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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원광 김용 문학상> 당선작발표시-격자, 소설-벨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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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6  19: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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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6회 <원광 김용 문학상>의 심사 결과와 당선작을 발표합니다. 심사 경위와 수상자 명단, 각 부문의 당선작을 이번 호와 다음 호에 걸쳐 게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학상'
 제16회 <원광 김용 문학상>의 원고 모집이 지난 8월 28일부터 10월 11일까지 이루어졌다. 이번 행사에는 우리대학을 포함해 전국의 대학에서 시, 소설, 희곡(시나리오) 부문에 많은 작품이 응모됐다. 이 응모작들을 대상으로 시 부문에 강연호(시인, 문예창작학과 교수) · 문신(시인, 문학평론가), 소설 부문에 정영길(소설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정은경(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공 교수), 희곡 부문에 이상복(연극평론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이승진(유럽문화학부 교수) 등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시 부문에서 당선작 1편, 소설 부문에서 당선작 1편, 희곡 부문에서 당선작 1편을 선정했다.
<원광 김용 문학상>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우리대학 국어국문학과 동문 김용 시인의 문학혼을 기리기 위해 유족과 우리대학이 뜻을 모아 만들었다. 지난 2012년부터는 전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응모자격을 확대해 시행하고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학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부문별 당선작>

·시 부문 : 당선작「격자」- 박서영(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소설 부문 : 당선작「벨루카」- 강민아(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희곡 부문 : 당선작「죗값」- 박윤식(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시 부문 심사평
높은 수준과 거침없는 상상력의 전개
올해 원광 김용 문학상 시 부문 심사는 특별했다. 문학보다 콘텐츠가 더 논의되는 시대에도 여전히 시를 쓰고 시인을 꿈꾸는 문청들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응모작들을 심사하며 새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시 부문에서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이었다. 지금도 시를 쓰겠다고 불면의 밤을 보내는 문청들로 인해 심사는 자못 즐거웠다.
결선에 오른 작품은 「모래의 온도」 외 2편, 「격자」 외 3편, 「정육점」 외 2편, 「떨기나무」 외 2편, 「유리창의 기억」 외 2편 등이었다. 이들 작품들은 제각각 근사한 시적 상상력을 펼치고 있어 매력적이었고, 물론 또한 제각각 어딘지 균형이 완전하지 않은 풋풋함도 보여주고 있었다.
「모래의 온도」나 「얼음의 알츠하이머」 등의 작품은 간결한 시행 전개와 응축된 표현이 돋보였다. 수준이 고르게 높아서 안정적이기도 했는데 다만 조금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격자」나 「자세」 등은 작품 속에서 활달한 스토리텔링과 서사적 맥락이 뛰어났다. 그런 만큼 작품들이 대체로 길어 좀 더 압축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정육점」과 「모래시계」 등의 작품은 세밀한 관찰을 통한 시적 형상화가 두드러졌다. 습작의 연륜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는 얘기와 함께 한편으로는 다소 밋밋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떨기나무」와 「언어의 기원」 등은 시적 표현이나 언어의 구사가 활달하고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설명적으로 풀어져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유리창의 기억」과 「수몰지구의 소문」 등은 능숙한 표현과 세련된 어법을 구사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새롭지 않고 너무 익숙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최종적으로 당선작을 골라내다 보니 「격자」와 「유리창의 기억」 두 편이 마지막에 남게 되었다. 심사위원들은 「격자」가 펼쳐내고 있는 거침없는 상상력의 전개와 「유리창의 기억」이 보여주고 있는 안정적인 세련미 사이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선택은 늘 망설임을 동반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24시 콜센터에 근무하면서 언어폭력에 시달리는 화자의 내면을 포착하고 있는 「격자」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안정적인 세련미보다 문청의 거침없는 패기를 택한 것이다. 투고한 모든 분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강연호(시인,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신(시인, 문학평론가)

격 자

가끔은 온몸이 알록달록한 시체를 마주치는 것이다

아파트 담장 앞이라든가 운동장이라든가 관공서의 입구 같은 곳에서
머리맡에는 화분 깨진 조각이 있는데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알록달록해진 것 같지는 않고
하여간 그렇다, 사건은 언제나 하여간 종결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강해져야 할 것 같았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은 손에 파리채를 들고 있고
선이 가로로 세로로 아무렇게나 그어진 격자 문양의 파리채,
그 격자가 진짜 내 코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수화기만으로도 쉽게 외상을 입곤 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는 24시 콜센터
고객님의 파리채를 위해 기꺼이 파리가 되겠습니다

달팽이관의 달팽이가 꿈틀댔다
이곳은 너무 아프다고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손에 칼이라도 쥐어주면 덜 아플 거야
일부러 몸에 칼을 그려 넣는 사람도 있는걸
대장장이처럼 바늘머신은 무기를 그리고 색깔을 채우고

이것은 무슨 문양입니까?
가갸거겨아야어여
그런 흉물스러운 글자도 몸에 새기는 겁니까?
아프게 한 걸 왜 몸에 새깁니까?
아픔으로써 증명됐잖아요, 강한 무기라는 것이

