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탄핵에 반대하고, 찬성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로 올라갈 시간이 없다는, 이미 많은 사람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핑계가 다 떨어졌을 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몇 날을 몸서리치고 나서야 윤동주 시인이 느꼈을 부끄러움을 손톱만큼 이해할 수 있었다.

 <동주>의 주인공인 윤동주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시인이지만,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에 누구보다 괴로워하고 울분한 사람이었다. 그의 곁에는 북간도에서 같이 자란 이종사촌 송몽규가 있어 힘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비교하면 여럿 월등한 면모를 보였다. 「술가락」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송몽규와 시인을 희망하며 등단을 바랐지만 그렇지 못한 윤동주. 시대 앞에 확고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윤동주와 일제의 압박에 온몸으로 몸부림친 송몽규. 같이 자랐지만, 확연히 다른 이 둘을 놓고 보면 송몽규를 주인공으로 앞세워 영화 제목을 <몽규>로 짓는 게 맞는 듯하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은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와 윤동주의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조선인 학생들의 규합에 앞장선 송몽규와는 반대로,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둘 침전되는 세상에서 쉽게 시를 쓰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한 윤동주. 우리는 윤동주와 닮아있다.
 연희전문대(현재 연세대학교)에서 알게 된 이여진은 정지용 시인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에 윤동주는 이여진의 도움을 받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정지용 시인을 만나게 되고, 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일본 유학을 가는 게 부끄럽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러자 정지용 시인은 "윤 시인,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라는 푸념 같은 조언을 해준다. 이는 일제강점기에만 속하는 말이 아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 깊숙한 위안으로 다가온다. '부끄러움의 미학'이라 일컬어지는 윤동주 시인의 시 또한 이와 맞물린다.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은 떳떳하고, 힘없는 자들이 부끄러워하는 건 옛날이나 요즘이나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울 수 있다.
 정지용 시인의 말에 용기를 얻은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일본 대학에 들어갔다. '히라누마 도쥬'라는 이름으로. 둘은 함께 대학 입시 공부에 임했지만, 송몽규가 교토제대에 입학한 반면 윤동주는 교토제대에 낙방하고 도쿄에 있는 릿교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군부가 도쿄 사립대학에 똬리를 틀면서 윤동주는 교련 수업을 거부했단 이유로 삭발을 당하고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에 편입하게 된다. 교토에서 송몽규와 만난 윤동주는 뜻을 같이하자고 제안하지만 둘은 겉으로만 함께일 뿐이었다. 송몽규는 교토에 온 이유와 목적이 뚜렷했다. 송몽규는 다른 조선인 대학생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준비했지만,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한 채 잡히고 만다. 윤동주 또한 릿교대에서 만난 후카다 구미를 통해 시집을 출간하려는 와중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렇게 윤동주는 후카오카 형무소에서 알 수 없는 약물을 투여받고 아슴아슴한 상태로 버티던 중 광복을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눈을 감았다. 송몽규 또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3월 10일 옥사하고 말았다.
 미완의 청춘을 담은 흑백 필름과 윤동주의 심경 변화 때마다 낭송되는 13편의 시. <동주>는 부끄러움을 그려낸 영화다. 행동했지만 뜻을 완성하지 못한 송몽규의 부끄러움과 고뇌하고 자의식에 시달린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엇갈린 것 같지만 어느 한 지점에서는 만나게 된다. 그 때문에 누가 옳다 그르다 말할 수가 없다. 어느 길을 가든 부끄러울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동주>는 말한다. 그렇다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저지르고 부끄러워하면 그만이라는 말이 아니다. 선을 기반으로 한 가치관이 흔들릴 때, 겁먹어 선두로 나서지 못할 때, 사방이 막혀 행동할 수 없을 때 부끄러워해도 된다는 말이다.
 가을이 바투 다가왔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기 좋은 온도다. 마음 놓고 부끄러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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