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라는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와 2012년 1학기부터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왜 다시『위대한 개츠비』(1925)인가
 1920년대 미국의 격변하는 사회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작품인 피츠제럴드의 사실주의 소설『위대한 개츠비』는 시대를 거쳐 현대에 와서도 그 어느 작품보다도 빈번하게 재조명되고 재평가되는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현대 미국 사회가 정치, 경제적 위기와 정체성의 혼란 등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했을 때마다 주요 신문사의 서평에서 다루어지며 영화로도 제작돼 왔다. 이는 미국인들의 정서에 미치는 작품의 커다란 영향력, 즉 국민문학으로서의 위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미국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모습이 작품 속 재즈 시대의 사회 양상과 상당 부분 중첩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 이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던 군사 보복과 살생 등 도덕적, 정치적 혼란과 위기를 겪고 있던 불안정한 미국 사회를 바라보며, 아담 코헨은 뉴욕 타임즈 오피니언 섹션을 통해 피츠제럴드의『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조명했는데, 그는 바로 그러한 미국이 개츠비의 이야기와 그 어느 때보다도 관련된다고 말하며 "우리 자신들이 바로 개츠비다,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개츠비인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지금까지의 비평가들이 파악하듯, 개츠비를 미국인의 전형으로서 본다면, 위대한 개츠비라는 말은 곧 위대한 미국인이라는 의미로 연결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근본적 결함이 있는 당대 사회에서,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개츠비가 어떻게 위대할 수 있을까. 국가적 위기마다 이 작품이 재조명되는 이유가 개츠비가 위대하기 때문이고 그 위대함으로 인해서 미국인들이 희망이나 위안을 얻게 되는 것이라면,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아마도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파악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될 것이다.
 
미국인의 전형으로서 제이 개츠비
 피츠제럴드가 개츠비를 당대 미국의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모습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인물로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중서부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 제임스 갯츠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인 '제이 개츠비'는 그 자체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절대적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정치 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주장하듯, '변화'에 대한 욕망은 미국 국민성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토크빌은 "미국인은 어떠한 것에 잠시도 자신을 얽매이게 하려 하지 않으며 그저 변화하는 것에 익숙해질 뿐이다. 이들은 변화를 필요로 하며 무엇보다 변화를 매우 좋아한다. 변화라는 것이 이들에게는 재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변하기 쉬운) 불안정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분명 변화(change)라는 말은 미국 정치나 문화적 담론에서 엄청난 힘을 갖는다. 실제로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의 대선공약에 사용된 슬로건이 바로 '변화'(change)였는데, 이 말에 희망과 가능성, 치유와 더 나은 미래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는 점을 본다면 미국에서 '변화'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시상적이고 낙관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섭리이든, 진보이든,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한 열망이든, 변화라는 것은 미국인의 사상과 경험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미국인들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는 하나의 미국적 신화인 것이다. '삶이 주는 약속들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과 '희망을 품는 비상한 재능과 낭만적 성향'을 가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는 개츠비는 바로 그러한 미국의 '변화'라는 신화를 반영하는 미국인의 전형인 것이다.
 
시각중심주의 패러다임과 정체성의 재현
 19세기 말, 과학 기술의 발달과 건축양식의 혁신 등으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시각 중심적인 패러다임이 생겨나게 된다. '다시 제시한다(re-presence)'라는 의미의 재현이라는 용어는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눈앞에 존재하지 않거나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하는 실물을 표현/대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의 시각 중심주의적인 패러다임이란 모든 '실제'가 이미지나 '재현된 것' 혹은 '재현물'로 바뀔 수 있게 됐고, 그렇게 재현된 것이 사실상 실제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츠비라는 '인물'(persona)은 자신이 만들어내고 보여주는 다양한 몸짓과 표정, 옷차림새, 화려함과 사치와 같은 외양과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시각 중심 문화 속에서 개츠비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구현하는 시각적인 재현과 시각 이미지가 그 자신의 정체성과 현실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재현하느냐에 따라 개츠비의 정체성이 달라질 수 있고 또 의도하는 정체성에 맞도록 재현을 조절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그러한 재현을 보는 이들이 진실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개츠비의 정체성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가 된다. 이는 개츠비의 정체성이 타자의 시각에 좌우될 수밖에 없으며, 개츠비가 재현하고자 하는 정체성 역시 타자의 욕망을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위태롭고 불안정한 개츠비의 '변화' 혹은 '새로운 정체성'은 '재현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인 동시에 '재현의 무한한 허구성과 비현실성' 혹은 '무효화'라는 딜레마에 놓여 있는 것이다.
 
