논리와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50년대에는 자기 혼자만의 윤리였던 것이 이제 만인의 윤리로 즉 혁명의 윤리로 새 이름을 얻었다는 점이며 이 점이 바로 50년대와 60년대의 김수영 사이의 차이이다.  
 그러나 1961년의 군사쿠데타는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1961년 5월부터 1968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엄숙하고 진지한 정도를 걷지 못하고 '풍자와 해탈'이라는 뒤틀린 길로 가야 했다. 이 풍자와 해탈의 선택은 1960년대 내내 그를 지배했던 절망과 자기소외, 자폐적 도피 등 고통스런 상태를 견디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풍자는 이같이 억압적인 세계에서 최소한의 자기근거를 마련하려는 고육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계에 대해 우위를 갖지 못한 시정신은 그 풍자의 방향을 외부로 돌리지 못하고 공격적 자기풍자에 머무르게 하였다.(「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 1965)
 이러한 풍자의 소모성에 대한 반성은 그로 하여금 해탈의 방법을 선택하게 했다. 해탈은 두 방향으로 시도된다. 하나는 '역사내적 해탈'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민족적 전통의 발견(「巨大한 뿌리」, 1964), '사랑'에 대한 메시아적 의미부여(「사랑의 變奏曲」, 1967) 등으로 나타났으며, 또 하나는 초역사적인 '시적 해탈'인데 여기엔 현실의 훼손된 삶과 의식을 건강하고 화해로운 미적 구조물로서의 시의 창조를 통해 구원하고자 하는 그의 마지막 시적 노력이 담겨있다. 그것은 삶과 세계에 대한 온갖 집착이 말끔히 사라진 순수한 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다. 그 결정물이 바로 그의 유작시「풀」(1968)이었다.
 
  김수영의 현재적 의의
 김수영은 생애에 걸쳐 근대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한 시인이지만 근대, 혹은 근대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나 비판능력을 갖추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 부족함을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김수영식의 무지와 무모함을 대신할 무엇을 지니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김수영의 무지와 무모함을 마음 놓고 비판해도 좋을 만큼 더 성취한 무엇이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분명히 포스트 김수영시대를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그가 극복하지 못했던 주관주의를 우리는 극복해왔으며 우리는 다만 우리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낙관과 비관이라는 주관적 문제가 아니라 더 진전된 과학을 요구하는 객관적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결정적인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바로 더 이상 무엇으로도 환원 불가능한 주체의 문제이다. 그의 후배 세대인 우리는 그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에서 이념적으로건 현실적으로건 그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에도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온몸으로 동력을 만들어야 했고 그 동력으로 자신의 온몸을 밀고나아가야 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다시 60년대의 김수영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의존할만한 이념도,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동력도 시나브로 소진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 역시 어떻게든 혼자의 힘으로 일단 자신을 추스르고 세계를 다시 일으켜야 하는 고독한 주체들이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김수영을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는 온몸으로 온몸을 밀며 피투성이가 되어 시대를 뚫고 오는 저 정신의 위대함, 취할 순간조차 없이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 정신의 속도로서 김수영을 만나게 된다.  우리 역시 그 무서운 고독과 비애를 통과하는 강인한 주체의식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감히 무엇을 성취했노라고, 혹은 성취하겠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김명인(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저자 소개>
 인하대학교 국문학 박사
 민족문학사학회 이사
 <주요 저서>
 『내면 산책자의 시간』,『자명한 것들과 결별』,『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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