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2012년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2017년 개설된 <생명평화리더십>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 생명평화리더십 강좌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조은수 교수

 

[불교의 기본정신은 생명존중을 바탕으로 한 평화로운 세상의 건설이다. 이 글은 이러한 불교정신에 입각한 생명평화리더십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난 30년간 서구 학계에서는 합리성 우위주의와 자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조로서,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 해체주의, 탈 중심주의 담론들이 등장했다. 자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시작됐으나, 결국 세계 문명을 보는 거시적 입장에서 윤리적인 측면에 그 비판이 모아졌다. 인류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환경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타자로 이해하고 그것을 정복하고 조종하며 이용할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초기,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 신을 놓고 그 절대 전능의 신에게 복속하며 숭배하는 종속적 존재로 자신을 강등시켰으나, 근대에 들어 신학이 아닌 과학과 철학의 발전을 통해 이성주의에 기초한 자아중심적 세계관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주관과 객관의 세계 간의 분리를 선언한 서양 근대철학의 인간의 존엄성 선언이, 자아중심주의, 내지 이기적 인간중심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구 근대 역사에서 목도되는 여러 가지 문명 폐해와 타자 정복적 태도의 근원을 제공하였다는 비판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상황도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물신주의와 이념의 세속화의 척도에서 본다면 현재 한국 사회는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 보아도 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중심주의는 이익과 경쟁을 정당화하고 그러한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를 보장하는 사회 체제를 가능케 했을 뿐만 아니라 탐욕과 욕심으로 일어나는 무한 경쟁을 장려하여 그 결과로 나타난 사회적 갈등의 정도는 심각하다. 우리는 동양의 삼대 사상이라고 하는 도가, 불교, 유교를 과거에 모두 다 경험하고 그것을 전통적 가치의 지주로 자랑해 왔으나, 이제 세속화, 물신주의, 타자에 대한 억압, 환경에 대한 무분별한 착취가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심하다. 과거 도가 사상에서 가르쳤던 자연과의 합일의 정신이나 불교의 기본정신인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비정신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낯선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 문제의 많은 부분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오는 역작용이며, 자신과 타자 간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자연을 정복과 통제와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자아중심적 세계관이 그 원인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공존과 평화와 포용의 세계관이 요구되는 이유가 있다.
인간과 사회는 상호 연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다. 미국의 과정철학자 놀란 제이콥슨(Nolan Pliny Jacobson)에 따르면, 불교는 세계 속에서 우리의 경험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사고방식을 제공한다고 한다. 불교의 목적은 허구적인 자아에 의한 생각이 만들어 내는 욕망과 집착을 경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욕망과 집착에 의해서 이 세상을 자아중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과 좌절이 빚어내는 긴장, 압박 속에서 사람들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왜곡해서 보고 있다. 그러한 정신적 허구에서 구출하려는 것이 불교의 철학적 정신이며, 이것을 불교의 '과정'적 또는 '무아'적 사고방식이라고 한다.
한편 서구 사회 속에 불교에 대해 대중적 관심이 확산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명 비판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입을 모아 자연과 세계에 대한 정복적 태도, 자유 경쟁과 시장의 논리 속에 함몰되어 가는 인간성, 물신주의 등에 대한 사회적, 지성적 비판을 가했고, 그 해결책을 공동으로 모색하고자 했다. 동양뿐만 아니라 세계의 각종 사상과 종교 전통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의 태도와 세계관을 모색하고자 했다(예를 들어 존 레논이나 스티브 잡스의 인도 행을 생각해 보라). 현대 문명의 병폐를 서양의 자아중심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경고하고 이것의 대안으로 동양의 선(禪)불교의 가르침을 제시한 선구로서, 일본에서 미국으로 온 스즈키(D. T. Suzuki, 1870-1966)와 앨런 왓츠(Alan Watts, 1915-1973)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저술은 당시 기성 사유방식을 부정하고 체제에 반항하던 히피 세대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불교는 동아시아의 국지적인 전통이 아니라 글로벌한 지구의 종교지형 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으면서 대안적 사고, 대안적 삶의 방식을 대변하게 되었다. 세계에 통용될 수 있는 불교적 어젠다를 공유하는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실천 수행 방법을 개발할 필요성과 그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다. 불교는 전통 종교가 아닌 새로운 가치관으로서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된 불교 교리와 가르침으로 개인의 삶과 사회 현실에 적극적이면서 실질적으로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
특히 불교의 연기설은 개인의 행위와 결과에 관한 도덕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근간을 제공한다. 개인이 경험하는 심리 현상의 생성의 과정에 대해 통찰과 인식을 주어 욕망의 제어를 가르친다. 심리적 집착의 결과로서의 자신의 고통에 대한 성찰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내가 야기하는 고통에 대해 깊은 유대감을 생성함으로써, 세계와 나, 나와 자연 간의 유연한 배려와 상생적 존경의 관계를 가능케 한다. 동아시아 화엄 사상에서는 법계의 존재들은 마치 중중무진 인다라망(重重無盡因陀羅網)의 그물코로 연기를 비유하였다. 마치 그물코 각각에 수정 구슬들이 걸려 있을 때 그 빛들이 서로가 서로를 무한하게 반사하여 서로를 비추는 것과 같이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네트워크의 세계는 이 '중중무진의 인다라망'으로 잘 설명된다. 이러한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중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이 다른 모두의 중심이 된다.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투과하는 빛은 서로 속에 투영된다. 개체는 개별적이고 탈 중심적이면서도 콜렉티브하게 움직인다. 대중 속에서 우리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따로 또 같이 살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취하고 각각은 각각의 중심이 된다.
