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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시대를 앞서간 비판적 지성, 김만중의 『서포만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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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24  14:5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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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라는 제목으로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와 2012년 1학기부터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 서포 김만중의 초상(1637 - 1692)

김만중에 대한 소개 

 김만중(1637-1692)은 광산김씨 명문거족으로 사계 김장생이 그의 증조할아버지이다. 김장생(1548-1631)은 율곡 이이의 제자요 우암 송시열의 스승이었으니 실로 조선조 예학파 유학의 거두라고 할 수 있다. 김만중의 할아버지 김반(1580-1640)은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버지 김익겸(1614-1636)은 성균관 생원으로서 병자호란 때 순절했는데, 그때 김만중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고, 그의 형 만기는 바야흐로 다섯 살이었다. 후에 형 김만기의 딸이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가 되었다.
 병자호란 중에 유복자로 태어나 외가에서 자라며, 어머니 윤씨 부인과 형 김만기를 스승으로 하여 교육을 받았고, 평소 효심이 지극했다. 현종 6년에 등과하여 10년간은 정언, 부수찬 등 비교적 순탄한 벼슬길을 거쳤으나, 서인과 남인이 갈등하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 입장에 서 있던 김만중 역시 자유롭지 못해 1674년 삭탈관직 된다. 1680년 숙종 6년에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되자 김만중도 예조참판, 대사헌, 대제학, 병조판서 등의 정치 요직을 맡게 되었지만, 다시 숙종 13년 장숙의(뒤의 장희빈) 일가에 대해 숙종에게 직간을 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평북 선천으로 유배된다. 그 이듬해 풀려났지만, 다시 숙종 15년 왕자의 명호를 정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는 문제가 화두가 되면서, 이에 반대한 서인들이 몰락하고 찬동한 남인들이 또다시 득세하는 기사환국의 정변이 일어나서 남해 절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러한 중에 어머니 윤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애통해하다가 숙종 18년 어머니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둔다. 저서로는『서포만필』과 국문소설 『구운몽』『사씨남정기』외에『서포집』에 상당 분량의 시문이 전한다.
 
『서포만필』의 내용과 구조
 
 『서포만필』은 지금의 현대적 학문 분야에 따르면 철학이나 역사학, 문학, 과학사 중에 어느 쪽으로 분류되어야 할지 선명하지 않으며, 이들 영역을 종합해 자기 견해를 드러내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글의 유형이 17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문학(文學)이라는 이름하에 통합적으로 기술되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현대적 학문 분야로서 문학의 영역을 논할 때도 협의(시, 소설, 희곡의 세 영역을 문학으로 바라보는 관점)가 아닌 광의의 개념을 적용해 이러한 서적들을 교술 장르에 속하는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보면서 연구하는 경향이 정립되었다.『서포만필』의 이러한 성격에 기초할 때, 이 책은 현재의 학문 구도에서 문·사·철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인문학'적 저서로서 매우 적합한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는 저술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서포만필』은 성현의 경전에서부터 역사, 지리, 외국의 역사, 시문(詩文)에 대한 비평, 시론(時論) 및 해담패설(諧談稗說)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상권은 104항, 하권은 165항으로 경학, 역사, 문학/ 유가, 불가, 도가 등 삼교/ 천문, 지리, 음양, 산수, 율려/ 근대 과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일종의 논문집으로 봐도 좋다.
 
