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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23  16: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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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란에는 연속기획 <우리 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란 제목으로 의사소통교육센터의 <세계고전강좌>와 2012년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2017년 개설된 <생명평화리더십> 원고를 번갈아 싣는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기 바란다. /편집자 

들어가기에 앞서…

삶의 기쁨을 만끽해야 할 청춘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취업과 생존에만 매달리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불평등과 불공정이 판치는 이 잘못된 세상에서도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살아갈 방법은 각자가 찾아야겠지만, 그 방법을 찾는 원론적인 길은 혹시 제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준비한 글입니다. 이 글이 여러분의 삶에 위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정복을 입은 경찰이 거리를 돌며 총각애의 머리 길이와 처녀애의 치마 길이까지 통제하던 지난 칠팔십 년대의 엄혹한 시절, 사람들은 군부에 짱돌을 들고 저항하면서 지금보다 조금은 더 공정하고 사람다운 세상을 꿈꾸었다. 이후 역행의 시절도 있었으나 대체로 정치 제도는 개선되었고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며 외적인 물질 세계는 한층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개발 붐으로 가만히 앉아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요행을 즐기고 경제 발전으로 별 걱정 없이 일자리를 얻었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지금의 청년들은 몇 겹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제도권 교육에 진입하자마자 입시 경쟁의 제물이 되어 학교와 학원을 오간 것도 모자라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낭만은 고사하고 취업 준비에 사활을 건다. 심지어 가정형편이 어려운 젊은이들은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스스로 마련해야 하기에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이런 가운데 연애, 결혼, 출산, 집, 인간관계,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포기한 세대라는 말까지 나온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고, 일을 해도 더는 계층 상승이 불가능한 비전 없는 사회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부의 편중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자본의 횡포는 더욱 교활해진다. 이런 상황은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개선해야 하지만 그 길은 요원해 보인다. 이런 세상이나 만들려고 지난 세기 불의한 권력에 피 흘리며 싸웠던 것이 아닌데, 어느새 우리에겐 이런 세상이 주어져 있다. 이 땅의 청춘들에게 참으로 미안할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래도 살아야 하는 걸. 아니 '살아내야" 하는 걸. 나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류 역사상 이제껏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대우받고 모든 것이 공정했던 낙원 같은 세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삶은 늘 부조리와 모순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면 어떡해야 할까? 이런 세상에 굴종하고 순응해야 할까? 아니다. 잘못된 세상 안에서도 올바른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 세상이 강제하는 대로 따르지 않고 내 힘으로 당당히 버티고 일어나 삶의 수레바퀴를 끌어야 한다는 말이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공부와 성공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적 부조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스러져 간 한 청춘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한스는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고, 빗나간 행동으로 어른들을 실망시킨 적도 없다. 한스 자신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즐기고 다른 친구들보다 앞서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그게 정말 한스가 원하는 일이었을까? 혹시 어른들의 욕망을 욕망한 것은 아닐까? 한스가 진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친구들과 놀고 토끼를 키우고 낚시를 하고 산책을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공부와 병행할 수 없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찾아 주는 것이 교육이어야 할 텐데 한스의 시대도 우리의 시대도 그렇지 못하다. 교육은 그저 세상에서 잘 사는 법을 가르치고 세상에 잘 스며드는 사람을 키우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한스는 자신이 원하는 일과 원치 않는 일 사이의 갈등으로 서서히 마음이 병들기 시작한다. 그게 겉으로 드러난 것이 두통이다.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은 어떤 식으로 건 신호를 보내기 마련이다.
한스가 지방의 수재로 뽑혀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기쁨은 잠시였다.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삶의 수레바퀴에 치이지 않으려면 수레가 내모는 대로 그저 열심히 앞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한스에게 급한 건 휴식과 따뜻한 위로였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주위엔 공부와 성적만을 강조하는 어른들밖에 없었다. 다행히 한스는 신학교에서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난다. 반항적이고 자의식 강한 소년 시인 하일너이다. 한스에게 이 친구는 지금껏 자신이 모르던 세계를 열어 준 보석 같은 존재였고, 하일너에게 한스는 경탄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외로울 때면 무작정 투정을 부리고 기댈 수 있는 친구였다. 둘은 속내를 터놓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삭막한 기숙사 생활을 이겨낸다. 둘의 우정은 학교생활에서 거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오래가지 않는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반항기로 똘똘 뭉친 하일너가 교사들의 눈 밖에 나면서 한스도 하일너와의 교제를 금지 당한 것이다.