그러므로 나는 귀밑에 격자를 새기게 되었다
파리채가 자꾸 부딪히는 그 곳에
내일은 오늘보다 더 강해져서 출근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 셋을 만났다
집에 도착하기 위해선 총 세 번 아파야 했다
아파트 승강기에 올라 거울을 보았다

알록달록했다

박서영(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시 부문 당선 소감
지난 계절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작년 이맘때 시를 쓰기 시작했으니 오늘로 딱 일 년째입니다. 드러내면 감춰야 한다 하고 감추면 드러내야 한다 하고, 짧게 쓰면 길게 써야 한다 하고 길게 쓰면 짧게 써야 한다 하고! 중간이 어려워 머리를 싸맸던 지난 계절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작품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사실 문학상 같은 것에 냉소적인 태도를 꽤 오랫동안 견지했었는데, 이유는 고등학교 때 백일장을 전전하면서 연거푸 겪었던 낙방 때문이었습니다. 그 경험은 굳은살은커녕 어떤 상처로 자리 잡아버려서, 저는 시도조차 안 하고 포기하는 데에 버릇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해야겠습니다. 상처는 사실 그럴듯한 핑계에 불과했음을요.
소설만 쓰던 제게 시의 언어를 가르쳐주신 문창과 선생님들과 함께 작품을 합평하는 문청들, 더없이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수상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하시던 부모님, 모두 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라는 뜻으로 알고 앞으로 정진해 나가겠습니다.

 

소설 부문 심사평
소설이 작품인 이유, 反정보로서 사유 품기 때문
 김용 문학상에 응모한 소설 작품들은 기대 이상으로 다채로웠다. 예년에 비해 소재면에서 있어서도 다양했고, 또 문장 솜씨 또한 향상된 것이 눈에 띄었다. 작법 또한 디지털 시대에 맞게 과거 소설 문법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실험을 보여주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쉽게 읽히는 글들이 많아 과연 누구나 쉽게 저자가 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한편 아쉬운 것은 응모작 중 많은 글들이 디지털 시대의 넘쳐나는 정보들과 다른, 소설의 변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설이 정보가 아니라 작품일 수 있는 것은 반(反)정보로서 어떤 사유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유 위에서 문장과 서사는 직조되어야 하고, 그 구성력과 표현력을 통해 글쓴이는 독창적인 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눈여겨 본 작품들과 수상작은 다음과 같다. 미군기지 주변에서 태어난 혼혈아의 연혁과 고독을 다룬 「재인」, 빌라에 사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과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을 그린 「찬란빌라」, '기억'의 삭제를 모티브로 한 미스터리 「0」, 동성애 코드로 고독한 청춘들의 단절과 만남을 그린 「하이메리」, 「실」, 「벨루카」 등이다. 「실」은 '세탁소'를 통해 가족의 소통을 그린 소설인데, '실'과 '재봉'을 모티브로 가족관계와 고통을 직조해나가는 솜씨가 일품이고, 문장력과 구성력 또한 안정적이다. 그러나 좀 더 전개되어야 하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끝맺고 있어 소품으로 그쳤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찬란빌라」 또한 흥미로운 작품이었으나 이야기를 의미 있는 서사로 전개시키지 못하고 산만하게 끝내고 있다는 점에서 수상작이 되기엔 미흡했다.
「벨루카」는 스치듯 만난 두 남녀의 가벼운 동거를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청년의 절절한 갈망들을 절제력 있는 묘사로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먼 바다에서는 시속 10킬로미터로 무려 2천 킬로미터 거리를 헤엄칠 수 있는 흰 돌고래가 좁은 수조에 갇혀 이십칠만 번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은 원대한 꿈과 미래를 향해 질주해야 하는 청년들이 철창 같은 현실에 갇혀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하는 현실을 비유하고 있다. 벨루카라 이름 붙인 흰 돌고래의 죽음은, 곧 이들 젊은이의 절망과 비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인물들의 내면을 시적인 이미지로 차분하게 써 나간 솜씨가 만만치 않다. 당선을 축하하고 이것을 계기로 앞으로 더 눈부신 성취를 이루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정영길(소설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정은경(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공 교수)

벨루카

 벨루카가 죽었대. 우리 지난여름에 보러 갔었잖아.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먹어서 죽어버린 게 아닐까. 시영은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가운데에는 케이크가 놓였다. 편편하게 발린 생크림 위에 딸기와 초콜릿이 장식된 케이크였다. 긴 초 두 개, 짧은 초 두 개. 길고 짧은 초 네 개를 꽂았다. 지훈은 빵집에서 준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시영의 시선이 촛불에 꽂혔다. 촛불은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문득 손가락을 넣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도 불꽃이 일렁거렸다. 지훈은 그런 시영을 보채지 않았다. 딴 짓도 하지 않았다. 시영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케이크에 꽂힌 초가 녹아내렸다. 분홍색 초에서는 분홍색 촛농이, 초록색 초에서는 초록색 촛농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촛농은 서서히 식으며 딱딱해졌다. 생크림의 표면 위로 색색의 동그라미들이 생겨났다. 시영이 입을 오므려 긴 숨을 뱉었다. 크게 기울어진 불꽃들은 이내 한 줄기의 연기로 남았다. 시영이 지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든 생일까지 왔구나.

