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책을 읽는다. 책에서는, 노년의 소설가가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젊은 시절의 소설가가 휴양 중이던 유럽 모처의 호텔에서 그 소유주, 무슈 제로를 만나 그가 어떻게 이 호텔을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젊은 제로가 처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부터의 모험이 그려진다…. 층층이 겹쳐진 액자 구성이다. 여기에 더불어서 각 액자 시점마다, 그 시절마다 주로 쓰이던 때의 비율로 영상이 조절된다. 사용된 촬영 기법도 꽤나 낡고 단순하지만, 눈에 잘 감기는 동화적인 색채로 인해 도리어 참신하다는 느낌을 준다. OST 또한 요즘 TV를 틀면 자연히 여러 프로그램에서 반복적으로 듣게 되는 정도. 그만큼 감각적이고, 위트 있다는 칭찬을 주기에 어렵지 않다. 수많은 유명 배우들이 조역, 단역으로 출연하였으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유감없이 빛내고 있을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이러한 요소들은, 단지 작품의 외적인 면에서 미적 감각을 자랑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어느 인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인간상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산물이다.
 젊은 제로의 이야기는, 자신을 관찰자로 하여 호텔의 컨시어지 무슈 구스타프를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구스타프는 꽤나 입체적인 인물인데, 여러 추잡한 면모들 한편으로 직무에 대한 철저함과 숭고함을 지녔으며 무엇보다도 이 사나이는 틀림없는 신사라는 점 때문이다.
 구스타프가 지닌 인간성의 가치는 위기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가볍고 유쾌하게 그려진 영화인만큼 간과하기 쉽지만, 구스타프를 도운 모든 손길들은 어떤 때에도 품위와 재치를 유지하면서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주변에 베풀어온 그의 본성 덕분이라는 것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쟁 난민이자 유색인종이란 이유 때문에 전시 체제의 검문에 제로가 부당한 체포를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구스타프는 방관하지 않고 신념대로 군인들에게 저항했으며, 이는 다시 그가 자신이 예전에 행한 업이 되돌아오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그들을 체포하려던 군인들을 지휘하는 장교가 바로 구스타프가 이전에 살갑게 대해주었던 아이였던 것. "봤지? 도살장처럼 변해버린 이 잔혹한 세상에도 아직 희망이 존재해."
 물론, 결론은 그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 대한 평가도 그가 지나치게 후한 점수를 주었던 것일지 모른다. 나치(가 암시되는) 독일이 유럽을 뒤덮은 시점에서, 다시 제로와 구스타프가 군인들에게 검문을 당하게 된 똑같은 상황에 구스타프의 신념은 도리어 '염병할 곰보 파시스트들'에게 스스로를 처형당하게 만들었으니. 젊은 소설가는, 무슈 제로에게 적자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 호텔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무슈 구스타프를 추억하기 위한 것임을 묻는다. "아닐세, 나는 그가 지켜온 신념과 소명 의식을 같이 하고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지. 이 호텔은 병사한 내 아내와의 추억 때문에 유지하는 거야…. 솔직히, 구스타프가 지켜온 신념이 살아 숨 쉬던 세상은 이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졌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 환상을 훌륭히 지켜내고 있었어."
 서양의 이상향인 그리스 시대, 도가 철학의 이상향인 인위가 없던 시대, <영웅본색>에서 말하는 강호에 의리가 있던 시대…. 그 시대는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없음이 분명하다. 이선희의 노래 <아! 옛날이여>처럼, 모든 좋은 시절은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구스타프는 파시즘의 도래 이후 망명하여 호텔의 로비 보이가 되었어도, 신념을 멋들어지게 지키며 이미 사라진 이상적인 시대의 숭고한 신사로서 살았다. 필요할 때마다 희망을 주워 쓸 수 없는 시대에서, 바로 그 자신이 도살장 같은 시대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어떠한 시대가 된다 할지라도, 그래서 젊지만 가난한 이들이 분명한 미래의 보장이나 실용적인 희망을 구할 수 없는 시대라 할지라도,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있다. 인간성의 고결함과 품위, 재능과 직업의 전문성과 장인의식…. 같은 시공간이라도 '헬조선'을 살고 있는 청춘에게는 구스타프처럼 의지할 수 있고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멘토를 찾는 것이 하나의 희망이다. 최종적으로 자신이 구스타프가 되는 것이야말로 희망이다. 구스타프와 제로의 관계처럼, 어떠한 시대라 할지라도 가치 있는 것을 신념으로 지니고 지키고 전수하는 것이 희망이다. 물론, 부적절한 도착증 따위는 제외하고서 말이다.

 

임정훈(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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