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호 교수(경제학부)
누군가 말했던가?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고…. 대학이란 무엇일까? 대학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대학은 자유로운 곳이어야 한다. 대학은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고 움트는 비판정신의 육종시험장이다.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들을 주장할 수 있는 여백이나 여지가 주어진다. 새로운 것들은 자유로움에서 출발하지만 새로운 창조물은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는 지점에서 완성된다. 기존의 것들을 깨부술 때 비로소 새로움은 움트고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헤겔의 유심론적 변증법이든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이든 자유와 비판은 변증법을 관통한다. 위대한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너희는 결코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너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죽어야 한다.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소크라테스도 설파한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그 무지함을 깨우쳐라!"
 대학에 자유를 부여한 건 방종이나 노예근성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권력자들의 무지를 지적하다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의 운명이나 지동설을 주장하다 온갖 고문과 화형으로 산화된 조르다노 브르노의 비극을 막기 위함이다. 1600년에 화형 당한 조르다노 브르노는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무한하며 신성은 전 우주를 꿰뚫는 생명이라고 주장한 것이 불태워 죽임의 이유이다. 그 시대를 짓누르던 종교권력이 빅뱅이론에 가까운 그의 주장을 화형으로 입막음한 치졸함에 불과하다.
 과학적 진실은 인간의 변덕에 의해 결코 좌우될 수 없다. 어떠한 권력적 횡포도 자연법칙을 자신의 구미에 맞는 요리로 만들 순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대학을 보라!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그 몰골이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대학은 방종으로 휘청거리고 노예근성으로 길들여지고 있다. 자유의지와 비판정신의 신성한 깃발은 찢겨지고 빛을 바랜지 오래다. 인증이나 평가의 잣대가 모든 것을 틀에 가두고 정량화하여 대학을 줄 세우려 한다. 자본권력에 의해 대학은 지배당하고 통제받고 있는 셈이다. 진리와 정의를 바탕으로 자유롭고 이상적인 학문공동체를 지향해야 할 대학의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취업알선을 위한 직업훈련원이나 직업소개소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다. 대학평가는 시장논리인 경쟁력, 수익성, 효율성을 들이대며 대학을 평정해 버렸고, 재벌언론은 대학평가라는 채찍과 당근으로 대학을 길들이고 있다. 다보스 포럼에서 시작된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의 기치는 대학에서조차 선동구호로 나부끼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의 깃발은 창조정신이나 상상력이라는 빛깔로 가득하다. 그런데 우리네 현실은 어떠한가? 인증이나 평가라는 획일적인 창살로 감옥을 만들어 놓고 우리 모두를 가두려 한다. 자본권력으로 포획된 우리는 이제 늑대처럼 인위적 선택에 의한 DOG로 진화해 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파고는 창조적인 돛대와 상상력이란 노젓기를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떠들어대면서 대학은 자유와 비판정신을 무시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대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외쳐야 한다. 자유와 비판정신으로 어떠한 권력과 도그마도 물리칠 수 있는 게 바로 대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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