다행이야.

다행이니?

무엇이 다행인 걸까. 시영은 알지 못했으나 지훈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지훈은 다행을 좋아했다. 그 단어가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시영은 지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다행이면 되는 걸까. 모든 일이 행복하게 끝날까. 시영이 동그랗게 굳은 촛농을 포크 끝으로 찔러보았다. 그리고 촛농과 생크림을 한꺼번에 떠내서 입안에 집어넣었다. 천천히 턱을 움직였다. 녹아내리는 생크림 사이로 촛농이 씹혔다. 싸구려 초콜릿을 씹은 것처럼 입 안에서 기름이 겉돌았다. 지훈은 이번에도 그저 시영을 바라만 보았다.

시영은 촛불 하나로 증발시킬 수 있는 물의 양에 대해 생각했다. 스물 두 살의 촛불로는 얼마큼이나 증발시킬 수 있을까. 수족관에 있는 물을 모두 증발시키기 위해서는 몇 살이나 필요할까. 시영은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벨루카가 죽었대. 우리 지난여름에 보러 갔었잖아. 지훈이 플라스틱 칼로 케이크를 잘랐다.

시영아 생일 축하해.

 

*

난 이 집이 마음에 들어.

지훈은 그렇게 말했다. 시영은 아침이 왔는데 지훈이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지훈은 책장을 만지작거렸다. 싸구려 합판에 나뭇결 모양의 시트지를 덮어씌운 책장이었다.

어제는 술에 취해서 잘 보지 못했거든. 아침에 일어났는데 눈앞에 책이 가득한 거야. 두 사람이 낑겨 살아도 숨 막힐 것 같은 원룸이잖아. 그런데 한 벽면을 다 채우는 책장이 있고 심지어 그 책장에 빈틈없이 책이 들어차 있잖아. 화장실 반을 차지하는 부담스러운 욕조도 있고 말이야. 원래 원룸에 욕조 없지 않아?

그게 뭐? 시영은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지훈은 옷 입을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책장을 만지작거렸다. 시영은 지훈의 성이 김이었는지 박이었는지, 동갑이었는지 동생이었는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콘돔을 꼈는지 안 꼈는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지훈이 나가면 화장실 쓰레기통을 뒤져볼 생각이었다. 나 여기서 살래. 지훈은 그렇게 말했다.

살아도 되지?

우리 어제 처음 만났어.

여기서 살고 싶어졌어.

지훈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책들을 훑던 손가락이 한 곳에서 멈췄다. 지훈은 소리 내서 책 제목을 읽었다.

알로하.

지훈이 시영의 눈을 바라보기 싱긋 웃었다.

안녕이라는 뜻이지?

알로하는 시영이 좋아한 소설집이었다. 시영은 순전히 그 책 제목 때문에 지훈을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영은 지훈이 얼마 안 가서 떠날 거라고 믿었다. 지훈은 집이 있었고 가족도 있으니까 굳이 시영의 원룸에서 살 필요가 없었다. 집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강아지도 있다고 했다. 블랙탄 치와와야. 귀엽지? 라고 말하며 사진도 보여주었다. 온통 검은색 털에 다리만 갈색 털로 덮여있는 강아지였다. 얼굴이 작고 귀가 뾰족했는데 눈이 툭 튀어나와서 멍청하게 보였다. 강아지가 보고 싶어서라도 금방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훈은 한 달이 지나도 집에 가지 않았다. 그동안 시영은 지훈이 김 씨도, 박 씨도 아닌 강 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둘이 동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훈은 송이버섯은 싫어했지만 팽이버섯은 좋아했다. 치약을 짤 때는 꼭 밑 부분을 눌러야 했다. 둘은 저녁이 되면 함께 밥을 먹었고 아침이 오면 함께 이불을 개었다.

우리 집이 왜 마음에 들었어? 라고 물으면 지훈은 재미있어서라고 대답했다. 뭐가 재미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훈이 특별히 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집에 욕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영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훈이 나를 택했다고. 시영이 원룸에 살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로 겨우 돈을 벌어온 시영에겐 넓은 선택권이 없었다. 그러나 지훈의 경우는 달랐다. 지훈은 좋은 집 대신 시영의 집을 선택했다. 그래, 그냥 좋다는데 무슨 큰 이유가 있겠어. 지훈이 들어온 후로 생활비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시영의 입장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지훈은 부모님을 보러 가끔 집에 가기도 했지만 저녁이 되면 원룸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훈은 항상 옆에 있었다. 시영은 지훈과 함께 잠들 때면 원룸을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

 

지훈이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산 지 일 년 만의 일이었다. 새벽 한 시가 넘도록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시영은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책장에 있던 책을 모두 빼서 가나다순으로 정리해보기도 하고 출판사별로 정리하기도 했다. 칸별로 책의 분야를 다르게 해서 꽂아보기도 했다. 그것마저도 다했을 때는 책을 하나 펼쳐서 쭉 훑었다. 가장 위 칸에서부터 시집 한 권, 소설 한 권, 과학 서적 한 권을 뽑았다. 마지막으로 시영은 책장의 가장 아래에 꽂힌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를 꺼냈다. 잡지의 표지에는 푸른 바닷속 풍경이 있었다. 그래, 목욕을 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겠지. 목욕이 끝날 때쯤 지훈이 돌아오겠지.

