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신문이 발행되고 나면, 나는 이미 투표를 마친 상태일 것이다. 4ㆍ13 총선을 앞두고 상당히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주민등록증을 처음 발급받았던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로 돌아간 듯하다. 그 당시 나는 주민등록증에 적힌 내 인적사항을 반복해서 읽으며, 드디어 시민으로 인정받은 것 같다고 느꼈다. 그때로부터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제 단순한 시민이 아닌 '민주시민'으로서 첫걸음을 딛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화 끈을 묶어야 한다. 그 일환으로 내가 민주시민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준 4ㆍ19 혁명을 훑어보고자 한다.
  4ㆍ19 혁명은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항쟁을 일컫는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헌법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 1ㆍ2ㆍ3대 대통령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개정된 헌법 내용을 간단히 언급하자면, 대통령 간선제 폐지와 사사오입개헌안 통과를 들 수 있다. 대통령 간선제는 1952년에 직선제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국회 내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파악한 이승만의 전략이다. 사사오입개헌안이란, 초대 대통령에 대한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다. 이 역시 종신 집권을 도모하려고 했던 이승만의 술수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독재성은 부정선거로까지 이어졌다. 1960년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에서는 유권자에게 막걸리나 고무신을 사주고 자신의 정당인 자유당을 찍게 했으며, 투표소에 들어갈 때는 3명이나 9명을 한 조로 묶어 서로 감시할 것을
종용했다. 투표를 하러 오지 못한 사람의 투표용지에는 임의로 도장을 찍어 투표함에 넣기도 했으며, 개표장에서 이동하는 도중에 투표함을 바꿔치기도 했다. 그 결과 자유당의 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각각 88.7%와 79%의 득표율로 정ㆍ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던가. 그해 3월 15일에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데모에 참여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준열 군이 마산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으며, 4월 18일에는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후 귀교하다가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 한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뒤이어 19일에는 약 십만 명의 대학생이 대대적인 데모를 감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군대를 동원해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발사하고, 무차별적으로 실탄 사격을 가했다. 4월 19일 하루 동안 서울에서만 100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했으며 6천26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시위는 더 많은 시민에게로 뻗어갔다. 4월 25일에는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과 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이승만은 하야했다. 무너진 독재정권 위에 피어난 민주주의의 꽃. 이 꽃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빨간색이지 않을까 싶다.
  몇 주 전 나는 친구에게 무릇 대학생이라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가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취업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들었다. 그 말은 내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고, 내가 원대신문에 <원광리포트-20대에게 '정치'를 묻다>라는 기획을 쓰는 계기가 됐다. 기획 진행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대다수의 학우들이 정치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척 다행이고, 우리대학 학우들의 생각이 늘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동화 끈을 꼼꼼하게 다 묶었으니, 이제 몸을 일으킬 차례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과 함께 걷고 싶다. 어렵고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투표소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는 것, 단지 그 정도이다. 이 땅 위에서 민주주의의 꽃이 다시는 짓밟히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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