이러한 네트워크와 상호 관련성의 이해에서 불교의 윤리관이 도출된다. 관계의 존재 양식을 이해함으로써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윤리가 가능하다. 동체대비는 나와 남이 한 몸임을 말한다. 저 유명한 경전 유마경에 나오는 장면이다. 문수사리(Manjusri) 보살이 유마힐에게 문병 와서 "어떤 원인 때문에 병이 생기셨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유마힐은, "저의 병은 대비(大悲)에서 생긴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중생이 아프기에 자기도 아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를 깨달은 자라야 동체대비를 느낄 수 있다. 네트워크 속에서 많은 정보를 얻은 자라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 수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남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와 한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다른 존재, 다른 생명을 가진 존재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능력, 다른 존재의 처지가 되어 그들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인 능력, 그것이 현대인들이 배워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동체대비의 자비심은, 이 세상의 모든 생겨난 것이 스러지게 되어 있고, 따라서 주어진 고정된 실체와 성품을 갖지 않는다는 공(空)의 입장을 터득하여야 생겨날 수 있다. 세계의 사물들은 서로 연기의 관계로서 얽혀 있으므로 따라서 자기 스스로 생겨나거나, 스스로 존재하거나, 또는 자신의 개체와 개성을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이라는 것은 이 세계를 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환화(幻化)로서 세계를 보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스트레스와 아픔에 대해 그것의 일어남과 스러짐을 꿰뚫어 보고 관찰함으로써 삶을 능가하는 종교적 태도를 지닐 수 있다. 삶이 공인 것을 알기 때문에 더 큰 자유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삶의 각 순간, 즉 현재와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과정철학에서 말하듯이, 이 순간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연관성 속에서 존재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와 과거 순간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 그리고 세계 간에 가지는 연관성을 자각함으로써 더욱 충족적인 삶이 가능하다.
불교는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를 망라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윤리적 규범으로 계율을 가지고 있다. 그 첫째가 불살생이다. 이유 없이 다른 생명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한 특별한 외경심은 율장이나 계율문헌뿐만 아니라 불교 경전 속에서 설화와 가르침을 통해 풍부히 나타나고 있다. 다른 생명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대하듯이 다른 존재를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형태를 여섯 가지로 나누어 그것을 육취(六趣)라고 했다.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여섯 가지 형태의 존재 형태 중 하나일 뿐이고, 동물이 윤회 전생하는 것처럼 인간도 윤회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육취 중에서 '인간'과 '천상'은 다른 존재들에 비해 무척 행운의 상태이고, 과거의 선한 행위에 의해 현재 누리는 특권이지만, 이것도 영원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행위에 따라 계속 변해 갈 것이다. 따라서 현재 내가 인간이라 하여 축생보다 특별히 우위를 점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존재는 업의 결과라는 점에서 동등한 존재적 지위를 가진다. 더군다나 다음 순간의 나의 행위에 의해 다음 생의 존재 형태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나의 가능한 미래로서 축생이나 아수라에 대해, 그들의 불운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사찰에서 매 끼니 식사 후에 그릇을 닦은 물을 건물 밖에 내놓아 아귀에게 주는 의식은 이 같은 다른 존재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다.
초기 경전에 '음식소성(飮食所成)'이라는 표현이 있다. 나의 몸은 음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나는 내 몸과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음식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그 음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을 사랑한다. 혹시 내 몸에 상처가 났을 때 내 마음에는 고통과 슬픔이 솟구친다. 나의 망가진 몸을 슬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몸은 음식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나의 몸을 음식소성으로 보듯이, 나의 이기성 또는 자아중심주의를 넘어서서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점을 한 번 뒤집어서 보는 새로운 윤리관도 가능할 것이다. 이같이 연기(緣起)의 사상은 실천적 모델을 추출해 낼 수 있는 유용한 세계관을 제공한다.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 즉 안심(安心)을 실천하는 사람이 나를 둘러싼 다른 생명 개체들과 환경에 대해 자비로울 수 있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은수 교수(서울대학교 철학과)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미시건대학교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조교수를 역임했으며, 2004년 이래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공저로, 『마음과 철학』,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등 수 편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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