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에 구멍이 났다.

 커피를 사러 나온 참이었고, 계산대 앞엔 먼저 온 손님이, 이거하고 저거 주세요, 하고 주문을 넣고 있었다. "전부 10,800원입니다." 알겠다며 끄덕인 손님이 지갑을 펼친 순간, 동전 대여섯 개가 짤랑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황급히 허리를 숙여 동전을 집는데, 세상에…. 양말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도 엄지발가락이 훤히 보일만큼 커다란 구멍이. 왜 또 그날따라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지…. 양말에 구멍이 난 채로 이곳저곳을 활보했다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에 금세 얼굴이 벌게졌다.
 부끄럽다는 감정은 어디서 솟는 걸까? 단정하고 말쑥한 차림이 아니면 창피한 걸까? 구멍 난 양말은 치부인 걸까? 누가 그런 기준을 만들어 낸 걸까? 그런 고민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줄 영화가 있다. 나가사키 슌이치 감독의 영화,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이다.
 소설이 원작인 영화였다.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비록 소설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느긋하고 차분한 분위기만으로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영화였다. 전원생활과 슬로우 라이프에 대한 동경. 짙은 초록과 건강한 흙냄새가 영상을 넘어 보는 이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한 느낌. 아름다웠다. 풍경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따스했다. 그렇게 사람을 치유해 주는 힘이, 영화 <서쪽의 마녀가 죽었다>에는 있었다. 위로받았고, 뜻하지 않은 격려도 받았다.
 적은 등장인물에 서사도 단순. 세련된 구성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투박하지도 않은, 아주 정갈한 느낌의 작품이었다. 마치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구멍 난 양말을 꿰매 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등교 거부 중인 중학생 소녀 마이와 그녀를 맡게 된 외조모의 소박한 생활을 보여 주며 영화는 한결 같은 톤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너야, 어떻게 살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라고.
 중학교 2학년인 마이는 진급과 동시에 등교를 거부하며 집에 틀어박힌다. 어떤 설득으로도 마이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던 부모는 결국 그녀를 서쪽 마녀, 즉 마이의 외할머니에게 맡긴다. 그렇게 시작된 마이와 외조모의 동거 생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꼬박꼬박 식사하기, 운동하기 등등.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마녀수업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마이는 집안일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천천히 삶의 활기를 되찾은 마이는 자신이 등교를 거부한 이유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한다.
 "같은 그룹이 되기 싫은 애 얼굴 보고 방긋 웃는다든가, 흥미도 없는 얘기에 열심히 맞장구를 친다든가, 그런 게 왠지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올해는 그런 걸 안 했죠. 그랬더니 결국 혼자가 돼 버렸어요."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지 모를 성장통. '가식'을 그만두자 외톨이가 돼 버렸다는 마이의 고민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까닭이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내려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고, 시답잖은 이야기에 억지웃음을 짓는 일상. 거기에 대해 서쪽 마녀는 이렇게 말한다.
 "한 마리 외로운 늑대로 버틸 건지, 무리에서 살아가는 편안함을 고를 건지, 때에 맞춰서 결정하면 어떻겠니?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장소를 바랐다고 해서 떳떳하지 못할 필요는 없단다. 선인장이 물속에서 자라야 할 필요도 없고, 백마가 하와이보다 북극에서 살기를 원한대도 누가 백마를 탓하겠니?"
 정말 그랬다.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이 선택했다면 그 삶은 떳떳한 것이다. 주눅 들 이유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만약 부끄럽고 창피하다면, 그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아니 우리 모두의 삶 역시도 저 백마와 같길 바란다. 남극에서 살길 바란 백마를 우리는 탓할 수 없다. 양말에 구멍이 났대도 단지 그뿐. 지레 창피해서 얼굴을 붉힌 건 스스로 떳떳치 못했기 때문이다. 단정치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게 두려웠을 따름이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 주말엔 양말이라도 사러 가야겠다. 이동혁(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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