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화) 광복절 새벽 4시에 잠을 깼다. 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오늘은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원 30명과 함께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 지역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하러 떠나는 날이다. 우리 대학에서는 필자, 김봉곤 박사(원불교사상연구원), 정혜정 박사(마음인문학연구소)가 참가했다.
 오전 7시 전국 각지에서 온 참가자들이 속속 인천공항으로 집결했다. 이번 답사에는 당초 40명이 신청했지만 중도에 11명이 포기하고 29명이 최종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오전 10시 10분 인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981편은 현지시간 오후 1시 50분에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황에 착륙했다. 공항을 나와 전세버스에 올라 바로 답사에 나섰다. 오후 일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우수리스크로 이동하면서 주변의 독립운동 사적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차내에서는 벌써 전라남도 담양(潭陽)이 고향이라 하여 '담양댁'으로 불리는 조미향 씨의 안내가 시작된다. 그녀는 연해주 지역 한국 독립운동 사적지 안내에 있어 최고의 가이드로 알려져 있다.
 50분 정도 달려 첫 답사지 '라즈돌노예' 역에 도착했다. 이 역은 구(舊)소련의 스탈린 정부가 1937년에 연해주 지역 동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시킬 때, 우리 동포들이 시베리아철도 화물칸에 태워진 채 최초로 출발한 역이다.
 러시아에서 '고려인'으로 불리는 우리 동포들의 한과 슬픔이 서려 있는 역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모스크바로 가는 화물열차가 역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1937년에 강제 이주를 당할 때 동포들이 탔던 열차도 화물열차였는데, 우리가 마주친 열차 역시 화물열차라니. 우연(偶然)치고는 너무도 '필연적인' 우연이었다. 오후 4시경 라즈돌노예 역을 뒤로하고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오후 4시 46분. 학수고대하던 보재 이상설 선생(溥齋 李相卨, 1870-1917) 유허비 앞에 도착했다. 주지하듯이, 보재 선생은 저 유명한 헤이그밀사 3인 가운데 한 분이다. 그런데, 주변 도로는 물론이고 유허비 주변이 온통 마른 진흙투성이였다. 며칠 전에 연해주를 휩쓴 폭우에 유허비마저 침수되어 우리 일행보다 앞서 다녀간 답사팀(보훈처 등)은 멀리서 바라만 보고 갔다고 가이드 조미향 씨가 귀띔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 보재 이상설 선생 유허비

 보재 선생 유허비는 수이푼 강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서 있었다. 1907년에 헤이그밀사로 특파된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1917년 서거하기 직전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보재 선생께서는 자신이 죽기 전에 모든 자료는 소각할 것이며, 시신은 화장해서 수이푼 강에 뿌려달라고 했었다.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수이푼 강은 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주 폭우 때문에 하마터면 참배도 제대로 못했을 유허비 앞에서 우리 일행은 준비해 간 보드카 술을 따르며 차례로 절을 올렸다.
 오후 6시경 우수리스크 시내의 '고려인문화센터'에 도착했다. 센터는 2층 건물로서, 1층은 역사관, 2층은 각종 문화 활동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센터 앞 광장에 설치된 무대에서는 러시아 소녀들 4-5명이 모여 춤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5분짜리 '연해주의 불꽃, 고려인'이라는 동영상 시청을 통해, 1863년 함경도의 13가구가 최초로 이주한 이래 지금까지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살고 있는 러시아 동포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고려인문화센터 견학을 마치고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崔才亨, 1860-1920) 선생 거주지로 향했다. 저녁 7시 48분, 최재형 선생 거주지에 도착했다. 이 집은 작년(2016년)에 국가보훈처에서 구입하여 전시관으로 개조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바깥쪽 담은 다 헐리어 없어졌고, 집 안마당에는 공사용 자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저녁 시간인데도 인부로 보이는 러시아인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 우수리스크 시내의 최재형 선생 거주지

