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 인문학진흥사업단≫에서 추진하는 <융복합 인문치료 전문가 양성팀>, <융복합 문화유산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융복합 문화예술 콘텐츠 전문가 양성팀>, <글로벌 동아시아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영미 역사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등 6개 팀의 해외 연수가 겨울방학 동안 실시됐다. <원대신문>은 각 사업팀의 연수 성과를 공유하고자 한다. /편집자 

 

▲ 도카시키 섬 입구에서 찍은 단체 사진
▲ 한국인위령탑 앞에서 전쟁 희생자들을 기리며 묵도하고 있는 모습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이 다가왔다. 한국의 추운 겨울을 뒤로하고 나는 첫 해외여행인 오키나와를 다녀오게 되었다. 지난 1월 10일부터 13일까지, 학생 11명과 인솔자 2명이 함께한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아침 일찍 인천공항에 모인 오키나와 답사팀. 무거운 눈꺼풀을 간간히 이겨 내며 해외여행의 기대감과 설렘이 우리를 들뜨게 해 주었다. 비행기가 뜨고 2시간. 넓은 바다를 건너 작은 섬에 도착했다. 오키나와의 날씨는 한국의 날씨와는 달랐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 날씨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래도 섬이니까 바닷바람은 춥겠지, 라는 생각에 조금 두꺼운 외투를 챙겨 왔지만 바닷바람도 시원하게 불어 주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에 우리들은 해안도로를 달렸다. 정말 아름다운 색깔의 에메랄드 바다는 해외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좋은 신호였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들 때문에 조금 불안감이 생기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오키나와를 검색하면, 아시아의 하와이, 한 번쯤은 가 보고 싶은, 한 번은 가 봐야 될 섬이라는 키워드들이 나온다. 하지만 조금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평화 기행 여행 혹은 전쟁의 비참함 등 오키나와 전쟁의 모습과 전쟁 중 있었던 오키나와의 차별, 조선인 군부와 위안부 문제, 강제집단사(강제집단자결)에 대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나온다. 사실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를 뒤로하고 암울한 이야기들을 듣는 건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들어야 했다. 아니, 들어야만 했다. 모르는 것이 약이 아니라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처럼, 오키나와에 대해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야 했다. 그중에서 나는 도카시키 섬을 말하고 싶다.

 도카시키 섬은 답사 둘째 날에 돌아본 곳이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토마리 항에 도착해 배를 타고 1시간을 가면 작은 섬 하나가 나온다. 여전히 아름다운 바다를 품고 있으며 날씨도 따뜻했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백옥의 탑에 가기로 했다.

 

▲ 한국인위령탑과 백옥의 탑

백옥의 탑은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백옥의 탑 입구는 나무들 때문에 태양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어둡고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 길을 걸으면 스산하고 음산한 느낌이 다가오는 듯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기에 일단은 갔다. 그리고 나타난 아름다운 경치, 기쁨과 함께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마주친 백옥의 탑. 약간의 불안감.

 백옥의 탑은 오키나와 전쟁에서 희생당한 분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이다. 위령탑은 우리나라의 무덤 같은 것이다. 오키나와를 간다면 이런 위령탑을 많이 볼 수 있다. 백옥의 탑 뒤에는 희생자의 성함이 적혀 있고, 그 밑에는 희생자들의 유골이 묻혀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탑에는 조선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키나와에는 정확한 숫자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강제로 혹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일본군의 거짓말에 잡혀 온 조선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다. 거기다가 미국과 전쟁이 한창일 때, 이 도카시키 섬에도 분명히 100명 이상의 조선 사람들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조선인은 사고사 7명, 처형 3명이라는 어이없는 숫자로 기록되어 있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하며, 그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잠시 묵도를 했다. 다음은 강제집단사비로 향했다. 가는 길에 섬 가이드 분이 전망대를 보여 주고 싶다고 하셔서 세 군데의 전망대를 갔다. 두 군데의 전망대는 정말 정말 아름다운 바다와 경치를 한 번에 볼 수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군데는 강제집단사가 발생한 곳이었다.

 오키나와는 미국의 일본 본토 진입을 막기 위한 방패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중 도카시키 섬은 오키나와로의 진입을 막는 섬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과거 일본군은 우리들이 서 있는 전망대에 섬 주민들을 집합시켰다. 일본군은 섬 주민들이 만약 미군에게 잡히면 자신들의 비밀을 누설할까 봐 섬 주민들을 잠재적 스파이로 의심했다. 아니, 믿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 내린 명령이 자결이었다. 말은 자결이지만, 일본군이 저지른 살인 행위였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일본군과 촌장은 주민들을 새벽부터 불러내었다. 일본군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 섬 주민들에게 만약 미군에게 잡힌다면 남자는 갈기갈기 찢겨 죽고, 여자는 강간을 당하다 죽을 것이라는 이상한 소문을 냈다. 섬 주민들은 그 말을 믿었고 일본군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주어진 수류탄 2개. 그 순간 눈과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귀를 막아도 들리는 설명, 눈으로 보지 않아도 머리로 그려지는 모습들…. 끔찍했다.

 수류탄을 배급받은 주민들…. 그리고 도카시키 섬에는 끔찍한 폭발음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기뻐하며 자결하라. 일본군의 말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을,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수류탄으로, 만약에 수류탄이 불발이거나 혹은 살아남았다면 다른 사람의 손으로, 그것도 살해가 아닌 안식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가했다. 함께 있는 시간도 짧은데 어떻게 나라를 위한다고,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그들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만 했을 거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 속에서 죽음이 아니라면, 남는 건 고통과 슬픔뿐이었을 것이다.

 전망대를 내려오고 나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동한 곳은 강제집단사비가 있는 곳이었다. 그 입구는 정말 가기 싫었다. 나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들어가기 싫었을 것이다. 일단은 조용히 들어갔다. 오후 1시였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고, 침묵은 공기까지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도착한, 검게 젖은 강제집단사비. 원한의 눈물인지 아니면 통곡의 슬픔인지…. 준비해 온 국화꽃을 꽂으며 희생자들을 기리는 묵도를 했다.

 다음은 아리랑비에 갔다. 강제집단사가 너무나 충격적이었지만, 아리랑비는 놓치면 안 되는 곳이었다. 아리랑비는 도카시키 섬에 온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처음으로 위안부 사실을 밝힌 고(故) 배봉기 할머니를 포함한 약 17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추모하기 위한 비석이다. 바닥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바치는 꽃 타일이 새겨져 있고, 원뿔형의 돌을 쌓아 올린 아리랑비. 그 가운데에는 동그란 구슬이 있다. 그 구슬은 한반도를 의미하고, 그 뒤는 한반도를 가리키고 있다. 준비해 온 국화꽃을 놓고 안타까운 마음과 슬픈 마음으로 묵도를 했다.

 그렇게 마친 도카시키 섬 답사. 가이드 분은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도카시키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데려다 주었다. 하얀 모래알들이 반짝이고 뜨거운 햇빛은 파도에 부서져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강제집단사의 충격이 너무나 강해 그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키나와 답사는 인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재용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글로벌 동아시아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오키나와뿐 아니라 타이완도 돌아보았으며, 다가올 여름방학에는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답사하며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혹은 알려져 있지만 잊혀진 역사와 이야기들을 들을 계획이다. 첫 해외여행을 허투로 보내지 않아서 정말 좋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유익했다.

 

  이상후(국어국문학과 2년)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