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계절이 도래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장미대선'입니다. 이름마저도 서정적입니다. 우리는 바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먼저 바뀔까요. 저는 말과 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선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달 동안 말과 글을 자유롭게 다루지 못하는 지도자의 쓸쓸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올 봄이 지나면 말과 글을 다루는 기술도 달라질 것입니다. 아니, 달라지기를 기원합니다.
이런저런 글을 쓰며 자주 인용했던 책이어서 무안하기는 합니다만 다시 인용합니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에서 "혁명이란 텍스트를 바꾸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혁명이 아무리 피로 물들었다 하더라도 혁명의 본질은 주권 탈취가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혁명에서 새로운 텍스트를 통과시키기 위해 이차적 수단으로 폭력이 휘둘러져 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 쓰는 일"이 혁명이라는 것이죠.
아타루는 "혁명은 텍스트를 다시 쓰는 일"이라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루터를 소환합니다. 모두가 아시는 바와 같이 루터의 성서 번역은 종교 개혁으로 이어집니다. 루터는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읽는 것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라고 루터는 고백합니다. 루터가 생각하기에 교회가 하는 일은 성서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은 우리 존재 전체를 글자 위에 던져 넣는 일입니다. 루터의 성서 읽기와 성서 번역, 연설 등은 당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루터가 모든 권력이 집결되어 있는 교회의 법을 어떻게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서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루터에게는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성서를 통해 올바른 종교와 인간의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이자 명상"입니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 루터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 위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을 했습니다.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는 일"이 혁명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세종대왕 역시 텍스트를 바꾸는 것으로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한글을 만들고 반포하는 것으로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고 세종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세종은 루터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언어와 양립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 나선 것이지요. 물론 그에 상응하는 저항도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세종대왕까지 왔습니다. 제가 조금 멀리 나갔나요? 용서해 주신다면 한 마디만 더 쓰겠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울 것 없는 텍스트 생산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세종 덕분입니다. 광화문에 그의 동상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광화문에서 피 흘리지 않고 텍스트를 고쳐 나가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저는 이 사실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말로 하는 것이다." 말 때문에 유독 많은 고초를 겪었던 한 대통령의 전언입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전하고 삶을 바꾸는 일이 텍스트와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입니다. 텍스트를 바꾸는 일에는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법을 다시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 스스로를 다시 쓰는 것, 우리가 변화하는 것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문할 때가 됐습니다.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다시 쓰고, 다시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말이지요.

서덕민 교수(교양교육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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