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라는 제목으로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와 2012년 1학기부터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40여 명의 건축과 학생들과 함께 농촌지역 소외계층의 열악한 주택을 고쳐주기 위해 농촌 오지 마을로 재능기부 활동을 떠난다. 작업 기간은 대략 12일 전후이며 기간 내에는 마을회관이나 경로당 등에서 전원 합숙을 하며, 대상 가옥에 대한 작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숙식도 해결해야 한다.
   매일의 생활을 보면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오전, 오후로 나누어 작업을 실시하고, 밤 10시에는 전원 취침하게 된다. 고강도의 육체적 작업이 계속되므로 기상시간을 좀 늦출 수도 있겠으나 농촌지역 특성상 마을 주민들은 일출과 동시에 활동을 시작하며 저녁때에는 일찍 취침하기 때문에 그 점을 고려하여 학생들 역시 주민들과 같은 생활 리듬을 갖도록 기상과 취침 시간을 정하였다.
   마을 어르신들께서는 일찍 작업을 시작하시는데 젊은이들이 날이 밝을 때까지 취침하고 있는 모습은 보기 좋은 상태가 아닐 것이다. 또한, 밤늦은 취침은 인근 주민의 수면에 장애가 될 것이 틀림없기에 취침시간과 기상시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오히려 식사를 담당하는 취사조는 30분 정도 일찍 기상하여 이침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고 있다.
   작업 기간 중 개인별 작업 참여 현황을 표시한 출석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흥미로운 몇 가지 사실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작업 지역은 장수로 기억되는데, 여름방학 때에는 여수에서 꼬막 양식업을 하는 부모님을 도와야 했던 김재식이란 학생은 작업이 끝난 후 야간에 자신의 승용차를 이용하여 여수에 가서 급한 작업을 하고 점심 무렵에 다시 작업 현장으로 돌아오는 강행군을 며칠간 계속했다. 그렇게 부모님의 일과 봉사활동 작업을 병행하면서도 결국 김 군은 모든 작업을 완수했다. 기간 내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고, 오가느라 소비된 경비도 상당했을 텐데도 오히려 밤에 자리를 비우는 것을 동료들에게 미안해했던 것을 보면, 그들이 활동에 쏟아부은 정열이 대단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김 군은 졸업 후에도 수년간 사업하는 틈틈이 우리 작업 현장에 후배들을 위해 먹거리를 자동차에 가득 싣고 찾아오곤 했었다.
   또한 해외 연수가 확정된 학생들도 출국하기 전날까지 봉사활동에 참여한 후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닌 채 해외연수를 떠났던 학생들도 몇 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한 학생은 작업 중 전기톱에 의해 제법 중한 부상을 입었는데도 며칠간의 입원 치료 후 깁스를 한 채 부모님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사들고 마을에 찾아왔던 기억도 새롭다.
   우리들의 작업 장소는 오지 마을을 중심으로 선택되기 때문에 마을회관에 에어컨이 없음은 물론이고, 마을회관 내 공용화장실이 재래식으로 되어있는 곳도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의 경우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일부 남학생의 경우에도 이용에 많은 거부감을 보였는데,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 화장실 사용을 거부한 채 음식 섭취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할 수 없이 주변 보건소의 수세식 화장실로 승용차를 이용하여 수시로 이송했던 기억도 난다.
   최근에는 마을회관 내에 에어컨 설치가 일반화되어있고, 마을 이장님도 에어컨을 사용하라 하지만 우리들이 에어컨을 밤낮으로 사용할 경우 작업 기간 내 전기 사용량이 지역주민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어 사용을 금지하였다. 젊은 우리들이 편안함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악조건 내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인내심을 보여주기 위해 금지한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취지를 학생들이 잘 이해해주어서 이제까지 한 번도 숙소 내에서 에어컨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우리 학생들의 봉사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계속되는 작업 기간 동안 마을 내 어르신들께서는 손자들의 땀 내음이 못내 안쓰러웠는지 무언가를 주시려고 애쓰시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러한 일이 어려운 형편의 어르신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학생들에게 신세 지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미리 삶아 놓은 감자나 새벽 작업을 나가시면서 냉장고에 미리 타놓은 미숫가루 같은 것까지 뿌리치기는 어려워 끝끝내 사양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작업 기간 중 학생들이 아침에 맛있는 반찬이라도 나오면 우리 할머니 드린다고 조금씩 담아 가는 모습이나 작업이 끝나고 헤어질 때쯤에는 못내 아쉬워 서로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러한 것들은 강의실에서는 결코 배울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정겨운 인간적인 교감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택이란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오랜 기간 생활해온 기존 주택에 순응된 생활 내용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주거환경의 개선에는 많은 비용과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므로 이에 대한 욕구를 포기한 채 불편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경우가 보인다.
   그러나 열악한 상태로 방치된 주거환경의 획기적인 개선이 그들의 삶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사례 1
 
