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5월 27일 발행된 <원대신문> 542호에 우리대학 총학생회 주최로 '광주 항쟁 계승 실천대회'를 1987년 5월 18일에 열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학생들이 조직한 민주화 발전 추진위원회의 발대식과 투쟁선언문을 낭독한 후 모인 학생들은 정문과 후문으로 나뉘어 시위를 진행했다. 그러나 경찰의 최루탄 발포로 정문에서의 시위는 저지됐고, 저녁까지 300여 명의 학생들이 자리를 지키다가 자진 해산함으로써 첫 번째 실천대회는 마무리됐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날도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과의 대치로 중간에 해산됐다. 네 번째 실천대회에선 임균수 열사의 행적 보고와 추모, 그리고 모금운동이 이뤄졌다. 이어 민주화 발전 추진위원회의 지휘로 600여 명의 학생들이 도서관 앞에서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실천대회를 진행했다.
 그러나 교내에 들이닥친 경찰(88타격대)은 학생회관에 침입하여 최루탄을 쏘면서 학생들을 구타했고, 연행해갔다. 이 모습을 본 학생과 시민들은 분노했고, 시위에 합세했다. 경찰의 구타와 연행으로 많은 학생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연행당한 학생들은 그날 당일 풀려났지만, 경찰의 구타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사 옆에는 임균수 열사 추모비 제막식 기사가 눈에 띈다. 그날 제막식은 2부에 걸쳐 진행됐으며, 1부는 추모사업회 결과보고로 진행됐다. 2부에선 제막식, 추모제, 진혼굿, 노래마당을 가졌다.
 광주 출생인 고 임균수(1959. 8. ~ 1980. 5.) 열사는 그 당시 우리대학 한의대 본과 2학년에 재학 중 광주로 내려가 시위대에 합류했고, 민주주의를 외치다 계엄군의 총에 의해 산화했다. 당시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이렇게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나자 우리대학은 임균수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임균수 광장'을 세웠고 그 광장에 추모비를 세웠다. 현재 임균수 광장은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추모비도 본래 세워졌던 자리에서 벗어나 공과대학 옆 잔디밭으로 옮겨졌다.
 추모비에는 "한방의 명의 한방종합병원 설립을 그리며 열심히 살아오던 그대여. 아! 아깝도다. 그 인물!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아 고이 잠드소서"라는,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며 남긴 임균수 열사의 아버지의 말이 새겨져 있다. 임균수 열사의 아버지 임병대 씨는 보상금과 사재로 장학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매년 우리대학에 100만 원씩을 기탁해 왔고, 작년부터는  200만 원을 기탁하고 있다.
 지난 18일에 열린 5.18 기념식에서는 9년 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됐다. 지난 기념식에서는 합창단이 부르는 합창으로만 진행됐었다. 제창과 합창의 논점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할지 몰라도 제창을 통해 5.18 민주화운동의 뜻을 다시 떠올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에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 모두가 감회 어린 눈물을 흘리는 장면만 봐도 그 차이는 분명해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라고 제창의 의지를 강하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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