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폭발사건 당시 사진

  S는 화가 많이 났다. 집에 못 들어간 지 나흘째. 이리역에서 40시간째 대기 중이었다. 피로와 긴장으로 S의 눈은 잔뜩 충혈되었다. 오늘 밤도 기관차 배정은 없었다. 항의를 했지만 묵살되었다. 급행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행료'란 힘 있는 자에게 은밀하게 건네는 '웃돈'. '빨리빨리'가 구호처럼 퍼지던 박정희 정권 말기였다. 사회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돌아갔고 암암리에 주고받던 '급행료'는 관행이었다.

 S의 한국화약(현 한화그룹) 호송원 생활은 배팅볼 같았다. 배트를 휘두르는 대로 전국을 떠돌았다. 이번 임무는 좀 심했다. 30톤의 화약이 뇌관과 섞여 있는 기차 화물칸에서 나흘째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S는 화약이 가득한 화물칸을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걸러 배가 출출했다. 얇은 가을 옷이 선듯하게 느껴지는 가을밤이었다.
 S는 이리역 앞에 즐비한 작고 허름한 대폿집 중 한 곳으로 갔다. 드럼통을 개조한 둥근 양은식탁 위에 나물과 두부 김치가 전부였다. 오랜 긴장과 배고픔으로 굳어진 몸에 술이 들어가니 졸음이 밀려왔다. 취기에 비틀거리며 S는 화물칸 한쪽에 대충 자리를 펴고 누었다.
 S의 잠을 깨운 것은 매캐한 냄새였다. 켜 두었던 촛불에서 불이 옮겨붙었던 것. 불은 화약상자로 번지고 있었다. S는 침낭을 들어 불을 끄기 시작했다. 불똥이 튀자 불은 오히려 크게 번졌다. 침낭에도 불이 붙자 S는 도망쳤다. 개찰구 앞에 이르러서야 S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비어져 나왔다. "불이야~"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경이었다.
 당시 인구 13만의 이리 시민들은 TV가 있는 집에 모여 축구경기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30톤의 화약이 연이어 폭발했다. 피해 규모는 단군 이후 최대였다. 이리역 반경 1Km 이내의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이 부서졌다. 폭발음을 동반한 충격파가 거리를 휩쓸었고, 바람 끝에 큰불이 났다.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서울에 사는 친지의 안부를 묻는 이도 있었다. 전쟁이 난 줄 알았기 때문. 이재민은   1천 674세대, 7천 873명에 달했다.
 소설가 박범신은 『더러운 책상』에서 이리역폭발사건 이후 비정해진 현실을 이렇게 묘사했다. "철인동 사창가 언덕이 인구가 젤 조밀했던 곳이었어요. 색시들이 어떤 사람은 천 명도 훨씬 더 됐을 거라고도 하고요. 한순간 모든 것이 폭삭한 거예요. 고향도 모르고, 가족도 없고, 그러니 어떻게 사망확인이 됩니까. (중략) 익산시가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 다 폭파사건 덕분이라고 봐요. 왜정 때부터 있어온 삼남 최대의 사창가가 하루 한순간 사라진 것도 그렇구요."
 이리역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순교지였다. 이리역폭파사건 이전인 6.25전쟁 때도 이미 큰 수난을 겪었다.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출격한 미공군 B-29 편대는 이리역 상공을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왔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미군의 구호물품인 줄 알고 손을 흔들었던 사람들 위로 폭탄이 떨어졌다. 곧이어 아비규환, 500여 명이 부상당했다. 1950년 7월 11일, 공교롭게도 이리역폭파사고와 같은 11일에 벌어진 일이다.
 이리역폭파사건으로 이리시의 근대는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이리시는 농업도시에서 공업도시로 변화 중이었다. 이리수출자유지역으로 모여든 농민들은 공장근로자가 됐다. 농촌엔 빈집이 늘어가고 도시엔 사글셋방이 넘쳐났다. 모든 게 '빨리빨리' 변했다. 사고가 나자 가수 하춘화를 업고 응급실로 뛰어갔던 이주일은 코미디언으로 데뷔했고, 가왕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막 국민가수가 되었다. 사실 이 사건은 소시민 S(신무일)의 개인적인 실수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빨리빨리'를 추구하던 개발근대화의 욕망이 고름처럼 터졌던 것. 이리역 폭발사건 이후에도 소시민들은 배팅볼처럼 기차를 타고 어디든지 달려가야만 했다. (다음호에 계속)
 
박태건 교수(교양교육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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