 높은 기단 위의 낡은 주택은 예전에는 마을 내 부농의 주택임을 암시하고 있었는데, 허리가 심하게 휜 상태의 80대 할머니께서 지팡이에 의지해 어렵게 기단을 오르내리시고 있었다.
 독거노인이 기거하고 계신 주택 내부를 들여다보니 기단의 계단은 매우 가파른 상태였고, 부엌은 흙바닥에 재래식 부뚜막이 있는 옛 전통방식 그대로였다. 화장실도 본채에서 멀리 떨어진 재래식 화장실로 꽤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할머니 집을 좀 고쳐드리겠다는 나의 제안에 할머니는 한참을 쳐다보시더니 일언지하에 나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교수님 이 더위에 학생들과 괜한 고생하지 마시고 그냥 돌아가세요. 난 여태까지 이렇게 큰 불편 없이 살아왔고 또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랍니다." 조금도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할머니에게 저나 학생들이 경험도 많고 집도 제법 잘 고치는 실력을 지녔으니 꼭 좀 고치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을 드렸다. 망설이시던 할머니께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교수님이 정 그러시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허나 내가 쓰고 있는 안방은 들여다보지도 말고 손도 대지 마세요"라며 시큰둥하게 허락을 하셨다.
 제법 넓은 면적을 가진 재래식 부엌의 주요 구조체만을 조심스레 보존하면서 모두 뜯어내고 그 자리에 수세식 화장실, 소규모 창고 그리고 입식 부엌을 근사하게 만들어 나갔다. 부엌 입식 작업대의 높이는 허리가 심하게 휘어진 할머니의 키에는 적절하지 않아 작업대 앞 부분 바닥에 시멘트 블록으로 한 단을 높여 작업이 용이하도록 배려해 드렸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마을을 철수한 후 2~3일이 지난 다음 할머니 상태가 궁금하여 할머니를 찾아뵙고, 작업대를 잘 사용하고 계신지 또는 문제점은 없는지 여쭈어 보았더니 할머니께서는 어렵게 얘기를 꺼내셨다. 죄송하지만 부엌 작업대 앞에 설치된 시멘트 블록을 제거해주면 안 되냐는 것이었다. 블록을 제거했을 경우 작업대 사용이 매우 불편하기 때문에 제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그 이유를 물어봤다. 할머니께서는 새로 만들어진 부엌이 너무 좋아서 평생 사용하시던 안방에서 벗어나 부엌에서 주무신다고 하시며, 바닥에 있는 블록 때문에 공간이 좀 좁아 이불을 펴는데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랬다! 새로운 주거공간은 할머니의 그동안 관습화된 삶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블록의 위치를 최대한 조절하여 문제점을 해결해 드린 후 돌아오면서 너무나 큰 감흥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할머니의 만족해하시던 얼굴 표정에서 그동안 지속되었던 일상적인 할머니의 삶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찾아올지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더위 속에서의 노력은 그 할머니 한 분에게서 얻어낸 즐거움에 비하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 할머니가 지금도 건강하게 부엌에서 잘 주무시고 계시길 간절히 기원해본다.
 
 
  사례 2
 
 한 여름낮 오지 마을을 가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가시고 마을은 텅 비어 적막하기조차 한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간 한 산속 오지 마을엔 또래의 조그만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놀고 있었다. 마을 어디에 어린이집이라도 있는지 했지만 모두가 한 가정의 형제자매라 했다. 어린이가 귀한 농촌에서 한 집에만 아이들이 4~5명이라니 그들의 집에 함께 가보았다. 6살부터 연년생으로 아이들이 5명, 젊은 부부, 그리고 아이들의 할머니가 가족을 이루고 있는 다문화 가정이었다.
 주택 내부를 들여다보니 부모와 아이들은 단칸방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창문도 없어 빛도 들지 않는 창고와 같은 부속사에서 기거하고 계셨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 예상되었지만 다행히 어설프게나마 수세식 화장실이 확보되어 있다는 점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기존 주택의 잉여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최대한 증축하여 안방, 어린이들 방 2개(남자아이들 방과 여자아이들 방으로 구분), 입식부엌을 겸한 TV를 볼 수 있는 소규모 거실을 확보하였고, 화장실은 독립성이 확보되도록 개선하였다.
 할머니 방에는 외부 벽체 단열과 가능한 넓은 창을 확보함으로써 추위나 더위로부터 실내를 보호하고, 옹색하나마 햇빛이라도 들어오고 바람이 통하는 방으로 개조하였다. 작업이 끝난 후 젊은 남편에게 이제 집도 새롭게 고쳤으니 부인과 싸우지 말고 아이들을 낳아준 고마운 부인에게 잘해주라고 신신당부를 한 후 헤어졌다.
 1년이 경과한 후 우연히 그 집에 들를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 그 집 남편이 나에게 한 말은 아직도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열 살짜리 장남을 옆에 부르더니 "교수님 제가 지금 교수님께 신세 갚기는 어렵지만 이놈이 크면 꼭 교수님께 신세 갚으라고 할 겁니다."
 순간 한대 크게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의 노력에 비해 엄청나게 큰 보람을 그 말 한마디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나한테 신세 진 거 없습니다. 열심히 행복하게 오랫동안 오래 잘 사시면서 아이들 잘 키우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후 언론에서 성공적 사례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 있어 그 집을 추천해 준 적이 있었는데 다녀온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교수님 그 집에 늦둥이가 생겨서 이젠 애들이 6명이 됐더군요!" 나에게는 적어도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소식임이 틀림없다.
 
 이제 봉사와 나눔의 정신은 결코 여유 있는 소수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활의 일부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갈 젊은 엘리트들에게 있어 학창시절의 봉사와 나눔 정신의 소중한 실천은 훗날 큰 결실로 되돌아올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조그만 능력과 내가 지니고 있는 시간의 일부를 쪼개어 그것을 꼭 필요로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는 그 누구에게 전해주었을 때, 그것을 받는 이들의 즐거움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이제까지 감히 생각지 못 했던 희열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윤충열 교수(건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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