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희 교수(국어교육과)

 일용할 저녁 양식을 식탁 위에 차려 두고,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제 방에서 고개를 묻고 뭘 하느라 정신이 없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신통치 않자, 음을 약간 높이긴 하였지만 여전히 친절하고 다정한 아빠의 음색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목소리로 다시 불렀다. 자극이 자극적이지 않나 보다. 반응이 무색무취다. 목소리의 볼륨 조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친절함과 다정함은 지켜내야 한다. 그래야 나다운 거니까. 그리고 다시 불렀다. 반응이 감지된다. 드디어 아이가 움직인다. 큰 마찰 없이 밥상 대면을 할 수 있게 된 데에 내심 만족스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자극과 반응의 주체가 뒤바뀌어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방에서 식탁까지 5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움직인 아이의 말 한 마디가 나를 5살배기 아이보다 못한 아비로 만들어버렸다.
"아빠, 내가 뭘 하고 있잖아. 왜 아빠는 기다리지 못하는 거야?"
술 좀 마시지 말라는 상투적인 잔소리를 빼면 아이에게 야단을 들은 건 처음이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지루함, 따분함, 짜증? 아니면 설렘, 아련함, 걱정스러움?
어쩌면 우리는 기다리는 방법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바쁜 세상을 살다 보니 빠름에 익숙해져서 조금이라도 지체되는 반응에 대해 조급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지병을 앓고 있다. 지병의 원인은 기술의 발달이다. 삐삐가 출생 신고를 하면서 기다림은 수명이 짧아지기 시작했고, 휴대전화가 인큐베이터에서 빠져나오면서 기다림은 숨을 헐떡거릴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만들어낸 도구들이 우습게도 '덜' 인간답게 살게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 보니 기다려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보다 기다리지 못해 발생될 수 있는 문제들이 훨씬 많아졌다.
기다림은 상대만을 위한 배려는 아니다. 나타나지 않는 이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헤아리는 것, 상대가 이 시각 나와의 만남 대신에 선택한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하는 것, 그와의 관계에서 나를 반성하는 것, 짜증이 걱정스러움으로 변화하는 감정을 경험하는 것 등등 기다림이 인간에게 선사한 감정의 내적 순화라는 고귀한 가치를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나를 위함일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책 표지 안쪽의 빈 페이지 같은 여백이다. 그 여백에 대해 허기를 느낄 필요는 없다. 새로 영입한 책 한 권에 대한 느낌을 소략하여 적듯이 누군가에 대한 아련함을 기록하는 것이 기다림이다. 빈 페이지는 대부분 다른 색을 띤다. 기다림도 다른 색의 마음으로 남기는 것이 일상의 조화일 수 있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에서 얼른 벗어나는 길은 사과이다. 생각이 끝났으면 행동은 재빠를수록 좋다. 입을 연다. 아이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문장을 만들어 공기에게 전달시킨다.
"아빠가 미안해. 다음에는 기다리려고 노력할게."
친절하고 다정한 아빠는 개뿔, 자신의 앞가림이나 잘하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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