시영은 욕조에 물을 채웠다. 화장실 거울이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좁은 욕실에 수증기가 가득 차서 숨이 막혀왔다. 시영은 욕실 문을 열어둔 채 욕조로 들어갔다. 가만히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들 것처럼 몸이 나른해졌다. 시영만 남은 집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몸을 살짝 뒤척이자,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만이 빈 공간을 채웠다. 시영은 조용한 집안이 싫어서 미친 듯이 다리를 첨벙댔다. 물이 욕조를 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폭포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그러다가 시영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잠수했다. 물속마저도 조용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포근했으며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왜 전화를 받지 않을까. 지훈이 돌아오지 않아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니까 강아지가 보고 싶어서 집으로 갔을 수도 있고. 더 이상 좁은 원룸이 싫어졌을 수도 있다. 시영은 물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돌아오겠지. 갔으면 갔다고 말을 했겠지. 데이트라도 해볼걸, 항상 집에만 있었는데.

평소에 둘은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 시영은 책을 읽었고 지훈은 핸드폰 게임을 했다. 아니면 함께 누워서 불법으로 다운받은 영화를 봤다. 시영은 지훈이 돌아온다면, 함께 어디론가 놀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누구나 다녀왔을 법한 곳을 가고 싶었다. 시영은 숨이 막혀서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여전히 집에는 시영 혼자였고 조용했다. 시영은 다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훈이 그냥 가버린 거면 어쩌지. 화장실 문밖으로 책장이 보였다. 지훈은 내 집이 좋다고 했었는데. 시영도 원룸을 좋아했다. 항상 같은 곳에서 잠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룸은 열다섯 번째 집이었다. 시영의 기억이 선명했던 순간부터 세어봤을 때 열다섯 번째였으니 어쩌면 열다섯 번보다도 많았을 수 있다. 시영이 우리 집이라고 부른 곳은 단칸방인 적도 있었고 옥탑방인 적도 있었고 모텔인 적도 있었다. 그때 시영은 엄마, 언니와 함께 살았다. 엄마는 잠을 잘 때만 집에 들어왔다. 언니와 시영은 함께 붙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집이 자주 바뀐 탓에 친구도 없었고 자기 물건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캐리어 하나에 다 넣을 수 있는 짐이면 충분했다.

고등학생이 된 시영은 그런 생활에 지쳐버렸다. 내 물건을 내 자리에 두고 싶어. 그 위에 먼지가 가볍게 쌓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시영은 그렇게 말했다. 엄마와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영과 엄마와 언니는 명절이 되면 연락하자는 말을 나누고 각자 갈라졌다. 시영은 서울 외곽에 원룸을 구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벽의 한 면을 다 채우는 책장과 화장실의 절반을 차지하는 욕조를 사는 일이었다. 시영은 근처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텅 빈 책장을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이달의 베스트셀러, 자기 계발서, 문제집, 잡지 등 가리지 않고 사들였다. 무엇을 사더라도 꼭 한 번씩은 읽은 뒤에 책장에 꽂았다. 시영은 집이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싶었다. 예를 들면 책장과 욕조와 자신을 반겨줄 사람.

지훈은 이튿날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시영은 책들을 색깔별로 정리하던 참이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왜 연락은 안 했던 거야? 시영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책들을 아무렇게나 책장에 꽂았다.

지수를 만나고 왔어.

지수가 누군데?

소꿉친구.

시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수랑 잤어?

지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영은 책장에 있던 책을 꺼내서 지훈에게 던졌다. 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친구라니까. 소꿉친구. 지훈이 만나고 온 사람은 부모님도 아니고 강아지도 아닌, 이름도 처음 듣는 소꿉친구였다. 너는 참 갈 곳도 많구나. 내가 아니어도 만날 사람도 많고. 시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지훈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바닥에 엎어진 책 중에서 어제 봤던 내셔널 지오그래피를 찾아냈다. 시영은 지훈의 눈앞에 잡지를 들이밀었다.

우리 데이트하자. 아쿠아리움 가고 싶어.

물고기는 딱 질색인데.

지훈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지수가 지훈에게 아쿠아리움을 가자고 했다면, 지훈은 어떻게 했을까. 지훈은 어떤 표정으로 지수를 바라볼까. 시영은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시영은 지훈의 가슴팍에 안겼다.

같이 가자. 갔으면 좋겠어.

