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합 문화유산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 세계유산 보존·활용의 현장을 가다 -

 설 연휴의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2월 1일, <융복합 문화유산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22명은   3박 4일의 일정으로 일본의 교토·나라·오사카 등이 속한 간사이 지방으로 향했다.
▲ 오사카 성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
 답사를 떠나기에 앞서 프로그램을 기획한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님과 참가 학생들이 만나 일정도 논의하고 사전 발표도 진행하였다. 해외를 처음 가 보는 학생, 이미 몇 차례 가 봤던 친구, 경험은 제각각이지만 답사에 대한 기대와 설렘의 질량은 동일한 듯 보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보고 얻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였고, 그 결과 네 가지 정도로 답사 소주제가 압축되었다.
 첫째, 고대시기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 살펴보기, 둘째, 일본의 문화유산 활용 모습 찾아보기, 셋째, 일본 문화를 만들어 온 사람들 짚어 보기, 넷째, 일본의 세계유산 현황 파악하기였다. 답사가 끝난 뒤, 개인별 결과보고서와 함께 5인 1조로 구성된 4개 팀의 팀 단위 보고서도 제출해야 하기에 가위바위보로 한 팀이 하나씩 주제를 맡았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익산에는 2015년 등재된 세계유산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가 있다. 세계유산 등재 이후, 이들 유산을 활용한 콘텐츠 개발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우리대학의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중추 역할을 해냈듯이, 이제는 우리대학에서 배출된 문화유산 전문가들이 이들 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여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만들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익산의 백제문화를 빼닮은 일본 간사이 지방의 고대문화 속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우리 프라임 꿈나무들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민과 함께하는 세계유산
 - 평성궁(平城宮)터의 보존과 활용 -
 이번 답사에서 가장 많은 것을 느꼈던 곳은 나라현의 '평성궁터'이다. 710년부터 794년까지 '나라시대(奈良時代)' 일본 역사의 중심지였던 평성경의 궁궐터로서, 1998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평성경은 중국 당의 국제도시 장안(長安)을 모방하여 건설된 수도이다. 중국 도성 체계인 조방제(條坊制)를 채용하여 남북 길이 4km, 폭 75m의 주작대로(朱雀大路)와 그 양쪽으로 격자 모양의 도로를 개설한 후, 행정 기관과 불교사찰·신사·가옥 등의 건물을 바둑판 같이 정연하게 배치한 도읍이라는 점에서 일본 도시 정비의 시초를 보여 주는 유적이다.
 한때 번영의 중심지였던 평성궁은 1,3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전각 한 채 없는 빈터만 남게 되었는데, 20여 년 전 세계유산 등재를 전후하여 제1차 대극전과 주작문이 복원되고, 제2차 대극전 터와 다이리(內裏) 터가 나무 식재, 기단복원 방법으로 정비되었다.
▲ 발굴 조사 중인 평성궁 동원지
 평성궁터의 역사를 보여 주는 '평성궁적 자료관'의 전시물을 보면, 평성궁터의 보존은 100여 년 전인 1900년대 초반, 타나다 가쥬로(棚田 嘉十郞)나 미조베 분시로(溝가변 약자 文四郞) 등의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황폐해진 궁터를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보존하려 했던 나라공원의 정원사 타나다 씨, 그 노력에 적극 동참한 마을 주민 미조베 씨, 이들이 있었기에 평성궁터의 오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1922년 궁터 일부가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 1952년에는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1년 궁터 한편에 전철 검차장 건설이 계획되자, 전문가와 민간인이 손을 잡고 '평성궁 보존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2001년 국토교통성이 나라와 화가산을 잇는 자동차 도로를 평성궁터 지하로 통과하도록 계획하자 시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평성궁터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직후였기 때문에 평성궁을 지키려는 관심과 동참은 더욱 커졌다. 2003년에는 일본고고학협회를 비롯하여 나라 세계유산 시민 네트워크 등 15개의 시민 단체와 개인들이 '고속도로로부터 세계유산 평성경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고 고속도로 건설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2003년 파리에서 열렸던 제2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논의될 정도였다. 개발로 인하여 문화유산이 훼손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보호를 위해 앞장섰던 시민들의 열정 덕분에 약 120만㎡에 이르는 드넓은 맨땅(?) 평성궁터의 세계유산 등재가 가능했을 것이다.
 답사를 갔던 그날, 평성궁터 한편에서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 몇몇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하였던 나라문화재연구소 쇼다 신야 선생은 현재 평성궁 동원지 발굴 조사를 하고 있는 연구원인데, 자신도 짬 날 때면 잠깐씩 이곳 궁터에서 축구를 한다고 하면서, 매일 아침이면 시민들이 이곳에 모여 태극권을 한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1955년 나라문화재연구소의 태극전 터 동남쪽 회랑지 조사를 시작으로, 60여 년이 넘게 진행된 궁터 발굴 조사는 현재 제566차에 이르렀다.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한편에서는 축구를 하거나, 체조를 할 수 있는 문화유산. 유산의 가치를 지켜 내는 데 소홀하지 않으면서도 보존과 활용이 시민과 함께 가는,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불현듯 우리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가 떠올랐다.
 1989년부터 발굴이 시작된 왕궁리유적은 이제 2년만 지나면 30년째가 된다. 우리나라의 유적 중 조사 기간이 가장 긴 유적일 것이다. 이처럼 철저한 조사 덕분에 백제 왕궁의 면모를 찾아냈고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세계유산 미륵사지 역시 한쪽이 무너진 채 오랜 세월을 견디고 있던 석탑의 복원 작업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이제 이들 소중한 세계유산이 시민들에게 더 친숙해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야 할 때이다. 
 우리에게 맞는 우리만의 처방이 필요하겠지만, 평성궁터와 함께하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문화유산과 지역 주민, 보존과 활용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던 프라임 꿈나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번 답사 중 찡했던 순간이 몇 번 있다. 일본 땅에서 우리 유산을 지키는 데 평생을 바친 고 정조문 선생의 피와 땀이 스며 있는 고려박물관을 방문하여 그의 아들 정희두 사무국장으로부터 부친이 유물을 수집하면서 겪었던 일화들을 들었을 때, 조국이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한동안 가슴 한 곳이 미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 고려박물관에서 정희두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학생들
 답사 3일째 저녁, 일본 운전기사도 놀랠 정도의 빡빡한 일정에도 힘든 내색 없이 열공 모드였던 우리 학생들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오사카의 번화가 신사이바시로 출동하여 망중한을 즐기는 여유도 가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전철역을 잘못 가르쳐 줘서 발을 동동거리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이렇게 숙제를 한 보따리 안고 4일간의 답사를 무사히 마쳤다.

  문이화 교수(문화유산 콘텐츠 전문가 양성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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