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이제하의 소설  『유자약전』의 한 구절이 기억난다. 화가인 유자가 “왜 그림을 그리느냐”는 질문에 한참 생각하다가, ‘30년 후쯤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대목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갗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예술작품이 보다 나은 인간이 되도록 우리를 도와서, 스스로와 이웃과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마음이 아직 젊은이들에게 미술작품이 후에 ‘히틀러’가 되지 않고 ‘마하트마 간디’가 되도록 기여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스페인 출신의 대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그린 <게르니카 Guernica>(1937)는 인간의 권력욕이 낳은 잔혹한 학살을 고발하고, 시대와 문화권을 초월해 반전(反戰) 메시지를 역설하는 작품이다.

  92세의 생애동안 어쩌면 가장 많은 작품(약 8만점?)을 남긴 가장 부유한 미술가, 그것도 ‘공산주의(그는 62세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억만장자’로 일컬어지는 피카소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이다.

 메마른 가지 끝에서 예쁜 잎과 꽃이 돋아나는 4월이 되면 <게르니카>가 특히 생각나는 것은, 이 그림이 1937년 4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에서 일어난 잔혹한 학살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해 4월 27일,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은 스페인 내전당시 반대파인 공화파를 지지한 게르니카를 독일공군을 동원하여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제2차 대전을 준비하던 히틀러의 독일군은 43대의 최신 전투기의 성능을 시험할 겸, 3시간이 넘게 게르니카를 공격했다.

 3일 동안 불에 탄 게르니카는 70퍼센트가 파괴되고 노인과 어린아이를 포함해 1천6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프랑코측은 이 사건을 공화파의 정치적 자작극이라고 역공격했으나, 세계 곳곳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졌고, 1900년경부터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활동하던 피카소는 격분하여 이 만행을 그 해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될 대형 벽화의 주제로 그린다.

 프랑스 신문의 글과 사진들을 토대로 하고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형상들과 스페인의 상징들을 입체주의(cubism)적으로 표현하여 완성한 가로 7.8m, 세로 3.5m의 이 대작은, 밝은 색채를 위주로 한 당시 피카소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신문사진들처럼 흑색과 흰색의 무채색을 기조로 하여, 비장감을 더해준다.

 이 작품의 도상에 대해서는 갖가지 해석이 있어서 짧은 지면에서 논할 수 없지만, 오른쪽 끝의 젊은 여인은 불이 붙어서 울부짖고 있고 그 왼쪽의 인물은 서양미술사에서 흔히 ‘진리의 상짱으로 등장하는 등불, 횃불을 든 여인이거나, 어둠가운데서 빛을 찾고자하는 공포에 찬 인간의 모습일 수 있다.

 그 옆의 가슴에 칼이 박혀 고통에 찬 말은 무참하게 희생된 선량한 동물과 인간들의 상징인 듯 하다. 맨 왼편에 있는 소의 머리는 피카소가 수십 점의 그림에서 주제로 삼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인 미노또르(Minotaur)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인간 안에 내재하는 인간적인 측면과 짐승적인 본능의 갈등으로 많은 비극을 야기하는 존재이다.

 ‘전쟁과 폭력을 고발하는 20세기 묵시록’으로 찬사받는 <게르니카>는 이 작품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잊혀졌을 무참한 학살을 오늘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이러한 사건의 재발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조 은 영 (순수미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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