시영은 지훈의 양손에 억지로 자신의 손을 끼워 맞췄다. 지훈도 아무런 저항 없이 시영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쿠아리움 입구에는 흰색 돌고래 그림이 있었다. 볼록 튀어나와 있는 돌고래의 이마가 인상적이었다. 그림에는 환영합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지훈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고 시영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쿠아리움에 온 건 난생처음이었다. 아쿠아리움 내부에서는 눅눅한 물 냄새가 났다. 둘은 통로를 따라서 걸었다. 지훈이 시영의 손을 잡았다. 둘은 화려한 열대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수달과 물범도 보았고 수조를 휘젓고 다니는 정어리 떼도 봤다.

조금 더 걷자, 아쿠아리움의 입구에서 손을 흔들던 흰색 돌고래가 나타났다. 그림보다 몸집이 훨씬 컸다. 입은 뭉툭했고 배는 통통했다. 등에 지느러미가 없어서 머리부터 꼬리까지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졌다. 툭 튀어나온 이마와 동글동글하고 새까만 눈동자는 그림과 똑같았다. 수조에는 크기가 다른 세 마리의 흰색 돌고래가 살았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게 치솟아 있는 원통형 모양의 수조였다. 유리에 얼굴을 갖다 대고 눈을 찡그리면 어렴풋이 반대쪽 유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흰색 돌고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인공 바위 몇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안내판 앞에는 벨루가라고 적혀있었다. 지훈이 벨루가, 하고 발음해보았다.

그냥 흰 돌고래라고 해도 되잖아? 시영이 말했다.

영어 이름이 더 멋있잖아. 벨루가.

벨루카가 더 멋있겠다.

가나 카나 무슨 차이야.

벨루카가 더 멋있어.

시영아, 네가 외국책에서 루카, 베로니카, 안젤리카, 이런 이름을 너무 많이 봐서 그래.

시영은 지훈의 팔뚝을 꼬집었다. 지훈은 실실 웃어댔다. 시영은 낮게 욕을 뱉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두 마리의 벨루카가 유리 가까이서 빙글빙글 돌았다. 가끔씩 웃어 보이기도 했으며 입으로 물방울을 뿜기도 했다. 빠르게 수조의 위와 아래를 헤엄치기도 했다. 가장 큰 벨루카는 느릿하게 물속을 헤엄쳤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것처럼 어물쩍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바닥에 가까이 떠 있기만 할 뿐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점점 더 수조 근처로 몰리고 있었다. 젊은 연인들은 벨루카가 등 뒤로 지나가는 순간을 사진에 담기 바빴다. 아이들은 벨루카를 보고 연신 귀엽다며 감탄했다. 몇몇 아이들은 신이 나서 높은 비명을 지르고, 주먹으로 유리를 두드렸다.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각이 되자 아쿠아리움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왔다. 벨루카의 생태 설명회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여자는 핸드마이크를 입에 대고 큼큼, 소리를 내어 보았다. 그다음 밝게 인사했다. 아이들도 크게 인사에 대답했다. 소리가 울려서 더 큰 소리가 났다. 시영은 귀를 막았다. 여자는 아이들이 수조로부터 두 걸음 정도 떨어지도록 했다. 시영과 지훈은 아이들보다도 더 뒤로 물러났다. 벨루카 수조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애들은 시끄러워. 벨루카도 짜증 나겠다.

괜찮아. 유리로 막혀있는 데다가 물속이잖아.

물속에서도 소리는 들리는데.

시영은 벨루카가 듣고 있을 소리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발음이, 단어가 뭉그러진다. 웅웅거리며 물속을 떠다닌다. 알아듣기 위해 집중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더 어지러워진다. 뭐라고 하는 거야? 되물어도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다. 소리는 계속해서 뭉개진다. 애초에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말이 통할 리가 없지.

지훈은 편안한 표정으로 수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벨루카를 가리켰다. 벨루카 두 마리가 유리 바로 앞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가장 큰 벨루카는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느릿하게 꼬리는 흔들며 조금 떠오르나 싶었는데 점점 더 바닥으로 내려앉는 모양새였다.

이곳에는 세 마리의 벨루가가 살고 있어요. 여기 애교를 부리고 있는 벨루가들은 이제 막 세 살이 됐답니다. 저기 있는 가장 큰 벨루가는 일곱 살이 되었어요. 벨루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벨루가는 목을 90도 가까이 좌우로 구부릴 수 있을 만큼 유연하며 피부가 매우 부드럽습니다. 잠수한 채로 23킬로미터까지 이동할 수 있다고 해요. 야생에서의 벨루가는 다른 바다로 이사하는 계절이 다가오면 시속 10킬로미터로 무려 2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헤엄쳐요. 얼만큼인지 감이 잘 안 오시죠? 여기 있는 아쿠아리움 수조를 아래위로 자그마치 이십칠만 번을 헤엄쳐야 하는 거리랍니다. 정말 대단하죠?

