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겨울이었을 거다. 중국 심천에서 서커스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 기이한 모양으로 몸을 꺾고,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활짝 웃었다. 보는 내내 너무 신기해서 박수를 쳤다. 아동학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공연이 끝난 직후였다. 아이들의 곡예 앞에서 관광객들이 박수를 치고 깔깔거린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 대사가 있었다. "얼마나 맞았으면 저렇게 잘 할까?" 1993년 개봉작인 <패왕별희>이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25년부터 1977년까지의 중국이다. 당시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분단-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을 지나는 동안, 중국은 중일전쟁과 공산당 집권-문화대혁명을 지나고 있었다. 이야기는 데이(장국영)와 샬로(장펑이)가 마지막 경극을 하면서 시작된다. 텅 빈 무대에서 그간의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 기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데이의 개인사인 한편 중국 자체의 역사이기도 하다. 거시적 역사가 한 명의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인 <박하사탕>(1999)과도 닮았다. 그러나 '경극'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전통 문화를 제시한다는 것과,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에 더 노골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과거 회상의 처음은 어린 데이가 처음으로 경극학교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매춘을 하는 데이의 엄마는 아들을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자 경극학교에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경극학교에서는 데이가 육손이라는 이유로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 이에 엄마는 천으로 데이의 눈을 가리고 손가락을 강제로 잘라버린다. 데이는 결국 오손이 되어 경극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창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곳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때 데이를 위로해주는 유일한 소년이 샬로다. 선생들의 갖은 구타 속에서 둘은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하루는 구타를 견디지 못한 아이들이 단체로 극단에서 도망쳐 나온다. 거리를 가로질러 뛰다가 우연히 경극을 보게 되는데, 그때 한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얼마나 맞았으면 저렇게 잘 할까?" 그 자리에서 경극 배우들의 연기에 매료된 데이는 구타를 각오하고 다시 경극학교로 돌아간다.
 이후 데이는 여자인 '우희'역을 맡게 되고 샬로는 남자인 '패왕'역을 맡게 되는데, 데이가 배역에 적응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남자인 데이는 여자를 연기하는 데에 어색함을 느끼며 대사를 반복적으로 틀린다.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 계집아이도 아닌데……" 선생들은 그런 데이에게 뜨거운 담뱃재를 입에 쑤셔 넣어버리는 등 가혹한 체벌을 행한다. 결국 데이는 그 과정 속에서 대사를 틀리지 않고 능숙하게 말하게 된다. "나는 본래 계집아이로, 사내아이도 아닌데……" 이것을 기점으로 데이와 샬로는 중국 내 최고의 경극배우로 성장한다.
 성인이 된 샬로는 창녀인 쥬산(공리)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약속한다. 이에 데이는 쥬산에게 냉랭하게 대하는 한편 샬로에게는 가지 말라고 분노한다. 이때 나온 대사가 "1분 1초라도 함께하지 않으면 그건 평생이 아니야!"이다. 샬로는 데이가 갖고 있는 질투의 감정을 두고 경극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충고한다. 실제로 데이는 현실에서도 자신의 배역인 '우희'에 동화된 듯한 모습을 보이며, 이는 곧 여성적인 성격과 양성애적인 취향으로 드러난다.
 갈등은 세 인물 사이의 감정싸움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인해 국가는 아수라장이 돼 있었으며, 쥬산은 친일파로 몰린 샬로를 찾으러 갔다가 구타를 당해 유산을 하게 된다. 1949년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중국은 공산화되고, 경극도 위기에 놓이게 된다. 공산주의와 문화예술 사이의 이념적 갈등이 그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문화대혁명까지 겪게 되면서 경극을 비롯한 전통문화가 인민재판에 오르는 한편, 데이-샬로-쥬산도 개인으로서의 위기를 맞게 된다.
 한때 <패왕별희>는 중국내에서 엄격한 상영 제한을 당했다. 중국당국은 그 이유로 동성애와 자살 미화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문화대혁명을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모택동과 공산당을 비판하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현재는 아무 제한 없이 상영되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국가선전용으로 만들어졌던 여타 중국영화들과 비교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품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나도 감히 <패왕별희>가 중국 최고의 영화라고 꼽는 바이다. 뚜렷한 주제 의식과 아름다운 미장센, 버릴 것 없는 대사도 최고이지만,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였던 장국영과 공리의 훌륭한 연기력도 감탄과 감동을 자아낸다. 본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두 배우의 눈빛은 방금 본 것처럼 여전히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장국영과 공리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보았는데, 그래도 <패왕별희>를 제칠 작품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한편, 지난 3월에 재개봉을 한다는 기사가 떠서 며칠간을 기대에 부푼 채로 지냈다. 포스터도 새로 뽑고 예고편도 새로 나왔기에 확실히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개봉일이 되자 취소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공식적인 보도도 없이 재개봉 날짜를 슬그머니 지워버린 것이다. 사드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수입배급사 사정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사실 이런 걸 다 떠나 극장에서 장대한 스크린으로 볼 수 없다는 점만이 아쉽게 느껴졌다. 나중에라도 재개봉을 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와 똑같이 곱씹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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