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17.6.8 목 18:01
원광대신문
기사모아보기   
학술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속 사랑 개념과 우리말에서 길어낸 사랑 개념
원대신문  |  webmaster@wknews.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11.20  17:28:4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라는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와 2012년 1학기부터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태인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나프탈리 프롬은 딸기 와인을 파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유대 신학자가 되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아들을 '탈무드 학자'로 키우고 싶어 했고, 어머니 로자 크라우제는 아들에게 헌신적으로 '자아도취적 사랑'을 쏟았다. 프롬 자신도 청소년기까지는 유대교 랍비가 되고 싶어 했지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학, 정신분석학, 신학 등을 두루 공부하는 가운데 사회사상가 또는 문명비판가로 바뀌었다.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1956년에 나왔다. '사랑'은 분리된 사람 관계를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과 같지만, 그 끈은 때론 썩은 동아줄과 같아서 중간에 끊어지고, 때론 동강이 짧아서 충분히 묶어줄 수가 없으며, 때론 쉽게 풀리는 재질(材質)로 만들어져서 저절로 풀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은 누구나 사랑의 본성을 타고났고, 심지어 사랑은 가르칠 수도 없으며, 사랑은 운명적일 뿐 아니라 그때마다 그 빛깔과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에 사랑의 본질조차도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의 실패를 운이나 인연 또는 궁합 등의 문제로 보려 할 뿐 그 실패가 '사랑의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프롬 또한 사람은 사랑의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고 보았다. 사람은 분명 사랑의 충동을 발산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랑은 단순한 본능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실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프롬에 따르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분리감을 경험하는데, 이 분리감은 모든 인간에 주어진 근본적인 숙명으로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사랑의 기술』, 24) 사람은 그가 실존(實存)하는 한, 달리 말해, 그가 삶을 살아가는 한, 근본적으로 '분리(分離)'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고 소외 상태를 초월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종류의 합일을 추구하려 한다.
 그런데 '실존은 분리이다'라는 프롬의 외침은 우리말 '실존'이 '실제(實際)로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매우 엉뚱한 소리처럼 들린다. 실존은 '엑시스텐츠(Existenz)'의 번역어로서 본디 라틴말 '엑시스테레(exsistere)'로부터 유래됐다. 여기에 붙은 접두사 '엑스(ex-)'는 '밖으로(out)'의 의미를, 동사 '시스테레(siste-re)'는 '서다(to stand)'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본딧말에 따를 때, 실존은 '밖에-섬(to stand outside)' 또는 '나가-섬' 또는 '바깥으로 나가 섬'을 뜻하는 셈이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바깥에 서 있음(실존)'은 '고향(생활세계)에서 내쫓겨져 있음(추방/追放)'이고, 모든 가치와 의미의 근원이었던 '신'에게 버림을 받았음을 뜻한다.
 프롬에 따를 때, 사람은 그가 고향과 타향 또는 안팎으로 나뉜 세계에서 고향 밖으로 추방되어 있다. 이때의 추방은 사람이 마치 그 자신을 살갑게 돌봐주던 어버이 집에서 갑자기 내쫓긴 채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한 것과 같다. 이것은 어떠한 지배나 통치 또는 보호로부터도 철저히 자유로운 상태를 뜻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자유는 추방과 분리의 고통을 떠맡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형벌(刑罰)과 다름이 없다. 카뮈나 사르트르가 '바깥에 홀로 서 있음(실존)'을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조건으로 보았다면, 프롬은 그와 달리 자연과 신의 바깥으로 내쫓긴 사람의 상황(狀況)을 '불안과 고통의 원천'으로 보았다. 프롬은 이러한 분리 상태로부터 오는 불안과 고독 그리고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러한 분리를 치유(治癒)할 합일(合一)의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당시 20세기 사회는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터 위에 지어진 사회였다. 자본주의는 삶의 모든 것을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것으로 바꿔 놓는 '거대한 베틀'과 같고, 과학기술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알아낸 모든 것을 삶의 유용성과 편리성을 위한 부품으로 만들어내는 '거대한 생산설비'와 같다. 우리 삶에 시장의 베틀이 돌아가자마자 사랑조차도 상품으로 전락했고, 생산과 조립의 기술이 산업사회로 발전하자마자 사람들은 생명체 대신 '마음대로 조립 가능한 부품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앨빈 토플러는『미래 쇼크』에서 이러한 조립주의(modularism)의 근본 특성을 건물이나 사회 제도, 나아가 노동과 사람까지를 포함한 삶의 모든 관계들이 임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서 찾았다.
 사랑은 사람의 본성이긴 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통해 실존의 분리와 소외를 극복할 합일의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랑의 본질을 통찰하고,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랑의 기술을 갈고닦아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롬은 스스로의 삶을 통해 사랑의 기술을 익혔다. 프롬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레오 뵈벤탈에게 약혼녀를 빼앗기는 고통을 겪기도 했고, 11살 연상의 정신과 여의사 프리다 라이히만(Frieda Reichmann)과 결혼한 뒤 곧 파경을 맞았으며, 두 번째 부인이었던 동갑내기 사진작가 헤니 구어란트(Henny Gurland)를 '알 수 없는 병'(납 중독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극진히 보살폈고, 세 번째 부인 애니스 프리만(Annis Freeman)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가운데 이 책을 썼다.
