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 인문학진흥사업단≫에서 추진하는 <융복합 인문치료 전문가 양성팀>, <융복합 문화유산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융복합 문화예술 콘텐츠 전문가 양성팀>, <글로벌 동아시아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영미 역사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등 6개 팀의 해외 연수가 겨울 방학 동안 실시됐다. <원대신문>은 각 사업팀의 연수 성과를 공유하고자 한다. /편집자

 

▲ 서한남월왕박물관 관람을 위해 입장하는 학생들

 

 

 

 

 

 

 

 

 

 

▲ 홍슈취앤 기념관 전경

 

 

 

 

 

 

 

 

 

 

≪프라임인문학진흥사업단≫의 <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이 출범하기 이전부터 인문대학 사학과(현 역사문화학부 사학과)에서는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 해외역사현장학습을 진행하였다. 2016학년도 해외역사현장학습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6월 말 출발로 예정되어 있었다. 애초 계획한 답사 대상 지역은 우리가 흔히 만주라 부르는 중국 동북 3성 지역이었다. 프라임사업 예산집행이 늦어지게 되면서 해외역사현장학습 출발 일정도 12월 말로 변경되자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동절기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만주지역을 답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잘 알고 있는 터라 적절한 변화가 필요했다. 이에 답사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참가자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 수 있는 따뜻한 남쪽 지역을 우선 대상지로 정하였다. 그 결과 선택한 곳이 40명의 참가 학생과 4박 5일을 함께하며 많은 학습의 기회를 가졌던 광저우와 홍콩지역이다.
중국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광저우는 중국 문명의 중심지와는 거리가 먼 지역이다. 화려한 현대적 도시로 각인된 홍콩은 더더욱 역사현장학습의 대상지로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을 택한 것은 12월에도 따뜻하다는 현실적 고려도 없지 않았지만, 두 지역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예년과 달리 일정과 대상 지역이 늦게 정해지면서 사전 준비를 위한 작업도 시간을 다툴 수밖에 없었다. 우선 40명의 참가 학생을 10조로 나누어 과제를 주었다. '광동무역체제와 청말 대외무역', '한국독립운동과 광저우', '홍콩의 역사 : 할양에서 반환까지' 등 광저우와 홍콩을 중심으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주제를 정하여 요록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역사현장학습을 마친 뒤에는 요록을 기초로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더하여 정리한 결과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콘텐츠 양성사업팀'의 이름에 맞게 각종 시청각 자료를 활용한 콘텐츠를 제작하여 경진대회에서 발표하도록 하였다. 학생 모두가 참여한 일련의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으로도 이번 해외현장학습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 광동혁명역사박물관에서 찍은 단체 사진

사전 준비를 마친 일행 45명은 12월 19일 인천공항을 출발, 네 시간여의 비행 끝에 광저우 바이윈(白雲)공항에 도착했다. 중국을 반 백번 정도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입국 수속에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은 여전하였다. 첫날 예정된 일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찾은 광저우, 12월임에도 여전히 가로수는 푸르고 곳곳에 꽃이 활짝 피어 있어 이곳이 따뜻한 남쪽임을 실감케 하였다. 첫날 첫 번째로 찾은 곳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서한남월왕박물관(西漢南王博物館)이다. 남월왕국은 기원전 203년부터 한 세기 가까이 현재의 광동성 전역과 광서성, 복건성 일부 및 베트남 중북부까지 판도에 넣었던 독립왕국이다. 이로 인해 아직까지도 중국과 베트남이 서로 자기 역사의 일부라고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광저우는 세계제국인 당나라가 강성하기 이전부터 해상실크로드의 중심으로서 세계와 중국을 잇는 관문이었다.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거쳐 중국에 도착한 모든 선박의 첫 번째 기항지였기에 외래종교 중국전파의 시발점이기도 하였다. 지금 현재도 광저우 구시가지 곳곳에 남아 있는 그 흔적을 찾는 것이 첫날 오후 일정이었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육상실크로드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중국적 불교를 상징하는 선종의 개창자인 인도 출신의 달마(達磨)는 바닷길을 통해 중국에 들어왔다. 그가 처음 밟은 중국 땅이 광저우다. 달마가 북상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화림사(華林寺)는 광저우의 여타 유명 사찰에 비하면 초라하다 할 정도로 작다. 그럼에도 후일 그가 개창한 선종은 중국불교는 물론 한국불교의 주맥을 이루었으니,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했다고 해야 할까?
광저우에는 불교 외에도 다양한 외래종교 관련 유적과 유물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25년의 공사 끝에 1888년 완성된 석실성심대교당(石室聖心大敎堂)은 아시아 최대의 석조성당으로 유명하다. 중국의 전통문화가 철저히 부정되었던 문화대혁명 기간 광저우의 거의 모든 종교시설도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전체가 화강암으로 지어진 석실교당은 워낙 단단하여 파괴를 면하였다 한다. 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영국인 모리슨(Morrison)과 그가 배출한 첫 중국인 목사 량파(梁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이 광저우다. 이슬람교와 광저우의 관계 역시 특별하다. 무함마드가 파견한 선교사가 중국에 첫발을 디딘 곳도 광저우다. 빠듯한 일정 탓에 광저우에 남아 있는 이슬람교 관련 유적 답사는 생략하고 근대 동서양 무역의 번성을 상징하는 13행(行) 거리를 둘러보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감했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까지 근대중국을 관통한 화두는 개혁과 혁명이었다.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던 유신개혁파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 일거에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가 홍슈취앤(洪秀全)과 쑨원(孫文), 격동의 시대를 주름잡았던 이들의 고향은 모두 광저우에서 반경 1백 킬로미터 이내의 거리에 있다. 이번 해외역사현장학습의 대상지를 광저우로 정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답사 이틀째, 홍슈취앤의 고향 화뚜(花都)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싼위앤리(三元里)를 찾았다. 아편전쟁 시기 자발적으로 무장한 민중들이 영국군과 맞서 싸웠던 이곳은 민중주도 대외항쟁의 역사현장으로 알려져 방문객이 적지 않다. 크지 않은 기념관 내부에는 당시 민중들이 사용했던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가장 선진적인 무기를 든 영국군과 구식 무기를 들고 맞서다 희생된 민중들은 자신들이 왜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는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알기나 하였을까?
과거에 네 번 연달아 낙방한 홍슈취앤이 시험을 보기 위해 광저우를 오가느라 온종일 걸었을 길을 반 시간만에 달려 그의 고향집에 도착했다. 반도(叛徒), 기의(起義), 운동(運動), 혁명(革命) 등 시대에 따라 중국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태평천국의 성격에 대한 평가는 변해왔다. 모두가 평등한 태평스러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홍슈취앤의 이상이야 나무랄 것이 없지만, 이로 인해 수천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오직 인민만이 세계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라 했던 마오쩌뚱(毛澤東)의 말이 생각난다. 그의 유산을 물려받은 중국공산당이 현재 중국 대륙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홍슈취앤과 태평천국에 대한 평가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진다.
화뚜를 출발해 캉유웨이의 고향 포산(佛山)으로 가는 길, 분명 왕복 8차선 고속도로인데 갓길로 다니는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나에게는 익숙한 광경, 하지만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이것이 현재 중국의 또 다른 모습이다.

                                                                                김영신 연구교수(프라임인문학진흥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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