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합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제목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저는 얼른 메일을 확인하였습니다. 보낸 이는 2년 전 졸업한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강의하는 전공학과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두어 번의 교양 수업을 통해 마주친 기억이 났습니다. 메일을 조금 더 읽고 나니 그 제자는 제 기억 속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메일에는 저에 대한 안부와 서울의 모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이야기, 시나 소설을 써보겠다는 작은 소망, 현 시국에 대한 자기 생각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한 감정 등등이 섞여 있었습니다.
 메일을 받고 며칠이 지난 새벽,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두 통의 편지』를 읽던 중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조금 늦은 답장을 하였습니다.
 잘 지내고 있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두 통의 편지』를 읽은 직후 답장을 하다 보니 왠지 마음이 무겁고 꺼림칙합니다. 아마도 소설의 영향 때문이겠지요. 이 소설은 도플갱어에 대한 이야기인데, 소설의 문장에서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기분입니다. 책을 덮고 잠시 이 감정의 근원이 어디일까 생각해봅니다.
 프로이트였던가요? 이 꺼림칙함에 대해 그는 '사실은 아주 친근한 것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규정한 기억이 납니다. 주체가 억압하여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어냈던 것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라고 말이지요. 매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도 익숙한 것이지만 자신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다면 등골이 송연할 만큼 꺼림칙하고 섬뜩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함의하기도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섬뜩한 감정을 불안이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불안은 자신의 정신을 억압한 결과겠지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지만 그것을 눈앞에 보는 것은 두려운 것,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그런 꺼림칙함이 의식 가까이 왔을 때 알려주는 것이 바로 불안이라는 의미와도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프로이트는 이 불안을 이중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의식에서는 억압하고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메일을 쓰다 보니 문득 브레이트의『연극론』에서의 낯설게하기의 개념도 생각이 납니다. 불안은 주체가 잘 알고 있으면서 인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무의식에서 멀찍이 밀어낸 것을 의식으로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낯설게하기와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낯설게하기 효과의 본질은 익히 알고 있는 것, 바로 눈앞에 있는 것에 주의를 집중시켜 이를 특이하고 눈에 띄는 미지의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정말로 아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말로 아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을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브레이트의 주장은 탁월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2년 만에 메일을 보내와 조금 놀랐습니다. 제 기억에는 없는 낯설게하기의 개념을 통해 저를 기억해주니 무척 쑥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언젠가 등나무꽃 가득한 교정 벤치에 앉아 이야기했듯이 낯설게하기는 불안한 감정과 동의어입니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에서 숨겨져 있는 미지적 요소를 발견하고 그 순간 느끼게 되는 불안감을 경험하게 하는 것, 바로 낯섦의 삶입니다. 시절이 하 수상합니다. 그대 삶에 더욱더 불안이 깃들길.

 김정배 교수(교양교육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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