문제의식과 그 정신사적 의미
 
 17세기는 엄격한 성리학(주자학, 혹은 정주학)의 사상체계가 수립되고, 이에 대한 반론을 억압하던 시기였으면서, 동시에 역설적이지만 주자학의 사상 체계가 무너지던 시기였다. 한국사 혹은 한국문학사에서 조선시대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차례 전란을 꼽는 것은 이유가 있다. 성리학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말 신흥사대부에 의해서였고, 그 신흥사대부층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면서 성리학의 이상을 국가 체제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억불숭유정책을 표방하고, 예법 등도 주자가례에 맞게 혁신하고자 했지만,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제도적 관습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후 나라 사정은 급격히 달라졌다. 전쟁으로 인해 흐트러진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강력한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주자학적 세계관이 강력하게 힘을 얻었고, 문중의 수장을 중심으로 한 가문 단위의 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전쟁에 동원된 남성 인구의 급격한 감소에 따라 가부장 중심의 가족 제도가 본격적으로 확립된 것도 이 시기에 나타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두 차례 전란의 결과 외세의 힘에 눈 뜨게 되면서,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성리학에서 눈을 돌려 다양한 학풍의 학문들이 새롭게 혹은 재등장하는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다. 불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시작되고 양명학이 정착하며 실학의 초기 형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주자학 이후의 사상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만중은 숙종 때 정권을 독점한 노론 벌열층의 일원이므로, 당파로 본다면 청나라의 침입에 의해 생긴 위기를 극복하고 인륜의 질서를 재확립하자는 명분을 내세운 송시열의 사상에 동조해야 마땅하다. 송시열의 명분론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고, 화이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김만중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 했고, 우리만의 독자성을 찾고자 했다.
 그는 특히 시문학에 대한 논평에서 객관적 상대주의자(객관적 합리주의자)로서의 본질을 문학에 투영시켜 낭만적 유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드러낸다. 그는 각 시인의 독창적 개성을 인정하고, 시에서 사용되는 시어가 일상 언어와 다른 차원에서 가지는 고유한 가치를 판별해냈다. 그리고 주자가 주장하는 바를 따르면서 당시의 현인군자가 짓는 도덕주의. 효용주의에 입각한 시 창작과 비평 방법에서 탈피하여, 그만의 유미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특히 우리말로 창작된 시가와 소설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잘 드러난다. 김만중은 말이 절주를 가지면 문학이라고 하여, 기존의 사대부들이 가졌던 한문학 중심의 문학관이 아니라 구비문학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문학관을 보여주었고, 민요가 가진 가치를 인정하면서 사대부의 시문학과 비교해서도 충분히 가치를 지닌다고 설파했다. 특히 송강 정철의 가사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국문 문학 작품에 대한 남다른 비평 감각을 보여주었다. 소설의 경우도 한글소설인『구운몽』과『사씨남정기』를 직접 창작함으로써, 한글소설이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여 소설 배격론의 입장에 섰던 대부분의 사대부와는 달리, 한글소설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널리 드러냈다.
 
시사점과 현대에서 바라본 시각
 
 전근대 시기 동양에서 문학의 개념은 상당히 폭이 넓다. 현대적 개념의 문학 외에 역사와 철학이 문학과 섞이면서 문·사·철이 혼융되어 있는 모습으로 전근대시기 문학은 존재한다. 김만중의『서포만필』은 17세기 조선 사회를 관통하는 인문학적 지성의 정신세계를 이러한 융합적 인문학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인문학이 위기라는 명제는 하도 들어 이젠 새로운 느낌조차 없는 선언과 같이 되어버렸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 하는 차원에서 우리 학교 인문대학도 프라임 사업의 일환으로 인문학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문·사·철이 융합되어 인문학 전반에서 당시로서는 새로운 정신적 입지를 보여주고 있는 김만중의『서포만필』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인문학 내에서의 융합이 무엇인지, 인문학 내에서 학문의 경계가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되새길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김만중이 보여준 객관적 상대주의나 낭만적 유미주의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하는 흐름일 것이라 생각한다.
 17세기 임진왜란 후 주자학이 교조화되던 시기에 김만중은 명문가 사대부로서는 드물게 주자학의 절대적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불교와 도교에 학문적 관심을 가졌고, 동시에 중국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에 반기를 들며 우리 민족만의 입지를 강조하는 객관적 상대주의를 주창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적 입장은 언어와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중세에 동아시아에서 보편적 입지를 차지한 중국어(한문)와 한문학의 위상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민족만의 말과 글, 그리고 문학이 지닌 고유적 가치를 강조했다. 이와 동시에 김만중은 인간의 이성적 측면 못지않게 감정의 자유로운 발산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문학이나 노래가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측면을 긍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활용했다. 이러한 낭만적 유미주의자로서의 성향은 그의 비평이나 창작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우리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에 기초해 주변 강대국의 사정을 크게 의식하며 살고 있다. 17세기가 주자학이었다면 지금은 그 위치에 어떤 종교, 어떤 사상이 자리 잡고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김만중이 주창한 객관적 상대주의의 노선은 지금도 정치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분명 유효하고 가치 있는 입장이 분명하다. 또한 그가 취한 낭만적 유미주의의 관점은 어찌 생각하면 인간이 지닌 감정적 측면에 호소하는 듯 보이지만, 인간의 이성과 도덕주의만이 횡행하는 세상을 가정해본다면 그것은 더욱 인간을 억누르는 압제가 될 거라 생각한다. 문학이 지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인간의 의식을 정화시키고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김만중이『서포만필』을 통해 17세기에 표명했던 세계관은 지금에 있어서도 상당히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할 것이다.
박경주 교수(원광대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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