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합 인문치료 전문가 양성팀> 중국 현장학습을 다녀오다

▲ 공묘의 대성전(大成殿)
 둘째 날에는 리자오(日照)에서 취푸(曲阜)로 이동해 먼저 공묘(孔廟)와 공부(孔府)를 돌아보았다. 공림(孔林)과 더불어 '삼공(三孔)'이라 불리는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에서 지정한 AAAAA급에 해당하는 유적지로, 표를 구매해서 공항 검색대와 같은 검색대를 거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묘는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자 사당으로 역대 황제들에 의해 증축과 보수를 거치며 중국에서 자금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장대한 건축 규모를 지닌 곳이었다. 이곳은 문화대혁명 때 봉건주의의 상징으로 파괴된 흔적들도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여전히 동아시아 유교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공묘의 중심에 해당하는 대성전(大成殿)이었다. 이는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전각인데, 전면의 10개 기둥에는 여의주를 물고 휘감겨 올라가는 용이 장식되어 있고, 지붕은 황제의 색인 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대성전 정면에는 '유민미유(有民未有 : 인류가 있었던 이래로 이러한 존재는 지금까지 없었다)'라는 현판이 붙어 있어 그가 성인 가운데 최고의 성인(至聖)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고, 황제의 관을 쓰고 앉아 있는 공자의 상 위에는 '만세사표(萬世師表 : 인류의 영원한 스승)'와 '사문재자(斯文在玆 : 중국의 문화가 바로 여기에 있다)'라는 현판이 공자의 역사적 위상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 건물 앞에는 동중서(董仲舒), 왕수인(王守仁), 왕부지(王夫之) 등 유가의 역사적 인물의 위패를 봉존한 사당이 있었다. 여기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공자 역사의 자취나 유가의 저명한 인물들을 직접 만난 듯 깊은 감회가 내게 다가왔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동로(東路)로 빠져 공자집의 옛 우물(孔宅故井)을 보았고, 그 옆에 자리하고 있는 '노벽(魯壁)'을 보았다. 진시황 분서갱유 때 벽을 이중으로 쌓고 그 사이에 상서(尙書),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의 책을 숨겨 놓았는데, 이것이 한나라 경제(景帝) 때 발견되었다고 한다. 문물을 파괴하고 다시 복원하는 역사적 현장을 본 것이다. 이곳을 지나 공자가 아들 공리(孔鯉)를 교육시켰다는 시례당(詩禮堂)도 둘러보았다.
 공자의 직계 자손들이 살고 취푸의 공적인 업무를 담당했던 공부는 공묘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에 위치해 있었다. 152채의 건물로 구성된 공부는 공자의 직계손이 사는 사적 공간과 고관을 대접하고 취푸 지역을 다스리는 공적 공간인 관청이 함께 있는데, 장제스(蔣介石)와 더불어 제77대 쿵더청(孔德成)이 타이완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공자와 그 자손들이 묻혀 있는 공림으로 다음 발길을 옮겼다. 이곳은 취푸의 북부에 위치해 있어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여기에 공자 이후 긴 세월을 거치며 묻힌 자손의 묘가 10만 기가 넘으며 3,600개 정도의 묘비가 남아 있다고 한다. 단일 가문의 묘지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라 한다. 그 넓이가 무척 넓어 전동차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걸어서 공자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공자의 묘 오른쪽에는 아들인 공리(孔鯉)의 묘가, 왼쪽에는 손자인 공급(孔伋)(=자사子思)의 묘가 있었다. 공자의 묘 앞에는 명대(明代)인 1443년에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전각하고 글씨를 황금색으로 입힌 묘비가 서 있었다. 묘는 작은 구릉처럼 보였고 묘지 위에 거대한 고목이 역사의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공자의 묘 앞에서 인류 최고의 성인 가운데 한 분에게 존숭의 예를 표하며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 들어갔다.
