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군은 학생회관을 서성이고 있었다. 김 군은 1학년 학생이다. 1학기를 회상하자 새벽까지 술만 마시다 오전 수업에 출석하지 못한, PC방을 가느라 과제를 하지 않은 기억과 성적을 확인하며 좌절하는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때 갑자기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동아리 있으세요? 혹시 놀고먹은 1학기가 후회되시면 연락해주세요. 2학기는 알차게 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새 학기와 함께 동아리 홍보를 시작한 동아리원들이었다. 그들은 김 군과 같은 사람들, 즉 지난 학기를 후회하며 새로운 자극제를 찾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동아리는 학업에 지친 학생, 학기를 보람 있게 보내고 싶은 학생에게 엄마 같은,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해주곤 한다. 김 군은 결심했다. 2학기 때부터는 동아리에 가입해 누구보다 의욕적인 학교생활을 하겠다고.
 
 강산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 동아리도 유행을 타기 마련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학가 동아리는 이념 동아리나 철학연구회, 연극반, 탈춤반이 대부분이었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오며 지식과 전통을 공부하는 동아리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동아리가 보편화됐다. 지금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스케이트보드, 복싱, 요트, 힙합 등 오락거리를 즐기는 동아리가 유행을 탔다. <경향신문> 1999년 11월 23일 자를 살펴보면, 나인균 씨(당시 나이 22세)는 "단순히 유행을 따라 하는 게 아니다. 불량아처럼 비치는 그릇된 편견을 없애기 위해 댄스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0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동아리 활동은 대학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후부터는 부수적인 활동이라고 인식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취업난이라는 말이 생겨나며 동아리 또한 변화했다. 컴퓨터가 보편화되며 컴퓨터 관련 동아리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벤처 동아리도 생겨났다. 오락에 중점을 둔 학생들이 학업과 실용에 눈길을 돌린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아리의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동아리를 대학생활의 부수적인 활동이라고 인식하며 동아리 문을 두드리는 새내기들이 급감했다. 학점과 스펙에 열중해 동아리라는 부차적인 일은 점점 뒤로 밀리게 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동아리는 다시금 변화를 맞이했다. 2000년대에 취업 동아리, 토익·토플 동아리 등 스펙을 쌓는 스터디 동아리가 많아졌다. 취업난이 점점 극에 달하며 학업과 동시에 동아리에서도 취업에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동아리 또한 그 물결에 맞춰 탈바꿈해갔다.
 
   Back to the 1980s
 2010년 중반에 들어오면서부터 학벌주의, 스펙주의가 줄어들었다. 대신 대학 밖으로 나와서 활동하는, 이색적이고 남들과 나누는 동아리가 늘어났다.
 대학생들의 건강을 염려한 절주 동아리 또한 최신 트렌드다. 캠퍼스 내의 건강한 음주 문화 정착을 위한 절주 홍보, 절주 교육 및 각종 절주 캠페인 등의 활동을 한다. 대학 가까이에 있는 보건소와 자원봉사센터와도 연계해 건강한 음주 문화를 끌어내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전국 대학 절주 서포터즈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외에도 사회와 함께하는 동아리들이 많다. 충북대 동아리 봉사단 '위더스'가 침수 피해로 고생하던 충북 청주시를 방문해 이재민을 돕기도 했고, '캣홀릭', '강냥이', '고고쉼', '냥침반' 등 각 지역의 길고양이 돌봄 동아리들이 '반려동물 유기방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봉사 동아리들은 활동을 대학 내로 국한하지 않는다. 지역 구성원과의 화합을 통해 대학에서는 배울 수 없는 공부를 동아리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대학4.0시대에 들어서고,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창업 동아리 또한 늘어났다. 2013년 기준 교육부가 파악한 학생 창업자 수가 527명, 2014년에는 734명, 2015년에는 967명이었던 것을 보면, 꾸준한 증가세 속에 지금은 학생 창업자의 수가 더욱 늘어났을 거란 예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우리대학 또한 창업 동아리를 선발해 시제품 제작비 및 사업화 연계 등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창업휴학제를 도입한 학교도 245개교로, 2년 전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학교 또한 학생들의 창업 동아리에 힘을 실어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이제는 동아리가 부수적인 일이 아닌 1980년대처럼 대학생활의 큰 축이 된 셈이다.
 
