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학회(회장 박맹수교수, 원불교학과) 회원 30명은 지난달 15일부터 18일까지 3박 4일 동안, 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 및 '보재 이상설 선생 100주기 기념 학술답사'를 다녀왔다. 이에, 2회에 걸쳐 답사기를 게재, 연해주 지역의 아픈 역사를 되짚어 보는 기회를 갖는다. /편집자

 8월 17일 답사 3일차. 오전 8시 40분에 우수리스크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첫 번째 목적지 루스키 섬까지는 1시간 반 거리다. 버스 안에서 박민영 박사의 수준 높은 설명이 이어졌고, 그중에서도 "연해주 동포들이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몰라도 민족교육자로서 포석 조명희 선생과 북우 계봉우 선생 두 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내용이 뇌리에 쏙 박혔다. 러시아 동포들은 다 안다는 포석은 누구이며, 북우는 누구인가.
 포석(抱石)은 일제강점기 카프 작가로 유명한 조명희(趙明熙) 선생의 호이다. 1894년 충북 진천 출신으로,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일본 유학을 거쳐 1920년대 서울에서 작가로 활동했다. 선생은 카프 문학의 선구자로서 작가 이기영(李箕永)과 한설야(韓雪野)를 길러낸 스승이기도 하다. 대표작 「낙동강」(洛東江)을 발표한 후, 1928년에 연해주 신한촌으로 망명하여 추풍(秋風, 수이푼)의 육성촌에 잠시 숨었다가 우수리스크를 거쳐 하바로프스크로 옮겨 그곳에서 교편을 잡으며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또한, 동포신문 <선봉>과 <노력자의 조국>이란 잡지의 편집을 맡아 활약하다가 1938년 러시아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으나 1959년에 복권되었다. 선생은 현재 러시아 동포사회에서 '항일영웅 59인'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북우(北愚) 역시 '항일영웅 59인' 가운데 한 분으로 추앙받고 있는 계봉우(桂奉愚) 선생의 호이다. 1880년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여 일생 동안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른 4개의 국가 곧 한국,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을 넘나들며 살았다.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에 국내에서 성장하여 구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고, 나이 스물 이후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상하이를 오가며 공산주의운동과 국학연구에 몰두하였고,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이후에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등에서 국어와 역사연구를 계속하였다. 선생의 국학연구와 저술활동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 반세기에 걸쳐 진행돼 러시아 동포사회에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이렇게 러시아 연해주 현지에서 우리 답사팀이 포석과 북우 두 분을 알게 된 것은 최대의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오후 2시경 블라디보스토크 최대의 동포 거주지였던 옛 신한촌(新韓村) 입구에 있는 '신한촌 기념비'에 도착했다. 이곳은 현재 주소로는 블라디보스토크시 하바로프스카야 26A이다. 기념비는 1999년 8월 15일에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건립하였으며, 탑은 모두 3개의 석주(石柱)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가장 높은 석주는 대한민국을, 정면에서 왼쪽에 있는 두 번째로 큰 석주는 북한(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오른쪽 가장 낮은 석주는 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상징한다. 세 개의 석주로 구성된 기념비 입구에는 신한촌의 유래와 기념비를 세운 경위를 한국어와 러시아로 써 놓은 조그마한 기념비가 따로 세워져 있었다.

▲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에 대해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곳이 을사늑약(1905)과 국치(1910)를 전후한 시기부터 1919년 3·1독립운동 시기에 이르기까지 국내외에서 활동했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동을 뒷받침하는 핵심기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을사늑약과 국치 전후에 신한촌으로 망명하였거나 또는 신한촌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사들의 면면은 어떻게 될까?
 신한촌에서 망명 활동을 한 인물은 이범윤(李範允, 1856-1940), 홍범도(洪範圖, 1869-1943),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이진룡(李鎭龍, 1879-1918) 등의 의병장(義兵將)과, 의병 못지않게 그동안 국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망라되었다. 헤이그 밀사로 저명한 이상설(李相卨, 1871-1917)과 이위종(李瑋鍾, 1887-1924?)을 비롯해 북간도 용정(龍井)과 서간도 삼원포(三源浦)에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던 이동녕(李東寧, 1869-1940)과 정순만(鄭淳萬, 1873-1928), 미주에서 공립협회와 국민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을 추진하던 정재관(鄭在寬, 1880-1930)과 이강(李剛, 1878-1964), 김성무(金成武, 1891-1967) 등이 이곳에 일차 집결하였다. (『러시아 지역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사』, 1994, 145쪽)
요컨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이야말로 국치 전후 '이승만을 제외한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해외독립운동의 본산'이었던 것이다. 기념비 견학을 마치고 나서 옛 신한촌 거리를 도보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옛 신한촌 거리는 러시아 당국의 재개발 정책에 따라 아파트군(群)으로 바뀌어 있어서 옛 모습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성재 이동휘(李東輝) 선생 집터 자리였다. 이동휘 선생 집터는 '신한촌 기념비'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었다. (지도 참조)