모방문화와 정통문화
 재현의 가능성, 시각적 재현과 모방을 통한 정체성의 확립을 꿈꾸는 개츠비의 모습은 당대의 사회 문화적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19세기 말 미국은 산업 기술, 제조, 상업의 발달로 인해 진품의 복제품이나 모조품이 대량으로 생산됐고, 상류사회로의 진입을 꿈꾸는 중산층이 상류층이 소비하는 고가의 상품을 복제한 값싼 모조품을 구매해 자신들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상류층과 동일시하려고 했다. 모조품이나 복제품이 진품과 같은 가치를 나타낼 때, 이러한 모방은 진품, 오리지널의 가치와 그 위상을 흔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19세기 말의 이러한 모방과 모조 문화(culture of imitation)는 기존의 사회 계층구조와 질서를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20세기 초반이 되면서 모방 문화가 야기하는 혼란과 무질서에 반하는 정통 문화(culture of authenticity)가 등장한다. 두 문화의 대립은 미국 사회의 계급의 갈등과 정체성 문제로 연결되는데, 이는 모방 문화가 소비와 모방을 통해 계급과 무관하게 일률적인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는 반면, 정통 문화는 모방을 배척하고 재현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불변적 요소를 통해 이미 정해진 계급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 두 문화의 충돌은 이스트 에그와 웨스트 에그로 대별되는 문화적 차이와 사회 계층 간 갈등으로 표출되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시각중심 내러티브와 사실주의의 양가성
 『위대한 개츠비』의 내러티브는 형태와 색, 인상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인식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시각적 초점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인식, 이미지의 확대와 거리감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러티브는 영화나 카메라 기법과 매우 유사하다. 사실 '사진'은 현실 혹은 실제의 복제, 재현의 방법으로 그 어느 기술보다 우위에 있었는데 이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을 그대로 기술하고 자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작품의 시각 중심적 내러티브와 사진 기법은 닉이 경험한 뉴욕에서의 일련의 사건들을 파악할 수 있는, 현대의 복잡한 현상을 사실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가장 신빙성 있는 내러티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개츠비가 자신의 정체성을 재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시각적 이미지와 사진들을 그 목적에 맞게 선택하듯, 닉의 내러티브도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개츠비의 이야기를 선택적으로 재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당대에 유행하던 사진 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회화주의 사진작가들은 자신들의 사진에 예술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는데, 큐비즘이나 인상주의와 같은 미술화법을 모방해 카메라의 거리와 빛의 양을 조절하고 대상을 여러 각도로 조명해 마치 미술작품을 보는 듯한 사진을 내놓았다. 닉의 사진 기법 내러티브는 자신이 경험한 뉴욕과 인물들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과 시각에 따라 그 이미지의 형상을 다르게 선별적으로 재현하고 있는데 이는 회화주의 작가들의 예술 구현과 매우 유사하다. 이는 사진의 리얼리즘에 대한 기존의 신뢰와 상충되며, 이는 작품 자체가 현실에 대한 시각적 재현이 갖는 딜레마를 그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닉 캐러웨이의 문화적 양가성
 닉은 회화주의 사진 기법을 이용해 재현의 가능성을 통해 사회적 계급의 경계를 넘으려는 행위와 도덕성의 부재를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인종이라는 불변의 요소를 부각시키면서 그의 시각적 내러티브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기본적인 예절 감각이란 태어날 때부터 저마다 다르게 분배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닉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계층과 도덕성의 경계 넘기의 중심에 있는 개츠비는 왜 예외가 되는 것일까. 닉은 당대 사회의 물질적 부, 소비와 시각적 재현의 가능성을 통한 정체성의 변화가 가능한 시대라는 것에 환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재현의 가능성이 가지는 계층의 유동성과 사회 질서의 변화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개츠비가 죽은 지 2년 후에야 닉은 개츠비가 "결국 옳았다"라고 말할 수 있고, 내러티브 기법을 통해 개츠비의 가장 미국적인 모습,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부정적 모습을 완화하거나 은폐함으로써 개츠비라는 인물에게서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과 낭만적인 감수성'을 부여한다. 또한 이를 미국 초기의 이주민들이 대지를 바라보며 품었던 순수하고 이상적인 꿈과 일치시키면서, 현실은 비록 결함이 있으나 새로운 세상과 자아로 '변화'해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그에 대한 믿음, 즉 변화의 신화를 구체화된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윤진 교수(고려대 인문학부)
<필자 소개>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뉴욕주립대학교 현대영미소설 전공
(현)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영어영문학과 교수

 

학위 논문「드라이저, 워튼,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작품에 나타난 모던 비젼과 연극성」등 개츠비와 드라이저 관련 논문 꾸준히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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