 프롬에 따를 때, 사람의 사랑은 크게 '남을 살리는 사랑(biophilia)'과 '남을 죽이는 또는 죽은 것을 좋아하는 사랑(necrophilia)'으로 나뉜다. 사람에게 심겨 있는 사랑의 씨앗은 '살림의 햇빛'으로 자랄 수도 있지만 '죽임의 안개' 속에서 조잡들 수도 있다. 사랑의 기술은 바로 '참다운 사랑' 곧 살림의 사랑을 재배(栽培)하기 위한 기술을 뜻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의 골갱이(본질/本質)가 '능동적 줌'에 있다는 사실을 올바로 깨닫는 일이다. 줌의 능동성(能動性)은 사람이 사랑을 강제나 강압에 이끌려 행하는 게 아니고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마음으로 베푸는 일을 말한다. 스스로 사랑을 베푸는 이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셈이고, 그가 비록 남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재산 등을 그 '남'에게 베풀지라도, 그는 그것을 통해 가난해지는 게 아니라 되레 자신이 하고 싶었던 바를 이루어가는 성취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소비자(消費者)로서 그 자신이 소비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르렀고, 소비할 수 없는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었으며, 현대 문명 전체가 '끊임없는 소비 지향성'을 띠게 되었다. 사람들은 소비를 위해 죽을 때까지 돈을 필요로 한다. 소비의 관점에서 보자면, '능동적 줌'은 가난해지기이고, 받음은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소비시대의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도 '받기부터' 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도록 꾸민다. 그것은 매력일 수도 있고, 부유함이나 학벌과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현대인들은 어떻게 하면 남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을까를 고민하지 어떻게 하면 더 줄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준다는 것의 의미를 보통은 그것의 반대말인 받음에서부터 이해하려 한다. 시장형 성격의 사람들에게 '줌'은 언제나 '받음을 전제로 한 교환 행위'일 뿐이고, 만일 그들이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해야 한다면, 그들은 그러한 '줌'을 사기(詐欺)라고 볼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받는 것 없이 오직 주기만 하는 것은 스스로 가난해지는 일과 같다고 보기도 하며,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주는 것을 사회가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도덕적 의무로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는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렇게 '받고자 하는 욕망'에 길들여진 사랑은 결국 사랑의 기울기를 비뚤게 하고, 마침내 사랑을 무너뜨리고 만다.
 이에 반대되는 '자발적 줌'으로서의 사랑은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힘과 부 그리고 능력을 비로소 경험할 수 있게 해주며, 그로써 자신의 고양된 생명력과 환희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프롬에 따를 때 사랑의 종류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형제애(兄弟愛)는 사랑의 가장 기본적 형태로서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형제애는 배타성이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말하자면, 가난한 자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을 일컫는다. 둘째, 모성애(母性愛)는 어린아이의 생명과 욕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말하고, 셋째, 성애(性愛)는 완전한 융합, 즉 다른 한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을 뜻하며, 마지막, 자기애(自己愛)는 자기 자신의 성장과 성취에 대한 사랑으로서 이기심과 달리 자기 자신이 차지하게 될 몫에만 관심을 쏟는 게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성장시키는 '자기 관심(self-concern)'을 키우는 일을 말한다.
 사람이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네 가지 기본 요소, 즉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을 갖춰야 한다. 첫째는 보호의 능력이다. 어머니가 어린애를 차에 치이게 둔다거나 물에 빠져 죽게 한다면 우리는 절대 그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고, 또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꽃을 사랑한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책임이다. 여기서 말하는 책임은 직장에서 주어진 임무와 같이 의무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자발적인 행동을 뜻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자발적으로 도와줄 책임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셋째는 존경(尊敬/respect)이다. 'respect'의 어원인 '바라보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알아줄 때 참다운 사랑이 가능하다. 마지막은 지식으로서 사랑은 우리가 앞서 말한 사랑에 관한 모든 내용뿐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이나 사람을 '제대로 알' 때만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 이때의 앎은 단순 암기식의 지식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 대한 관심과 동기가 뒤따랐을 때 가질 수 있는 지식을 말한다.
 사랑의 네 요소가 실천되지 않는 사랑은 인간의 선한 본성과는 반대되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으로 펼쳐지고, 결국 사람들은 '발광 또는 파괴―자신의 파괴 또는 타인의 파괴―가 일어난다.'(『사랑의 기술』, 35) 프롬이 보는 기술 시대는 곧 사랑의 부재로 인한 인간 본성의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는 알게 모르게 현대인을 정신병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 우리가 사람의 삶의 조건에 뿌리박힌 욕구에 순응하는 건전한 사회를 만들 때, 바꿔 말해, 우리의 사랑이 개인적 심리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넓혀질 때 사람에 대한 사랑은 곧 사람 모아리(사회/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커져 나갈 수 있고, 우리 모두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건전한 사회』, 275) 바탕이 마련될 수 있다.
  구연상 교수(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대학)
<필자 소개>
주요 저서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에 대한 강의』,『철학은 슬기 맑힘이다』,『후회와 시간』
주요 논문 :『글쓰기와 논술』,『오늘날(DAS HEUTE)에 대한 하이데거의 현상학적-해석학적 탐구』

 

< 저작권자 © 원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원대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570-749 전라북도 익산시 신용동 344-2 | TEL 063-850-5551~4 | FAX 063-850-70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손찬근
Copyright 2005 원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wknews.net
원광대신문사의 기사 등 모든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복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