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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와 인재 등용 - 함께하는 정치의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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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04  21: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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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세종의 위대함을 부인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를 비롯하여, 백성들을 위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의 농서와 의서 간행,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과 해시계·자격루·측우기 등의 각종 과학기구들의 발명, 박연으로 대표되는 궁중 음악의 완성 등 세종대의 찬란한 민족문화의 성과들은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여기에 더하여 북방 개척에도 힘을 기울여 4군 6진을 쌓아 압록강 두만강으로 경계가 이루어진 오늘날 한반도의 영토를 확정하는 등 세종시대의 면면을 들어 보노라면 뭔가 자랑스러운 민족적 긍지 같은 것이 불끈 솟아오르며, 위대한 왕 세종의 찬란한 역량을 다시금 되새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세종시대의 리더십은 '함께하는' 정치의 표방이었다. 자신이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세종은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았다. 전국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고 이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위에 제시한 자료에서 보는 것처럼 공법이라는 토지 세법을 정할 때 17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본 것이라든가, 집현전을 설치하여 최고의 인재들로 하여금 국가 정책을 만들게 한 것, 천민 출신의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은 세종의 포용적인 리더십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김종서, 최윤덕과 같이 국방 개척에 소임을 다한 인물들이나, 황희, 맹사성, 유관, 허조와 같은 청백리 정승들이 세종시대에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것도 국토와 민족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고 도덕적으로 기강이 바로잡힌 시대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조선이 건국된 후 30여 년이 지난 즈음 왕위에 오른 세종, 그의 시대는 왕권과 신권의 갈등과 같은 초기의 정치적 시행착오를 수습하고 왕권과 신권이 함께 머리를 짜내며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시켜야 할 과제가 대두된 시대였다. 세종은 이 시대 조선이 나아갈 국정의 방향을 자주, 민본, 실용으로 삼았다. 세종은 가능한 국가의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자주, 민본, 실용의 정치 문화를 정착시킬 성과물들을 국가 인재들의 역량을 총동원하면서 차근차근 마련해 나갔다.
세종의 정치 문화 코드를 가장 대표하는 업적이 바로 우리글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1446년 9월(음력) 오랜 연구 끝에 세종은 우리글 훈민정음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를 반포하였다.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노라"는 훈민정음의 서문에는 자주, 민본, 실용의 시대 정신이 잘 피력되어 있다.
역사가 수천 년 되었지만, 이때까지 우리글은 없었다. 그동안 입으로는 우리말을 하고 글은 한자를 빌어다 쓰는 생활을 해오면서, 백성들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종은 어려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자음과 모음 28자로 이루어진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1443년에 만들어져, 3년 동안이나 궁궐에서 여러 학자와 대신들이 시험 삼아 사용해 보았다. 그 결과 여러 사람이 사용하기 우수한 글임이 밝혀져, 이를 온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든 의미까지를 밝혀 놓은 서문의 존재로 인해 훈민정음은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다. 그 속에는 세종의 자주정신, 애민정신과 함께 실용정신이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어려운 한자시대가 가고 쉬운 한글시대를 맞이하는 전기를 맞이하였다. 양반 사대부들은 여전히 한자를 선호하였지만 글을 배우기 힘든 백성들이나 궁중의 여성들에게 있어서 한글은 그야말로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한글의 창제는 서민들의 한글소설이나 궁중문학의 발전으로도 이어져 조선의 문화 저변을 확대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429년(세종 11)에는 우리 땅에 맞는 농법서인 『농사직설』이 간행되었다. 600년 전 이 땅의 백성들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농업은 천하의 근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업은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농사의 풍흉에 따라 한 해의 삶이 결정될 정도로 농사는 중요하였다. 따라서 보다 효과적으로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는 작업은 매우 중시되었다. 이전까지 조선의 백성들은 중국에서 수입된 농서인 『농상집요』를 가지고 농사를 지었지만 기후와 풍토가 다른 관계로 효과적인 생산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에 세종은 『농사직설』을 간행하기 전부터 정초, 변계량 등을 시켜 농업이 발달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삼남 지방의 관리들에게 그 지방의 농사법을 자세히 적어 올리게 했다. 관리들은 고을의 농사의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농부들을 찾아가 그들의 농사짓는 방법을 자세히 듣고 이를 기록하였다. 『농사직설』은 이러한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완성한 것이었다.
