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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오늘 여기, 역경에도 열정과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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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06  18: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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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라는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와 2012년 1학기부터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아침에 일찍 햇볕을 받는 곳은 저녁에 그늘이 먼저 이르고, 일찍 피는 꽃은 지는 것 역시 빠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월은 한시도 멈추어 쉬지 않는다.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자는 마땅히 한때의 재앙에 청운의 뜻을 접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 가슴 속에는 늘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기상이 있어, 하늘과 땅을 조그맣게 보고 우주를 손바닥 안에 둔 것처럼 가볍게 여겨야 옳다." (아들에게)

유배와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이하 <편지>)는 다산 정약용이 쓴 글을 번역한 것이다. 다산은 1762년에 태어나 1836년에 세상을 떴다. 남인계 가계에서 태어나 22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28세부터 관직에 나아갔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생활을 했다. 벼슬에 나아가자 곧 초계문신으로 뽑혔다. 수원화성을 설계하는가 하면 암행어사로 활약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에 경도되었던 적이 있어 정치적으로 공격당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정조가 1800년 갑자기 세상을 뜨자 1801년 천주교도를 박해한 신유옥사가 있었다. 이때 유배를 가서 1818년까지 유배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여 방대한 저서를 지었다.
 다산의 저서와 학문체계는 크게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으로 구분된다. 경학서(經學書)는『주역사전』, 『논어고금주』등 당시 유학의 중요 경전인 6경과 사서에 관해 쓴 저서들이다. 경세서(經世書)는 유명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등 1표2서를 비롯하여 세상을 경영하기 위한 저서들이다. 다산은 전자가 수신(修身)을 위한 것으로 본(本)에 해당하고, 후자가 치인(治人)을 위한 것으로 말(末)에 해당된다고 했다. 그러나 말이라 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말로써 비로소 본이 완성되었다고 했다.

편지
 다산의 경학서와 일표이서는 본격적인 학술서이며, 고전 반열에 드는 대단한 것이다. 이에 비해, 번역한 <편지>는 독자가 한정되어 있고, 내용이 다분히 개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방대한 다산의 저서와 그에 담긴 사상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일반인이나 초학자들이 짧은 글을 통해 다산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어떤 당부나 가르침은 수신자의 구체성이 있기 때문에, 제3자인 독자가 읽을 때 더욱 절실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편지>의 수신자는 두 아들, 둘째형님, 제자들로 나눌 수 있다. 형식을 좀더 구체적으로 나누면 서신(書信) 외에 가계(家誡)와 증언(贈言)이 있다. 두 아들에겐 서신과 가계의 형식, 둘째형님에겐 서신의 형식, 제자들에겐 증언의 형식을 띠고 있다. 가계는 집안사람들이 지켜야 할 가훈이다. 아들에게 타일러 하는 말이나 글이 이에 해당한다. 증언은 드리는 말씀이란 뜻이다.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글이 이에 해당한다.
 <편지>는『여유당전서』문집에서 골라 번역한 것이다. 제1부의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문집 제21권 서(書)에서, 제2부의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은 문집 제18권의 가계(家誡)에서, 제3부의 '둘째형님에게 보낸 편지'는 문집 제20권에 있는 서(書)에서, 제4부의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17권에서 18권에 걸쳐 있는 증언(贈言)에서 뽑아 번역한 것이다.
 <편지>는 수신자와 글의 성격에 따라 네 부로 나누고 있는데, 그 내용은, 첫째 학업 내지 학문에 관한 것, 둘째 일상생활에 관한 것, 셋째 사회와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효제와 수기치인
 <편지>에서 다산 경학의 핵심적 내용을 엿볼 수 있다. 제자 정수칠에게 준 증언에서 볼 수 있다. "공자(孔子)의 도는 효제(孝弟, 孝悌)일 뿐이다. 이것으로 덕을 이루는 것을 일러 인(仁)이라고 하며, 헤아려 인을 구하는 것을 일러 서(恕)라고 한다. … 효(孝)에 바탕을 두면 임금을 섬길 수 있으며, 효를 미루어 나가면 어린이에게 자애로울 수 있으며, 제(悌)에 바탕을 두면 어른을 섬길 수 있다. 공자의 도는 천하의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효성스럽고 공손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고, 어른을 어른답게 대하여 천하가 다스려질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어서 공자의 도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일 따름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기론과 사단칠정론 등의 학문에 치우치는 것에 회의를 표했다. 배우는 것이 학문의 절반이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학문의 절반이라는 것을 고전 구절에서 각각 가져와서, 수기만으로는 절반에 불과하니 부족하고, 마땅히 치인을 위한 경세의 학문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자의 도는 그 용도가 경세다. 무릇 문장과 어구에 구속되고 은일이라 자칭하면서 사공(事功, 실제의 일에서 성과를 거둠)에 힘을 기울이려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공자의 도가 아니다."
 이처럼 다산은 수기에 머물지 않고, 치인으로 나아갈 것을 강조했다. 다산의 학문을 이른바 실학이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다산이 치인을 강조했다 하여 수기의 중요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경학에서 시작하여 경세학으로 나아가길 바랐다. "경전의 뜻이 밝아진 뒤에야 도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도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심술(心術)이 바르게 되고, 심술이 바르게 된 뒤에야 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경학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교조적 도그마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런데 혹 선유(先儒)의 학설에 근거하여 같으면 무리 짓고 다르면 공격하여 감히 의논조차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선유의 학설을 빙자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이지 진심으로 선(善)을 향한 자들이 아니다."