 세 번째 날 간 곳은 맹자의 유적지, 즉 맹묘(맹자사당), 맹부(맹자관청), 맹림(맹자묘원) 등이었고, 오후 늦게 니산서원(공자 탄생지)을 방문했다. 맹자는 공자 다음의 성인 위치에 있어 '아성(亞聖)'으로 표현된다. 규모가 크긴 했지만 공자 유적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맹모삼천사(孟母三遷祠),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 등의 비를 보며 맹자의 영혼이 깃든 곳임을 느꼈다. 전자는 공동 묘지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학교 근처로 세 번 이사를 하며 맹자를 교육했던 모성 교육의 사표를 기리는 비(碑)였고, 후자는 말썽꾸러기 맹자가 학업에 진척이 없자 맹자 어머니가 애써 짜던 길쌈을 끊으며 인내와 정성, 노력의 가치를 일깨운 곳임을 나타내는 비였다. 맹자 자손의 묘역인 맹림은 그곳에서 떨어진 외곽에 있었지만 지금에서야 정돈되고 개발되기 시작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성선설(性善說)이나 사단설(四端說)뿐만 아니라 민본주의에 기초해 혁명의 정당성을 주창한 맹자는 역사적으로 큰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민주, 자유, 평등과 같은 사회주의 핵심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현대 중국에 필요한 사상가로 새롭게 복권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 니산서원(尼山書院) 공자 탄생지
 마지막 일정은 공자가 태어난 니산서원(尼山書院)으로, 이곳에 공자가 태어난 부자동(夫子洞)이 있었다. 공자는 니산의 동굴에서 태어났는데, 기이하게 생긴 모습으로 인해 버림을 받았다가 며칠 만에 다시 찾아온 어머니 안징재에 의해 구해져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자가 태어난 동굴 안의 평평한 바위를 보며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난 예수, 네팔 룸바니의 길가에서 태어난 부처 등 인류의 성현 세 분이 모두 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떠올렸다.
 네 번째 날은 타이안(泰安)으로 이동을 해 타이산(泰山)에 오르지 못하는 황제들이 제례를 올리던 대묘(垈廟)를 구경하고, 곧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 불리는 타이산에 올라갔다. 이는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고 읊은 양사언의 시조에 나오는 그 산으로, 이는 중국 제왕들이 제천의식을 행하던 장소였고 도교의 성지 중 하나였으며, 이곳에 세워진 예술적 걸작품들로 인해 중국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끊임없는 영감을 받는 영지(靈地)였다. 공자도, 진시황도, 한 무제나 당 현종도 이곳을 올랐다 한다. 이곳에는 공자를 모신 사당, 옥황대제를 모신 사당인 옥황묘, 벽하원군, 즉 태산할미를 모신 사당, 재복을 비는 재신(財神) 사당, 불교 사원 등이 있어 유불선 삼교가 융합하고 공존하는 중국인의 정신적 지주터로 보였다. 7천 개가 넘는 계단 대신에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부근 남천문(南天門)에까지 올라갔고, 정상 옥황정의 하늘길을 돌아다녔다. 천제를 올리고 옥황대제가 자리하고 있는 1천 545m의 정상에서 중국에 도착한 이후 처음 쾌청한 날씨를 맛보았다. 다음 날에는 산동박물관을 둘러보며 귀국했다.
 본 사업팀에서는 동아시아 사상이 탄생하고, 유지되고, 파괴되고, 복원되는 유가와 도교의 주요 유적지를 답사하며 동아시아 인문정신의 현장학습을 수행했다. 귀국 후 6개 팀으로 나누어 PPT 자료 발표, 동영상 제작 및 발표 등 현장학습 결과발표회를 함으로써 학생들의 학습 동기와 학습 내용을 공유했고, 국제화 마인드를 고취하며 체험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뒀다.
  김정현 교수(철학과)
 
▲ 태산에서 찍은 단체 사진
 ≪프라임 인문학진흥사업단≫에서 추진하는 <융복합 인문치료 전문가 양성팀>, <융복합 문화유산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영미 역사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인문학 중장기 발전 사업팀>, <글로벌 동아시아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등 6개 팀의 해외 연수가 겨울방학 동안 실시됐다. <원대신문>은 각 사업팀의 연수 성과를 구성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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