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은 조전 중기 당파 싸움이 극렬하게 진행됐던 인조, 그의 아들 효종 그리고 숙종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관직에 있었으며 노론의 영수이자 보수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학문적으로 주자학의 대가였고, 인격적으로나 자기수양에 있어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고집과 편협한 소신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반대 측 인물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고, 신하인 입장에서 자기를 따르는 유림의 힘을 이용하여 왕을 겁박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당대 소론의 영수였으며 진보파의 대표였던 윤증과 동학사에서 만나 하루 종일 논쟁을 벌였으나 서로의 견해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후에, 절친한 친구이자 동무였던 윤증을 죽이는 우를 범한 송시열은 고매한 성품과 훌륭한 학식을 겸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학과 숭명주의로 뭉쳐진 그의 고집스러운 성격과 지나친 보수적 학풍 때문에 조선역사에서 가장 심한 당파 싸움으로 얼룩진 역사의 주역이 되고 마는 결과를 초래했다.
 송시열은 조선사에서 위기에 속하는 선조 40년(1607)에 완고한 유림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첫 번째 스승인 아버지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가풍의 보수적 기질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송갑조는 능참봉 종9품의 미관말직에 머무르다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쳤다. 송갑조로부터 성리학 즉 율곡의 학문을 배웠으나, 훗날 주자학을 자신의 학문으로 확립한 후 송시열은 이이의 학문을 주자를 통해 해석하였다. 그는 "말씀마다 모두 옳으며 일마다 모두 마땅한 분이 주자이다. 총명과 예지가 있어 모든 면에서 그 이치를 밝힌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못 할 것이다. 주자가 바로 성인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주자가 이미 말하고 행한 것을 곧 따라서 행했지 일찍이 의심한 바가 없다"고 주자에 대해 절대적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의 기둥으로 삼았다.
 송시열의 다음 스승은 송익필과 김장생이다. 김장생은 예학을 처음으로 주장한 선비이다. 율곡의 친구인 송익필은『주자대전』을 모두 외웠다고 알려진 조선예학의 대가였다. 나중에 송시열은 예학을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발전시켰고, 이러한 예학을 너무 중시한 그의 사상은 조선의 당파 싸움에 예송논쟁의 근원이 되어 많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송시열의 사상은 효종의 북벌개획에 소극적으로 임하도록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가 관직 재임기간 30년 동안 실제로 정사를 돌본 기간은 2년이 넘지 않았고, 늘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유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송시열과 그를 따르는 선비들은 당파 싸움을 주도하며 조선 중기 왕권을 약화시켰고, 결국 민생과 국력이 쇠진하게 된 원인도 제공하게 됐다. 송시열 본인은 청빈했으며 고매한 학식과 학자의 기품이 있었으나,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보다는 당파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떠한 상황인가? 작금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주변 강대국과 같은 민족인 북한의 영향력이 조선 시대보다 더 강하게 우리를 옥죄어 오는 느낌이 든다. 경제적인 측면과 국방의 문제 그리고 성장과 나눔의 문제 등에서 우리는 지금 과거 우리 조상들의 과도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큰 손실을 보았던 전철을 밟고 있지 않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차분하게 과거의 역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유병수 교수(바이오나노화학부)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