『농사직설』이 완성된 후 세종은 친히 경복궁 후원에 1결의 땅을 갈아 직접 농사를 지었다. 친경(親耕)을 한 것이다. 농서의 보급을 위해 국왕이 직접 발을 걷고 나선 것이다. 세종은 직접 농사를 지어 『농사직설』의 효과를 백성들에게 직접 확인시켜 주려 했던 것이다. 경복궁 후원에 조 2홉의 씨를 뿌려 『농사직설』에 따라 농사를 지어 본 결과 세종은 1석의 수확을 거두었다. 기존의 농법보다는 많은 수확이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세종은 관리들을 더욱 독려하고 『농사직설』의 보급을 권장하였다. 세종시대 민본정책의 싹은 바로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여기에 맞는 정책을 직접 실천하고 수행함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1433년(세종 15)에는 우리 산천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중심으로 증상에 따른 처방을 기록한 『향약집성방』을 완성하였다. 이전까지는 중국 의학서의 처방전을 보고 약을 썼는데, 중국 약재는 비쌀뿐더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효과도 적었다. 1433년 전국의 향약 처방을 모은 『향약집성방』이 편찬되었고, 이 책은 당시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인구가 늘어나고,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향양집성방』은 세종이 10여 년 이상의 시간을 투지한 끝에 우리의 몸에 맞는 약재에 관한 내용을 간행한 책이었다. 모든 질병을 57대의 큰 항목으로 나누고 959조의 소목을 달아 해당하는 병과 처방법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세종의 민본정신과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은 과학 기술에서도 혁신적인 발명품의 생산을 가져왔다. 특히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는 무엇보다 농시(農時)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아무리 좋은 종자를 가지고 있어도 적절한 시기를 잃어버리면 농사의 풍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시에 대한 중요성은 천문관측 기구와 시계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1438년(세종 20) 3월부터는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리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도 만들어졌다. 해시계를 일구라고 부른 것은 해의 그림자로 시간을 알려주기 때문이었다. 앙부일구는 '솥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의 해시계'란 뜻으로 마치 솥 모양으로 생겼는데,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혜정교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 시계인 셈이었다. 이외에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정남일구와 같은 다양한 시계들이 발명되었다.
1434년(세종 16)에는 노비 출신 과학자 장영실이 저절로 시각을 알려 주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발명하였다. 해시계는 날씨가 흐리거나 밤이 되면 쓸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빛이 없어도 시각을 알 수 있는 물시계가 나왔다. 자격루는 자동 시보 장치가 붙은 물시계로서, 시, 경, 점에 따라서 종, 북, 징을 자동으로 울리는 동시에 목각 인형이 나와서 시간을 알리게 했다. 일종의 자명종 시계였던 셈이다. 처음 이를 본 사람들은 그 움직임이 귀신같다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고 한다. 자격루는 경복궁의 남쪽인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영실은 중국계 귀화인 아버지와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천민 신분으로 동래현의 관노비로 있었으나 세종의 눈에 띄어 일약 궁중의 과학 기술자가 된 인물로 유명하다. 그만큼 세종은 인재를 보는 데 있어서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은 즉위 후 바로 집현전을 학문과 정책의 중심기구로 발전시켰다. 집현전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처음 사용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정종 때 집현전이 있었으나 거의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었다. 세종은 즉위와 함께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 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그리고 '재행연소자(才行年少者)'라 하여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모았다.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속속 집현전에 모여들었다.
집현전은 1420년(세종 2)에 설치되어 세조 2년에 없어질 때까지 약 37년간을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집현전이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이곳에서 세종대의 대표적인 학문, 문화 활동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 자리로 국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집현전에 대한 세종의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세종 스스로도 학문이 뛰어난 군주였지만 홀로 정책을 결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집현전과 같은 기구에서 배출된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다수의 의견을 존중한 세종의 면모가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집현전에서는 각종의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역사서, 유교경서, 의례, 병서, 법률, 천문학 관련 서적이 그것들로서 국가에 필요한 서적 편찬의 과제가 집현전에 부여되면 집현적 학자들은 과거의 법제와 학문 연구를 통해 이를 완수해 국왕인 세종에게 올렸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세종 당대에 완성된 것도 많았지만 『고려사』와 같이 전대의 역사를 정리한 편찬사업은 세종대에 시작하여 문종대에 완성되었다. 그만큼 긴 안목을 가지고 과제를 부여하고 이를 완성했던 것이다. 집현전은 세종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 권의 책을 편찬하였다.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이 편찬되어 세종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였다. 집현전의 설치는 무엇보다 세종이 혼자만의 힘으로 국가의 정책 결정을 하지 않고 다수 인재들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국가의 정책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집현전에서 배출된 쟁쟁한 인적자원은 15세기 찬란한 민족문화를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집현전이라는 국가 인재의 보고(寶庫)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함께하는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은 세종을 보다 위대한 국왕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한다.
                                 

                                                                                                    신병주 교수(건국대 사학과)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대학원(석,박사)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궁능활용 심의위원, 인문학대중화 운영위원, 조선시대 사학회 총무이사, 외규장각도서 포럼 자문위원 등
주요 저서 : 『왕으로 산다는 것』, 『조선과 만나는 법』, 『조선평전』,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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