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왕도(王都)다. 수많은 영웅들이 익산 금마에서 재기를 꿈꾸었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왔고 고구려 유민 안승도 고구려의 영광을 익산에서 도모했다. 후백제 견훤은 금마의 성벽을 돋아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고 동학군 접주들은 인근 삼례에 모여 조선의 마지막 횃불을 치켜들었다. 익산은 이렇듯 인생의 9회 말 투아웃에 처한 이들이 찾아와 의탁하는 곳이다. 비록 인생에 지치고 한번 패배하여 쓰러졌을지라도 익산은 다시 시작하려는 이들을 받아주었다. 백제 무왕이 금마로 천도하려던 이유다.
 백가제해(百家濟海) '백 개의 가문이 바다를 누빈다'는 건국 이념처럼 백제인들은 안주하기보다 도전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개화했던 백제인의 문화적 자존심은 관산성 전투 이후 위축된다. 전쟁에서 왕을 잃은 것. 정국은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의 북진에 한강 유역을 빼앗겼고 성왕에 이어 즉위한 혜왕과 법왕이 단명했다. 이른바 국가의 위기 상황이었던 삼국시대의 8회 말, 금마에서 태어난 서동(무왕)은 백제의 구원투수로 호출된다.
 신화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평범한 인물이 난세를 극복하기는 힘들었을 터. 무왕이 된 서동이 '용의 아들'로 신화화된 것은 강력한 상징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왕은 금마에 미륵사지를 창건한다. 오랜 전쟁에 지친 백성들에게 용화세계가 도래한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것. 국보 11호 미륵사지는 당대 민중들의 강렬한 염원이 미륵사상으로 구체화된 꿈의 궁전이었다. 전설과 역사의 간극은 어디까지일까? 미륵사지 창건 이후 익산천도를 시도한 무왕에 관한 이야기는 의혹투성이다. 왜 하필이면 할아버지(성왕)을 참수한 원수의 딸과 결혼했을까?
 금마가 백제의 심장이 되면서 지역도 부침을 거듭한다. 금마에는 전쟁과 관련한 지명유래가 많다. 미륵사지 일대의 '망실', '징골', '쌈터', '욕골', '항복골'은 한 편의 전쟁 스토리이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망을 보고 징을 쳤으나 결국 싸움에서 진 병사들이 후퇴하다가 항복했단다.' 금마, 여산, 삼기, 낭상, 여산, 왕궁은 46억 7천만 년을 수련해야 부처로 환생한다는 미륵의 호위장처럼 미륵사지를 두르고 있다. 익산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금마저'. 물가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예부터 물이 풍부한 곳에 농경이 발달했고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문화가 꽃 피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백제문화의 특징을 이렇게 적었다. 검이불루가 내면의 가치를 표현한 것이라면 화이불치는 외면의 격조를 나타낸 것. 백제인들의 자신감은 북방 문화의 웅건함에서 배태되었다. 그들은 해상교류를 통해 문화적으로 성숙하면서 남조 문화의 섬세함을 받아들였다. 백제문화의 특징인 웅건함이 부여계의 풍속에서 자랐다면 공예의 섬세함은 삶의 지향에서 스며들었다. 미륵사는 백제문화의 최종 완결판이다.
 미륵사는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들에게 구원의 아이콘이었다. 3원 3탑의 미륵사는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백제인의 숭고한 질문 같다. 백제인은 화강암을 반듯하게 잘라 목탑을 쌓듯 석재를 다듬고 결구하여 쌓았다. 그리고 탑의 옥개석을 새의 날개처럼 하늘을 향해 드리웠다. 창의성과 기술적 역량, 상상력을 실현하려는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어쩌면 미륵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아름다움을 훔친 죄로 사라져버렸는지 모른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지 천오백 년 후, 미륵사지와 왕궁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설가 윤흥길은 금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 『에미』에서 익산 정신을 비손이로 그린다. 누군가에게 간절히 기원하고, 또 기원하는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는 한여름인데도 두꺼운 솜 이불을 꺼내어 머리 위에 덮씌워주고는 숨이 꽉 막히도록 나를 껴안은 채 끊임없이 미륵님과 증산상제님을 찾았다. 주문이 좀 틀려도 좋다."(윤흥길, 『에미』 부분) 수천 년 동안 익산의 여염집 뒤안에선 정화수가 모셔졌다. 그리고 정화수 속에 비친 달처럼 익산의 운명도 세월의 물결에 흔들리며 차올랐다 이지러지기를 반복했다. 무왕이 익산 천도를 꿈꿨던 최대의 가능성은 어머니의 간절한 비손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호에 계속)

  박태건 교수(교양교육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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