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낳고 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대개 알을 무사히 품지만, 종종 실수로 놓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놓친 알은 1초 만에 딱딱하게 얼어버린다. 저 멀리 데굴데굴 굴러가 한파를 맞는다. 부모는 뒤뚱거리며 뛰어간다. 알을 다시 다리에 품는다. 1초가 늦어버렸다. 알은 녹지 않는다. 부모는 남의 알을 뺏으려 하기도 하고, 알 대신 눈덩이를 한참 동안 품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소리 내어 운다.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에서 보여준 황제펭귄의 모습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모습을 짐승과 자주 비교한다. 목적은 언제나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데에 있다. 부적절한 기준과 주관적인 가치는 도덕성이 결여되는 판단을 낳을 뿐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세상에는 짐승과 같은 선상에 설 자격도 없는 인간이 많다. 밝혀진 부분보다 가려진 부분이 더 크다는 점이 이 주장에 힘을 더한다.
   지난해 2월, 7살 원영이는 평택 야산에서 암매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친부와 계모의 학대였다. 계모는 약 석 달간 원영이를 욕실에 가둬놓고 몸에 락스를 뿌리고 폭행을 했으며, 식사는 하루에 한 끼만 주었다. 사망 하루 전에는 원영이의 옷을 벗기고 찬물을 부었다. 옷에 대변을 봤다는 이유에서였다. 친부는 이를 보고도 수수방관했다. 결국, 다음날 원영이는 차가운 욕실 바닥에서 숨졌다. 부모는 아동폭력으로 잡혀갈 것을 우려해 원영이의 시신을 베란다에 열흘간 방치해놓았다가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다.
   경찰 조사에서 원영이의 부모는 학대 이유에 대해 '말을 안 들어서'라고 말했다. 이처럼, 가해자는 폭력을 두고 어떠한 이유를 붙이고자 한다. 그러나 정당방위를 제외하고, 모든 폭력에는 이유가 없다. 기준이 언제나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보통, 가해자는 사회적 강자인 반면,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이므로 기준의 합리성이 떨어진다. '국가'와 '개인', '남성'과 '여성', '성인'과 '아동' 등이 그것이다.
   가정폭력처럼 강자와 약자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다른 사례로는 학교폭력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교폭력이 학생들 간의 사건으로만 정의되는 것이 못마땅하다. 2011년 체벌금지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교단은 교사들의 무분별한 학생 체벌─즉, 교사의 완벽한 폭력으로 범벅되어있었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숭고한 단어를 폭력으로 귀결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굉장히 불순할뿐더러, 비인간적인 모든 행태가 이 한 마디에 포장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교사의 근무사항에 폭력이 적혀있지 않듯, 모든 국민이 이행해야 하는 교육의 의무에도 폭력은 없다. 내가 자란 교실은 분명 법적으로 규정된 공공장소였지만, 모순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헌법도 통하지 않는 비열한 공간이었다. 교사의 말이 곧 법이었고, 그 법은 예고도 없이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그들이 주는 깨달음의 전제가 체벌이라면, 학교는 애당초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인권이 있고 교육이 있는 것이다. 체벌금지법 이후 교권이 낮아졌다는 말에 설득력이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명한 고전 중 하나인『에밀』은 교육에 대해 '설령 합당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억압과 굴종으로, 마치 노예나 죄수처럼 속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고, 어른들에게 '아이들의 행복을 뺏을 권리가 없다'고 지적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불행은 무지가 아니라, 알고 있다는 오만함에서 시작된다.
   올해는 원영이의 1주기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한 평의 욕실은 다수의 시선에서 소외되는 장소이다. 원영이는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서는 보이지 않는 장소가 있다. 약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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