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 인문학진흥사업단≫에서 추진하는 <융복합 인문치료 전문가 양성팀>, <융복합 문화유산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융복합 문화예술 콘텐츠 전문가 양성팀>, <글로벌 동아시아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중국 역사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영미 역사 문화 콘텐츠 전문가 양성사업팀> 등 6개 팀의 해외 연수가 겨울 방학 동안 실시됐다. <원대신문>은 각 사업팀의 연수 성과를 공유하고자 한다. /편집자 

 

▲ 황포군관학교 입구

 

▲ 유물 설명에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

 황페이홍(黃飛鴻)과 예원(葉問), 홍콩 무술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두 사람의 고향 역시 포산이다. 두 사람을 기리는 조묘(祖廟)박물관을 둘러본 뒤 캉유웨이기념관에 도착했다. 한적한 시골마을, 따스한 햇살 아래 여유로운 모습의 정원과 연못을 옆에 두고 있는 기념관은 주인공의 명성에 비해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멀리서 찾아온 뜻을 전하였더니 고맙게도 평소에는 좀체 개방하지 않는다는 기념관 옆 생가를 둘러볼 기회를 주었다.
 1891년 캉유웨이는 광저우에 만목초당(萬木草堂)을 열었다. 이곳에서 한때 1백여 명에 달했던 제자들을 가르치는 한편 변법운동의 이론 기초를 세우는 데도 주력하여 신학위경고(新學經考)와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두 편의 핵심 저작을 완성하였다. 그의 사상과 이론은 과학적이지는 못하였지만 당시 주류 지식계에 강렬한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유재산이 없고 계급도 없으며 모두가 평등한 인간낙원인 대동사회의 건설을 이상으로 삼았던 대동서(大同書)를 출간한 것도 광저우에서였다. 만목초당이 숙소 가까이에 있었음에도 찾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중국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광저우의 위치는 혁명 근거지로 요약된다. 근대 중국 최초의 혁명 결사를 조직한 쑨원이 청나라 타도를 기치로 내걸고 첫 번째 무장 거사를 벌이고자 했던 곳이 광저우다. 신해혁명 후에는 북경 정부를 장악한 군벌을 물리치기 위해 세 차례나 광저우에 혁명정부를 조직했다. 쑨원의 유훈을 받들어 국민정부가 처음 탄생한 곳도, 장제스(蔣介石)가 북벌출정식을 거행했던 곳도 광저우다.
광저우는 국민혁명의 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중국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가 1923년 광저우에서 열렸다. 중국공산혁명의 시발지이자 성지인 광저우에는 곳곳에 이를 기념하는 시설물이 남아 있다. 기의열사능원 안 혁명역사박물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지 연구자의 특강, 인솔 교수들과 박물관 관계자들이 간담회를 갖는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일정을 소화했다.
 중국에서 펼쳐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서도 광저우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쑨원이 광저우에 성립한 호법정부(護法政府)가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처음 승인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쑨원의 명에 의해 설립된 국립중산대학은 김성숙, 김산, 이활 등 수많은 한국청년이 공부했던 곳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저우에서 업무를 보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광저우의 특별한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중국당국이 세운 중조인민우의정(中朝人民友誼亭)을 둘러본 뒤 한국청년들이 큰 뜻을 품고 입교했던 황포군관학교로 향했다.

▲ 광저우 혁명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특강 모습

 중국혁명의 가장 큰 장애물인 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한동안 쑨원은 또 다른 군벌과 손잡는 정책을 고집하였다. 세 차례 혁명정부가 모두 실패로 마감되자 그 원인을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혁명군대의 부재로 인식한 쑨원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장제스를 설립준비위원장에 임명하였다. 1924년 6월 16일 개교기념식을 가진 이 학교는 광저우에서 40여 리 떨어진 황포에 자리하였기에 황포군관학교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황포군관학교 설립 무렵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 등은 의열투쟁 노선의 재검증과 자기성찰을 통해 자기혁 신을 우선 과제로 정하고 단체로 황포군관학교 입학을 결정하였다. 1926년 봄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교한 김원봉 등 한국청년들은 조국 광복과 민족 해방의 궁극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이론과 실제의 교육을 받았다. 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군에 복무한 한국청년이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졸업생은 독자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한국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후일 한국광복군의 한 축을 이루게 된 조선의용대의 핵심 인물이 대부분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중국혁명과 한국독립운동의 긴밀한 관계를 엿보게 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길다는 다리를 지나 후먼(虎門)으로 향한다. 하루 12만 대의 차량이 오간다는 다리 밑이 주강 하구다. 지금으로부터 1백 수십 년 전 아편을 가득 실은 정크선이 오가던 그 뱃길로 지금은 10만 톤 급의 대형 화물선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후먼은 우리의 행정구역으로 치면 읍에 상당하는 진(鎭)이지만 상주인구가 60만을 넘는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틀간 머물렀던 광저우와는 사뭇 달라 약간의 촌스러움이 묻어 있다. 이곳을 찾은 것은 린쩌쉬(林則徐)가 2만여 상자의 아편을 소각하여 아편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아편전쟁 관련 유적과 기념관은 광저우와 그 주변 여러 곳에 널려 있다. 그 가운데서도 후먼의 아편전쟁기념관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에 세워져 있고 규모도 가장 크다. 기념관 내부를 참관하고 나오니 아편소각지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는 구조물이 보인다. 책에서 배운 바로는 바닷가 백사장에 웅덩이를 파고 석회와 섞어 바닷물로 아편을 용해시켜 버렸다던데, 수영장과 흡사한 모양의 아편소각지는 바다에서 꽤 떨어져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역사현장학습이 필요한 이유와 까닭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목적지 홍콩으로 가는 길에 선전(深 )을 경유했다. 계획도시답게 모든 것이 광저우나 여타 중국 대도시와는 확연히 다르다. 출입국 수속을 위해 뤄후(羅湖) 역에 도착했다. 공항이 아닌 역에서 출입국 수속을 하는 것도 학생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다. 익산역사와 비슷한 건물의 북쪽 입구로 들어가 남쪽으로 나오면 홍콩이다. 출국 심사대 뒤편 벽에는 홍콩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정량 이상의 분유나 세제 등을 들여와서는 안 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재작년 마카오에 갔을 때 중국인들이 떼로 몰려와 왓슨스 매장의 생필품을 싹쓸이해가는 광경을 목도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정치 성향과는 상관없이 대부분의 홍콩인과 마카오인이 중국인을 싫어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고문이 아닐까 싶다.
뤄후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반 시간이면 주롱(九龍)에 도착한다. 여섯 번째 찾은 홍콩, 너무나 많은 사람들 때문에 불편했던 기억 그대로 가는 곳마다 인파로 북적인다. 홍콩 일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라지만 본격적인 역사의 시작이 얼마 되지 않은지라 홍콩역사박물관의 전시물도 근대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다. 아편전쟁 이후 한 세기 반이 넘도록 중국 내지와는 다른 체제가 유지되었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만 20년이 되어간다. 현재는 고도의 자치 및 행정·입법과 사법권을 향유하고 있지만 1국 2체제가 종식되는 30년 후 홍콩의 모습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땅은 작지만 볼 것은 많은 홍콩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귀국을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름 이번 해외현장학습을 정리해 본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 지나놓고 보니 만족보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임시정부가 한때 청사로 썼던 광저우 바이위앤(栢園)을 찾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김영신 연구교수(프라임인문학진흥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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