   색다른 동아리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대학은 학생 수가 많은 만큼 동아리의 특색 또한 천차만별이다. 학업에 지친 학생들이 흥미와 취미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동아리가 많아졌다. 학생들의 개성이 제각기 다르듯 동아리도 가지각색의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특히, 요즘은 대학생들이 늘 새로운 변화를 찾고 있어 동아리도 그에 맞춰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우리대학 이색 동아리 두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당구 동아리 '신의 한 큐'다. 신의 한 큐는 당구를 좋아하거나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모여서 만든 당구 동아리다. 최근 당구가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흐름을 타 이번 2학기에 신설된 신생 동아리다. 주요 활동으로는 동아리 내에서 당구 레슨을 하거나, 실력대로 급을 맞춰 급별 메달 대항전을 벌여 소정의 경품 내기를 한다.
 신의 한 큐 동아리 회장 김종원 씨(경영학과 3년)는 "SNS를 통한 사설 모임으로 시작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동아리를 만드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부원들과 함께 열심히 노력했고, 지속적인 지원을 해주신 당구장 사장님 덕에 동아리를 만들 수 있었다. 다들 정말 감사하다"고 전했다.
 다음은 오케스트라 동아리 '원광필하모닉'이다. 원광필하모닉은 악기를 배우고 싶거나 예전에 악기를 다뤄봤던 학생들이 모여 매 학기 연주회를 진행하는 동아리다. 1989년에 창설됐으며, 우리대학에서 유일무이한 오케스트라 동아리다. 주요 활동으로는 연주회뿐만 아니라 동아리 체육대회를 비롯, 때로는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원광필하모닉 동아리 회장 이영광 씨(복지보건학부 4년)는 "학교생활과 연습을 병행하다 보니 매번 연주회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며 동아리 운영을 하면서 힘든 점을 말했다. 이어 "악기를 한 번도 다뤄보지 않았다고 해서 망설일 필요 없으니 배움의 의지만 갖추고 있다면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위와 같은 이색 동아리들은 학생들에게 잠시나마 학업의 스트레스를 잊고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이색 동아리의 수는 점점 늘어나는 추세로, 그에 따라 학생들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에게 맞은 동아리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됐다. 우리대학 총동아리연합회 역시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항상 노력을 거듭하고 있으니, 주저하지 말고 동아리방 문을 두드리면 된다.
 
   남들보다 빠르게 난 남들과는 다르게
 동아리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지만, 동아리 가입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취업 전쟁이 목 밑에 있는 학생들이다. 제아무리 동아리가 사회적으로 보람찬 일을 하고,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당장 취업 앞에서는 밀리기 마련이다.
 인문대에 재학 중인 이 모 씨는 "취업 준비에 필요한 돈도 부족한데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한 입회비, 연회비와 같은 것들까지 준비할 수 없다"며, "요즘 사회는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되지 않을뿐더러 여러 스펙을 쌓아도 모자란데 동아리 활동까지 하면 더더욱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동아리 활동은 불가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국어국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홍 모 씨는 "동아리에 가입해도 취업 준비하느라 동아리 모임에도 못 나가 눈치가 보인다"며, "학년이 낮았을 때 동아리든 뭐든 다 해볼 걸 후회된다. 이제는 취업 이외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김 군은 쓰레기를 줍고 있다. 혼자는 아니다. 봉사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김 군은 1학기와는 확연히 다른 2학기를 시작 중이다. 이제 김 군은 강의가 비면 PC방 대신 동아리방을 찾아 선배들과 학교 이모저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김 군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고, 할 수 없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김 군은 달라져 있었다.
 
 
  오병현 기자 qudgus0902@wku.ac.kr
  김정환 수습기자 woohyeon17@wku.ac.kr
  홍건호 수습기자 hong7366@wk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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