어떤 아이는 손뼉을 치고 탄성을 질렀다. 또 어떤 아이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수를 세어보려고 했다. 또 다른 어떤 아이는 유리를 두들기며 벨루카를 불렀다. 그 아이들의 부모는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오, 하는 짧은 감탄을 뱉었다. 이십칠만 번. 이십칠만 번. 이십칠만 번. 감도 오지 않는 숫자였다. 지훈이 시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얼마나 많은 거야? 시영이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평생 섹스만 해도 이십칠만 번은 못 채울걸. 지훈이 말했다.

못 해?

안 해.

근데 정말 못 채울까. 네가 팔십 살까지 산다고 생각하고……이십칠만 나누기 팔십…….

장난친 거지 그걸 또 계산하고 그래.

지훈과 시영은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벨루카는 점점 멀어졌다. 시영은 지훈이 다른 여자와 이십칠만 번 섹스하는 걸 상상했다. 괜찮아. 나도 다른 남자랑 이십칠만 번하면 되니까. 그런데 다른 여자가 지수라면? 시영은 지훈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유치해 보이잖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시영이 입을 열었다. 엄청 큰 가오리가 머리 위를 매끄럽게 지나갔다.

만약에 나랑 지수랑 바다에 빠지면 누구를 구할 거야?

펭귄들까지 보고 나서야 출구가 나왔다. 출구 쪽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그곳에는 우파루파가 그려진 모자, 열대어 모양 필통 같은 것들도 있었다. 가게의 중앙에는 벨루카 인형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인형 눈알이 진짜처럼 반짝였다.

인형 사줄까?

너 돈 없잖아.

아냐 사줄게.

그럼 인형 말고 책 사줘. 책이 더 좋아.

지훈은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대형서점으로 갔다. 시영은 사회/과학 코너 앞에 섰다. 끝도 안 보일 만큼 큰 책장에 빽빽하게 책이 들어차 있었다. 시영은 책장을 눈으로 천천히 훑었다. 목이 뻐근해지도록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지훈은 그런 시영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시영은 책이 아니라 책장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시영은 한참을 바라보다가 책 한 권을 뽑았다. 수족관 바다 탐험. 표지에는 아쿠아리움 사진이 그려있었다. 이거 마음에 든다. 지훈은 책을 계산하고 다시 시영에게 건넸다. 시영은 책을 꼭 끌어안았다. 이 선물을 준 이유도 결국 지수 때문이 아닐까, 지수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선물로 입막음을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세제나 수건, 휴지 말고, 지훈에게 받아보는 첫 선물이었다. 책은 책장의 가장 위쪽에 꽂혔다. 시영은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책이 잘 꽂혀있는지 확인했다.

 

지수, 라는 이름은 너무나 흔했고 쉬웠다. 별로 기억에 남는 이름은 아니었다. 특이했다면 한 번만 듣고도 기억했겠지. 시영이 지수라는 흔한 이름을 기억한 이유는, 지훈이 지수를 자주 만나러 갔기 때문이다. 외박하는 빈도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지훈이 지수를 만난다고 똑바르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시영은 분명 지수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전에 다른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외박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영도 누군가를 오래 만나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훈 말고도 오래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문제는 정말 지훈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훈은 집, 가족, 블랙탄 치와와 말고도 지수가 있었다. 시영은 가끔씩 지수는 어떻게 생겼어? 어디 살아? 뭐하는데? 어떻게 친해진 건데? 하고 물었다. 지훈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너보다 안 예뻐. 천호. 그냥 대학교 다녀. 부모님끼리 친했어. 이제 됐어? 지수랑 아무 관계도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훈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영은 혼자 보내는 날들이 많아졌다. 시영은 그때마다 지훈이 선물해준 책을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을 읽은 후부터는 벨루카가 나오는 부분만 찾아 읽었다. 수족관에 갇힌 고래류의 평균 수명은 10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야생에서의 수명은 70~80년 정도이다. 그들은 일생 동안 한 집단 안에서 생활하면서 북극해와 베링해, 캐나다 북부 해역, 그린란드 주변을 회유한다. 원래 벨루카는 그런 곳을 회유하고 있었구나. 접혀있던 페이지 끝이 너덜너덜해졌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다. 현관문을 열면 욕실이 바로 보였다. 욕조에 반쯤 몸을 담근 지훈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욕실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담배 재가 욕실 바닥에 부슬부슬 떨어졌다. 지훈이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왔어? 멋있지?

문은 왜 열어놓고 있는데.

숨 막힐까 봐.

