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병현 기자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누차 배웠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의 차이를. '비교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않을 때'는 다르다고 말하고,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났을 때'는 틀리다 말한다. 이 두 단어를 표기상에서 헷갈려 오타를 낼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것을 틀리다고 낙인찍는 사상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발생한 백인우월주의 폭력시위처럼 말이다.
버지니아주 백인우월주의 폭력시위는 백인 극우 우월주의자 시위대 수천 명이 우파 통합집회를 개최하면서 일어났다. 시위대는 KKK 마크를 전면에 걸고, 신나치 마크를 내세우며 "보수여 집결하라, 인종 다양성이란 사기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이어갔고 결국 폭력시위로 번져 현재까지 3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치는 상황에 달했다. 또한, 백인우월주의 시위에 반대하는 다른 시위대를 백인이 자동차로 받아버리면서 유혈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트럼프는 뒤늦게 "인종차별주의는 악(evil)"이라고 말하며, "인종차별적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은 누구든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버지니아주 사태를 '여러 편(many sides)'의 책임으로 돌려 여론을 더욱 들끓게 했다. 오바마가 백악관을 떠나고 트럼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자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찰들 또한 대거 늘어났다. 이유 없이 운전 중인 흑인을 불시 검문한다든가 총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은 흑인을 향해 총을 발포하는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현대를 구분 짓는 시기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때부터를 현대라고 한다면 과거에는 다름과 틀림이 확고하게 정립돼 있었다. 물론 그 의미는 다르지만.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유대인과 아리아인,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 비교가 되는 서로가 같지 않은 상태는 항상 존재했다. 여성과 흑인과 유대인과 장애인을 틀리다고 보는 시선이 과거에는 당연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다름과 틀림을 어떻게 봐 왔을까?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유교 사상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일을 가두는 틀이 존재해 왔다. 맹모삼천지교, 신사임당처럼 자식 교육과 내조에 힘쓰는 여성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뽑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양반, 안주인 같은 대명사가 쓰이곤 한다. 최근에서야 그 틀이 벗겨지고 있지만 아직 미세하게나마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을 구분 짓는 잔재가 남아 있다. 이외에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차별 문제가 우리나라에서 벌어질 위험도 적지 않다. 종교와 인종이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일부 기독교 세력은 타 종교에 배타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종교는 이단으로 취급되고 기독교를 강요하는 극우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피켓을 들고 믿음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인종 문제 또한 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급감하면서 외국인 노동자가 대거 유입되고 있다. 이는 좋은 방향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앵그리 화이트(angry white)를 초래한 역차별 우려도 유념해야 한다. 미국 내에서 백인이 흑인을 무시하는 것처럼 한국인이 동남아시아인을 무시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다름과 틀림을 지속해서 교육받았다. 그리고 과거를 답습하며 소수가 가하는 차별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지켜봤다. 차별을 핑계로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건 가해자 옆에선 방관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다르고 틀린 지 자각하기 위해서라도 기존에 알고 있던 오답이 정말 오답인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오병현 기자 qudgus0902@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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