 최재형 선생은 통역 및 군납 업무 등을 통해 모은 막대한 부(富)를 모두 조국 독립운동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를 무대로 활약하던 독립지사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했다. 예를 들면,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할 때 사용했던 권총도 최재형 선생이 사준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최후는 너무 비참했다. 선생은 '4월 참변', 곧 1920년 4월 5일에 연해주 지역 조선인 독립운동가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연해주 동포들 사이에 '페치카(난로)'로 존경받던 선생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집 앞에 서서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에 모두 감정이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후 8시 10분경 최재형 선생 거주지 바로 옆에 자리한 또 하나의 독립운동 사적인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개최되었던 건물 앞에 섰다.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가 나란히 붙어 있는 건물이었다. 1918년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은 러시아 동포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전로한족중앙총회라는 러시아 동포 전체를 이끌 최고지도기관이 탄생함으로써 곧바로 러시아 내 동포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할 수 있었고, 나아가 민족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서 교육체제 정비를 결의하고, 그 결의를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있었던 건물 견학을 마치니 첫날 일정이 모두 저물었다.
 8월 16일 아침 9시에 숙소를 출발하여 2일차 답사에 나섰다. 오늘은 우수리스크에서 크라스키노까지 왕복하는 일정이다. 크라스키노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이 연추(煙秋)라고 부른 곳이다. 우수리스크에서 가는 시간만 4시간 정도 걸리는 장거리다. 그런데, 이 연추는 연해주 일대의 교통상의 요지로써 을사늑약(1905)과 국치(1910) 전후에 우국지사들의 국외망명지로 이름이 나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와 인접해 있다는 점, 그리고 1863년 연추 지신허(地新墟) 마을에 동포마을이 처음 형성된 이래 연해주 각지에 형성된 동포 마을을 다스리는 행정의 요지였다는 것 등등으로 인해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본산이 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 단지동맹 기념비 앞에서 태극기를 들다

 연추로 가는 버스 안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사 연구의 최고권위자 박민영 선생(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이 연해주 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박 선생의 설명 속에 의병결사체 동의회, 창의회, 단지동맹회라는 이름이 잇따라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안중근 의사가 1909년 3월 5일 연추 카리(下里)라는 동포 마을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목숨을 조국독립에 바칠 것을 결의하는'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이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 參謀中將)'의 이름으로 처단했다는 내용이 일행의 뇌리에 박힌다. 박 선생은 강조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쏜 총구는 "2천 만의 힘이 실린 총구로써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20년 의병전쟁을 총괄하는 최후의 독립전쟁을 수행한 것"이었다고. 또한 안중근 의사가 '대한의군'이라 말한 것은 대한제국 전체 의병을 뜻하고, '참모중장'이라 한 것은 의병 지도부 가운데 중간 정도 간부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의 심경이 담긴 다음의 글이 그것을 웅변한다. "그것(하얼빈 의거-필자주)은 3년 전부터 내가 국사를 위해 생각하고 있었던 일을 실행한 것이다.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등(伊藤)을 죽였고,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으로 도대체 이 공판정에서 심문을 받는 것은 잘못되어 있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의사자서전』, 1979, 450쪽) 오후 2시 20분 마침내 우리 일행은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12분의 우국지사들이 조국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진 것을 기념하여 2001년에 건립한 '단지동맹 기념비' 입구에 도착했다.
 '단지동맹 기념비'는 처음 세웠던 자리에서 두 번이나 옮겨 현재의 자리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러시아 당국이 국경수비를 이유로 철조망 등으로 접근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해주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독립운동 유적을 제대로 관리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가이드 조미향 씨가 준비해 온 태극기를 들고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또 다른 한국인 답사객들이 속속 도착한다. 향후 2-3년간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연해주 지역이 한국인 관광객들의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는 것을 실감하는 광경이다. 나는 기왕이면 관광에 역사의식까지 함께 함양하는 그런 여행이 되길 희망해 보았다.

(다음호에 계속)
박맹수 교수(원불교학과,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

저작권자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