어디에 있다가 온 거야. 시영은 더 이상 물어보는 것도 지쳤다. 어젯밤에도 시영은 혼자서 잠을 잤다. 책장에 꽂혀있던, 지훈이 선물한 책을 한껏 노려보다가 잠들었다. 지훈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영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욕실 앞에서 가만히 지훈을 바라보다가 문고리의 잠금장치를 누르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문은 안에서 잠그고 열게끔 되어있었다. 지훈이 문고리를 돌리면 그만이지만, 그냥 기분 나쁜 티를 내고 싶었다. 욕실 안에서 지훈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시영이 문고리를 잡았다. 이미 문은 잠근 상태였다. 시영은 지훈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또 지랄이네. 시영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시 욕실 앞으로 돌아왔다. 빨리 문 열어. 장난이었어. 시영은 문에 귀를 갖다 대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집중해서 들으면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정확하지 않았다. 시영은 욕실 문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빨리 나와. 지훈은 내 말을 듣고 있는 걸까. 시영은 조용한 집안이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빨리 나와. 시영은 시곗바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삼십 분이 지나도 욕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마 진짜 질식한 거 아닐까.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빨리 나와 장난치지 마. 나 심심하다고. 지훈아. 나와 줘. 여전히 조용했다. 시영은 핸드폰을 문 쪽으로 집어 던졌다. 하지 말라고 씨발. 적당히 하라고. 시영은 방구석에 있던 곰 인형을 던졌다. 인형은 문에 부딪히고는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시영은 헤어드라이어를 던졌고,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을 던졌다. 위대한 개츠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발리 홀리데이 개정판, 똑똑한 요리비법, 인간 불평등 기원론, 오늘부터 시작하는 생활 요가의 순서였다. 작은 흠집만 났을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시영은 억지로 문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영은 아르바이트할 때 입었던 바지 주머니에서 실핀 몇 개를 꺼냈다. 실핀의 끝을 잡고 양쪽으로 벌렸다. 시영은 떨리는 손으로 열쇠 구멍에 실핀을 집어넣었다. 신경질적으로 실핀을 이리저리 돌리고 세게 흔들어보고 나서야 욕실 문이 열렸다. 수증기랑 담배 연기가 합쳐져 욕실 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왜 이제야 문을 여냐?

지훈은 여전히 탕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시영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오른쪽 발바닥에 담배꽁초가 밟혔다. 지훈이 두 팔을 벌렸다. 시영은 그대로 욕조에 들어가서 지훈에게 안겼다.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쳤다. 퉁퉁 불은 지훈의 손이 시영의 볼을 쓰다듬었다.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어질러진 집안이 보였다. 문 하나 사이인데 전혀 다른 공간처럼 보였다. 시영은 입술을 씹었다. 수족관이 떠올랐다. 기댈 곳은 투명한 유리창밖에 없던 벨루카가 떠올랐다. 끝이 안 보이도록 높이 쌓여있는 두꺼운 유리였다. 시영은 지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숨을 한가득 들이마시면 눅눅한 담배 연기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욕조 밖으로 넘쳤던 물이 배수구로 빠지지 못하고, 욕실 문턱마저 넘을 듯이 출렁거렸다.

시영아 저 물이 넘치면 책장까지 닿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저 책장이 넘어지면 어떡하지? 지훈이 손가락 끝으로 책장을 가리켰다.

물이 좀 묻었다고 해서 책장이 넘어가지는 않아.

나도 알아. 그냥 넘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집에 비해서 너무 크잖아.

*

시영의 생일이었다.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아 시영의 핸드폰은 조용했다. 가족들한테 전화를 해봐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중이었다. 지훈은 바닥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시영은 벽에 기대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지훈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생일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시영은 책을 접고 고개를 들었다. 시영은 선물을 받기보다는 또 한 번 아쿠아리움에 가고 싶었다.

벨루카는 잘 있을까.

잘 있겠지. 가만히 있어도 사육사들이 알아서 다 해주잖아.

시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지훈은 여전히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벨루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걸.

너도 결국 벨루카라고 네 맘대로 부르고 있잖아. 가 하나만 카로 바꿔서.

지훈이 몸을 일으켜서 앉았다. 시영은 똑바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시영의 읽고 있던 책을 뺏었다. 지훈이 선물했던 책이었다. 그리고 앞뒤로 표지를 살펴보았다. 시영이 책갈피를 끼워둔 페이지를 펼쳤다. 벨루카가 나왔다.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페이지 끝을 접을 수 없었다. 지훈은 눈으로 책 내용을 찬찬히 훑었다. 으 재미없어. 이걸 대체 몇 번째 읽는 거야. 시영은 지훈과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너 우리 집에서 나가.

우리 집이라며.

시영은 머리끝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뜨거워지다가, 뜨거워지다가 어딘가 머릿속에 구멍이 뚫려서 그 열기들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힘이 빠졌다. 시영은 행거 앞에서 옷을 고르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나갈게.

그래 잘 다녀와.

아니 안 와.

넌 와. 내가 알잖아.

시영은 집을 빠져나온 뒤, 집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저 두꺼운 철문 뒤에는 지훈이 있을 터였다. 시영은 목소리가 울리는 빌라 복도에서 조용히 지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지훈아, 지훈아. 현관문 뒤에 숨어있을 지훈은 나의 말을 들었을까. 아무런 신경을 안 쓸지도. 시영은 그냥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고는 응, ? 라고 물었다. 엄마와 나는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엄마는 청주에 있다고 했다. 숙식을 제공해주는 찜질방에서 일하고 있는데 덕분에 외롭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엄마, 나 오늘 생일이야.

그랬구나.

몰랐어?

사는 게 바쁘니까 모를 수도 있지. 이해해줘. 계좌번호 보내라.