 

 성재(省齋) 선생은 '대통령장'을 수훈한 독립운동가다.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때 서울로 올라와 이용익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 졸업 후 육군 참령이 되었다.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군대해산에 분노, 1909년 강화도에서 의병을 조직하려다 잡혀 유배되었으나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주선으로 풀려났다. 그 해에 안창호, 이동년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1년에는 양기탁 등과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913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김 알렉산드라와 함께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창당하였으며,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에도 참여하여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거하였다.
 성재 선생 집터 위에는 '엘레나'라는 대형마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면, 1992년 7월의 조사 당시에도 이곳에는 엘레나 상점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앞을 지나는 대로는 신한촌 건설 당시 조성된 5개의 거리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2개 거리 중 하나여서 옛 신한촌을 떠올리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 성재 이동휘 선생 집터(앨레나라는 상점 표기가 선명하다)

 오후 3시 42분경에 신한촌 건설 이전의 한인 거주지 '개척리'(開拓里) 일대를 돌아보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10분 후 옛 개척리가 있던 거리 입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옛 '개척리'는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개척리' 바로 옆 '고려인 거리'로 널리 알려진 1992년 당시의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사진을 찍었다.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러시아 지역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사』(1994)에 소개된 사진에 나오는 지형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개척리'는 현재 지명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시 포그라니치나야 거리라고 부른다. 이 거리 1번지부터 '둔덕마퇴'라고 부르는 아무르만에 연한 남쪽 언덕과 '웅덕마퇴'라고 부르는 그 아래 저지대에 이르는 일대가, 러시아어로 '카레이스카야 스라보카'라고 불렸던, 옛 개척리 마을이 있던 곳이다. '둔덕마퇴'로 불리는 언덕 쪽을 바라보니 고급 빌딩이 꽉 차 있고, '웅덕마퇴'로 불린 저지대 쪽은 아름다운 공원과 분수대 및 시민광장으로 조성되어 있어 그 어디서도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저절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8월 18일 답사 4일차. 블라디보스토크 항(港)과 블라디보스토크 역(驛)을 집중적으로 답사한 다음 귀국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아침 8시 50분 블라디보스토크 역 앞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9천 288킬로미터에 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이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 있는 80여 개의 역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역이다. 이 블라디보스토크 역은 우리나라와도 관계가 아주 깊은 역이다. 1907년 4월에 헤이그 특사 이준과 이위종이 바로 이곳에서 헤이그로 출발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오고 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곳이기도 하다.
 역 바로 앞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였다. 그런데 이곳이 군항(軍港)임을 증명하려는 듯이 건너편 부두에는 몇 척의 러시아 군함이 정박해 있었다. 군함은 '부동항'(不凍港: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 획득을 향한 집념이 제정(帝政) 러시아 때부터 구 소련을 거쳐 지금의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군함이 정박하고 있는 맞은편, 그러니까 우리 일행이 서 있는 쪽의 민간 부두에는 기이한 배 한 척이 보였다. 북한 국적의 '만경봉호'였다. '영광스러운 우리조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쓰여 있는 만경봉호를 바라보자니 무엇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무수히 교차했다. 만경봉호는 옥수수로 보이는 곡물을 싣고 있는 중이었다. 통일의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염원하면서 발길을 돌려 귀국 비행기편에 올랐다. <끝>

박맹수 교수(원불교학과,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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