결국 하일너는 학교를 떠나고, 그로써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친구를 잃은 한스는 공부에 흥미를 잃는다. 이제 한스에게 남은 것은 차갑게 식은 열정과 쓸쓸한 학교 건물뿐이다. 이젠 두통과 함께 심각한 신경쇠약 증세까지 찾아온다. 더는 버틸 힘이 없어진 한스도 마침내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반겨 주는 이는 없다. 오히려 사회의 낙오자라는 딱지만 붙는다. 심지어 이 꼴로 돌아오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느냐는 빈정거림까지 받는다. 성적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경쟁에서 낙오하고 탈락한 사람을 보듬어 주고 그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공동체의 임무일 텐데 말이다. 그 뒤 철공소에서 일하게 된 한스는 강가에서 미끄러져 목숨을 잃는다. 그게 자살인지 사고인지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그 지경으로 몰고 간 건 사회와 제도가 분명하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도권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순종을 가르친다. 기계적인 반복 작업에 유능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시스템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매일 꼬박꼬박 출근해서 불평 없이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며 지루한 반복 작업을 견뎌 낸다. 이렇듯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어른은 회사에 갇히고 아이들은 학교에 갇힌다. 얼마 전 온 나라를 슬픔과 분노에 젖게 한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가만히 있어라"는 말만 믿고 기다린 아이들이었다. 내재화된 순종 심리가 위기의 순간에 고스란히 발휘된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수레바퀴에 치이지 않고 스스로 벌떡 일어나 수레를 직접 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헤세의 또 다른 소설 『데미안』이 그 길을 제시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온전히 살아 보려 한 것밖에 없는데, 그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이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나는 나로 온전히 살아 보려고 했는데 그게 참으로 어려웠다는 얘기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 길이 단순히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고 무척 아름다웠노라 고백하기도 한다.
『데미안』에서 자기에게로 이르는 길은 다음의 유명한 말로 표현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새는 하나의 세계인 알을 깨고 나와야만 비로소 온전히 새가 된다. 그러나 그 세계의 벽은 단단하다. 웬만한 몸부림으로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에워싼 알을 깨고 나와야만 인간이 된다. 이 알은 어떤 세계일까?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세계다. 그것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모두 갖추어져 있던 그 세계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세계에 태어난다. 도덕, 종교, 정치, 문화, 법 할 것 없이 모두. 그렇다면 이 세계를 깨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세상의 목소리에 순응하지 말고 모든 것에 의심하라는 말이다. 사실 이 세계는 내가 함께 만든 것도 아니고, 내 동의하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저 태어나 보니 이런 세계가 주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모든 것에 의심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꼭 대학에 가야 할까? 결혼은 해야 할까? 번듯한 회사에 취직하고 화려한 집에 살고 멋진 자동차를 타고 다녀야 성공한 삶일까? 사람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세상이 내게 주입한 모든 것들에 의심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곧 의심한다는 뜻이다. 남들이 믿는 대로 믿는 것은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생각 좀 해!"라는 말에는 왜냐고 묻고 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왜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스스로 의문을 품으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자신을 빼고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야만 나는 인간으로서 존재한다. 의심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사상가 함석헌 선생은 생명의 본질을 '대듦'이라고 말했다. 이 역시 데카르트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대체로 사춘기 무렵에 처음으로 대들기 시작한다. 부모에, 학교에, 사회에. 왜 그럴까? 처음으로 내 속에서 기존의 모든 것들에 반발하는 '내'가 움트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성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자 생명 원리다. 즉 생명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들에 대들고 반박하고 저항하면서 성장한다. 식물의 예를 들어 보자. 씨앗이 하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씨앗에서 껍질을 뚫고 줄기가 나온다. 여기서 줄기는 씨앗과 같은 존재일까? 아니다. 생긴 것도 다르고 질적 내용도 다르다. 그런 면에서 줄기는 씨앗의 부정이다. 씨앗으로 살라는 명령에 저항하고 대들었기에 줄기가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은 줄기에서 나오지만 결국 줄기의 부정이다. 외형도 내면도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꽃이 줄기에 순응해서 줄기로 살라는 강요에 굴복했다면 꽃이 나올 수 있었을까? 꽃은 줄기를 부정하고 대들었기에 꽃이 되었다. 이처럼 세상 만물은 기존의 것들에 의문을 품고 대들고 저항하는 가운데 발전한다. 세상의 모든 운동 법칙이 그렇다.
물론 이렇게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냥 세상에 순응하며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편하다. 그러면 굳이 세상과 불화하고 자기 자신과 싸우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우린 왜 이 길을 가야 할까? 한 번뿐인 삶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이 삶을 정말 내 뜻대로 한번 살아 보고 싶다. 세상의 노예가 아닌 내가 주인으로서 내 삶을 틀어쥐고 내 생각대로 살아 보고 싶다. 세상에 대들고 세상의 고정관념과 맞서 싸우다 보면 어느새 '내'가 형성되고, 그 '내'가 가리키는 대로 살아 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 길에 정답은 없다. 각자 알아서 자기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런 삶이 아름답다!
                                                                                                               박종대(전문번역가)
<필자 소개>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독일 쾰른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 사람이건 사건이건 늘 표층보다 이면에 관심이 많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자기를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는 제대로 된 이기주의자가 꿈이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위대한 패배자』, 『만들어진 승리자들』 등 10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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