시영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어서 그저 전화를 끊었다. 문자로 계좌번호를 보내자마자 엄마는 십만 원을 입금했다. 그래, 용돈 받았으면 좋은 거지, 이 돈으로 아쿠아리움을 갈 수 있잖아. 시영은 언니에게도 전화해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명절에, 명절에 전화하자.

아쿠아리움은 작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비릿한 물 냄새와 무거운 공기,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기 바쁜 커플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시영은 벨루카가 나올 때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가자미가 있는 수조를 지나고 작은 열대어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수조를 지나고 플라스틱으로 된 개복치 모형도 지나갔다. 원통형 수족관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췄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마리의 벨루카가 있었다. 이상하다, 원래 세 마리였는데. 두 마리의 벨루카는 사람들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입으로 물방울을 내뿜었다. 단체로 견학을 온 유치원생들이 유리 주위에 옹기종기 모였다. 시영은 근처에 서 있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왜 벨루카가 두 마리밖에 없어요? 지난번에 왔을 때는 세 마리였는데.

한 마리는 죽었어요. 나이가 가장 많았거든요.

시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또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시영은 빠른 걸음으로 벨루카 수조를 지나쳤다. 출구로 가는 길에 상어도 있었고 바다거북도 있었고 물개도 있었지만 시영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쳐갔다. 출구에는 벨루카가 다음에 또 만나요, 라고 인사하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갇혀 사는 주제에. 죽은 주제에. 벨루가라고 부르든 벨루카라고 부르든 자기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웃고 있었다. 다행스럽고 괜찮은 삶이었을까? 그래서 웃고 있는 걸까? 어쩌면 정말 행복했을지도 모른다고. 러시아의 바다는 파도가 거칠고 추웠을 테니까. 수족관 물 깨끗해 보였는데. 건강히 지내라고 밥도 주고 약도 주고. 물청소도 해줬을 텐데. 수족관에서 일곱 살이나 버텼으니 오래 산 걸까. 러시아의 바다였으면 칠십까지 살았을까. 그 전에 상어를 만나서 죽었을지도 모르지. 시영은 수조 앞에 몰려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유리 벽을 통과하며 뭉개지는 소음들을 다시 떠올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을 텐데. 일곱 살에 늙어버린 벨루카는 귀가 먹어서 죽었을 거야. 말을 걸어도 들어주는 사람은 없고, 내내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들만 들었을 테니까. 밤에 자려고 누우면 그 소리들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서 잠을 잘 수 없었을 거야. 시영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

지훈은 여전히 바닥에 누워있었다. 달라진 점은 위에 좌식 테이블 위에 케이크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지훈은 시영이 온 것을 확인하고 일어났다. 부엌에 가서 포크와 접시를 챙겨 자리에 가지런히 놓았다. 지훈은 케이크 앞에 앉았다.

빨리 와서 앉아. 생일이잖아.

벨루카가 죽었대. 우리 지난여름에 보러 갔었잖아.

시영과 지훈은 이불을 펼치고 함께 누웠다. 불을 끄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냉장고는 돌아가고 있었고 욕실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영은 조용히 지훈을 불렀다. 지훈아, 지훈아. 지훈은 답하지 않았다. 일정한 주기로 냉장고는 계속 돌아가고 물방울은 계속 떨어졌다.

나 혼자 떠들어서. 귀가 먹먹해

시영아, 이상한 얘기는 하지 말자.

왜 오늘은 지수한테 안 갔어?

네 생일이잖아.

생각해봤는데, 네가 원하면 지수한테 가. 가도 돼.

아니야. 난 이 집을 좋아하잖아.

그럼 그 전에는 왜 갔는데?

지훈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시영은 지훈을 보채지 않고 기다렸다.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바로 눈앞에 천장이 내려와 있는 것만 같았다. 서서히 잠에 빠지려고 할 때, 지훈이 입을 열었다.

가끔은 무서웠어. 저 책장이 우리를 덮칠까 봐. 발끝으로 책장을 툭, 치면 그대로 책이 쏟아져 내리고 우리를 깔고 뭉개버릴 것 같았거든. 꿈도 꿨어. 나는 책장에 깔려서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그래서 책을 밀어내고 또 밀어냈는데 옆을 돌아보면 넌 쌔근쌔근 잘 자고 있더라고. 난 항상 불안했는데. 그래서 무서웠어.

시영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괜찮은 죽음이라서

강민아(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절대 건필하겠습니다
 17년도는 너무 힘들었고 저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지만 결국 계속 썼습니다. 좋아하는 것보다 잘하는 걸 하라는 주위의 말에 길을 잃었습니다. 나는 소설을 왜 좋아했을까, 나는 어떤 소설을 써야 할까, 소설이란 건 뭘까, 왜 존재하는 걸까. 그 답을 얻고 싶어서 계속 썼을지도 모릅니다.

  같이 소설 스터디를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만나면 항상 관두자, 절필하자, 하고 다짐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친구들을 말렸고 또 때로는 친구들이 저를 말렸습니다. 우리는 계속 건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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