이상을 향해, 그러나 현실에 발을 딛고
   
▲ 하피첩 출처 : 주간조선
 다산은 다산초당에서 가르친 제자들에게 보낸 증언에서 "과거를 합격하여 벼슬에 나아갈 것을 마음에 두고 전력할 것"을 권장했다. 일찍이 그는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절감하고 제도적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했지 않았나? 오학론에서 과거제는 한바탕 광대 쇼에 불과하며, 이를 통과하여 벼슬에 나아간 자가 실무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과거 공부 자체가 재능 있는 젊은이를 획일적인 절구통에 넣어 찧어서 망친다고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현재의 사람 뽑는 제도가 그러하므로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 과거공부 하는 것은 부득이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제자 정수칠에게 준 증언에서는, "시골의 자제가 매우 총명하고 지혜롭거든 과거 공부를 하게 해보고, 그렇지 않거든 일찌감치 학문이나 농사일을 하게 해야 한다. 비록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라도 나이 서른이 넘도록 이룬 게 없다면, 마땅히 학문에 전념케 해야 한다."
 다산은 이상에 치우친 나머지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상에 비추어 현실의 문제점을 고치려 하는 것과 당장 현실의 상황에 적응하는 것은 조화시켜야 할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다산은 선비로서의 먹고사는 실존적 고민에 대해서도 제자들에게 조언했다. 제자 윤종문에게 보낸 증언에는, "가난한 선비가 산업을 경영하려는 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경작은 힘들고 장사는 명예가 실추되니 과수원과 밭을 일구어 희귀한 과일과 맛좋은 채소를 가꾸어 파는 것은 괜찮다고 했다. 전적인 농업은 이익이 박하고, 전적인 상업은 이익추구로 명예롭지 못하니 농사를 하되 시장에 내다 팔 농산물을 재배하라는 충고다.
 제자 윤종억에게 보낸 증언에서도, "늘 빈천(貧賤)하면서도 인의(仁義)를 말하기 좋아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는 사마천의 말을 인용하면서, 선비도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초연할 수 없고, 뭔가 생업활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과수원과 밭을 일구는 것 외에 목축이나 양어도 권장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가들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경시하거나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다산도 이러한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고지식하지 않은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농업을 하되, 시장성 작물을 재배하라고 제안했다. 이는 양반이 모두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데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양반도 무위도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시장이 발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경세론은 많지 않지만, 염(廉)에 관한 이야기와 민사, 공사, 관사 등과 개인적인 일을 구분한 것은 공직자로서의 기본자세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다.

시련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아들에게 준 가계(2부)에서는 다산의 생활철학을 엿볼 수 있다. 제1부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집안 이야기, 독서와 문장, 그리고 저서에 대한 조언 등이 상당 부분이다.
 수신(修身)은 효도와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헛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친구도 효도와 우애가 깊은 사람을 사귀어야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사귀면 낭패를 당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재물을 보관하는 법은 오히려 남에게 주는 것이라 한다. 재물을 잃어버릴 걱정도 없고, 시혜는 물질적으로는 사라지지만 정신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물을 두고 다투는 것이 밤 한 톨로 다투며 울고 웃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도 흥미롭다.
 평생 써도 다 닳지 않을 재산을 물려주겠다면서 두 글자를 주었다. 부지런할 '근(勤)'과 검소할 '검(儉)'이었다. 아무리 많은 재산도 몇 세대를 넘기기 힘들다. 그러나 부지런함은 재산 증식의 자산이요, 검소함은 재산 보관의 비법이었다.
 <편지>에서 우리는 다산이 유배라는 역경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분발하고, 가족을 생각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세상을 걱정하는 선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편지>를 통해서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며, 시련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은 그를 만날 수 있다.
  김태희(다산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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