죗값

박윤식(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등장인물

변호사

범인

의사

학생

선생

학생2

학생3

학생4   

 

 

1.접견실

 

 

변호사 등장. 바로 뒤에 범인 등장. 변호사와 범인,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는다.

 

 

변호사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에 변호를 맡게 된 국선변호사······.

범인  됐습니다, 어차피 서로 다 아는 처지 아닙니까? 번거롭게 자기소개는 무슨······.

변호사  아, 네······. 지내는 건 좀 어떠십니까?

범인  감옥 생활이 뭐 별 것 있겠습니까.

변호사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요?

범인  먹으라고 할 때 먹고, 자라고 할 때 자고, 일하라고 할 때 일하고, 감옥생활이 다 거 기서 거기지요.

변호사  딱히 불만이 있진 않으시군요.

범인  네,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한정된 시간, 한정된 공간, 통제된 자유, 감 옥 이거, 학교하고 하등 다를 게 없습니다.

변호사  학교라······. 마침 이야기가 나왔으니 사건 얘기를 좀 해볼까요?

범인  변호사님.

변호사  네?

범인  그전에 먼저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변호사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범인  피고인과 변호인 관계가 아닌 인간 대 인간, 남자 대 남자로서 묻는 겁니다.

변호사  그렇게 겁을 주시니 조금 긴장은 되네요.

범인  진지하게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변호사  저는 항상 의뢰인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범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변호를 맡으실 분한테는 분명한 답을 얻고 싶습니다.

변호사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범인  내가 진짜 잘못한 겁니까?

 

 

(사이)

 

 

변호사  일단 피해자가······.

범인  압니다, 피해자가 있죠. 제가 죽기 직전까지 팬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변호사  그러면 어떤 걸······.

범인  내가 진짜로······. 진짜로 잘못한 겁니까?

변호사  아무래도 말씀하신 과거의 사건들은 참작 정황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범인  (책상을 내려치며) 빌어먹을 재판 얘기가 아닙니다!

변호사  진정하시지요, 이러다 간수라도 오면 골치 아파집니다.

범인  나는 정말 내가 잘못한 건지······. 정말로 내가 잘못한 건지······. 그게 궁금합니다.

변호사  법리적으로는······.

범인  법적인 문제 말고요. 인간적으로 말입니다.

변호사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요.

범인  저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습니다. 떳떳하고, 오히려 뿌듯하기까지 합니 다.

변호사  (서류를 살피며) 심정은 십분 이해합니다. 재판은 범죄 사실에 명분을 조성하는 쪽으 로 최대한 노력해보죠.

범인  명분이요? 명분은 이미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변호사  사실······. 여론이 썩 좋지 않습니다. 이런 사건은 재판부가 여론에 영향을 받을 가능 성도 있어서······.

범인  여론 따위 알 게 뭡니까.

변호사  현실적인 문제니까요.

범인  현실이요?

변호사  어쨌든 지금 이렇게 죄인 신분 아니겠습니까?

범인  저는 떳떳합니다. 오히려 죗값을 치러야 하는 건 그 새끼입니다!

변호사  그런 태도가 더욱 여론의 공분을 사고 있어요.

범인  여론이야 어차피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가십 아닙니까?

변호사  제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그렇지가 않네요.

범인  변호사님도 제가 죽일 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변호사  변호인은 항상 의뢰인의 편입니다.

범인  그것 보세요.

변호사  네?

범인  삼십 평생 살면서 내 편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변호사  무슨 말씀을······.

범인  인생이란 게 웃기지 않습니까? 죄인이 돼서야 겨우 내 편이란 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변호사  딱히 좋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범인  좋은 일이지요. 좌우지간 내 편이 있다는 건 무척이나 좋은 일입니다.

변호사  그렇다면 그 내 편에게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범인  사건의 내막이요? 그거야 지나가는 개도 다 아는 사실들 아닙니까?

변호사  저는 지나가는 개가 아니니까요.

범인  이런, 실례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변호사  괜찮습니다, 피해자가······.

범인  죽었습니까?

변호사  아니요, 다행히 아직 살아계십니다. 물론 뇌사 상태라 살았다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 지만······.

범인  다행이라뇨. 안타까운 거지.

변호사  만에 하나라도 재판에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범인  그놈 가족들도 온답니까?

변호사  예, 아마 방청객 자격으로 오실 겁니다.

범인  그러면 확신은 못하겠군요.

변호사  어떤 걸?

범인  말조심 말입니다. 그놈의 핏줄을 보고도 이성적일 자신이 없네요.

변호사  아무래도 여론전에서 저희가 많이 불리합니다.

범인  불리할 게 뭐가 있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잘난 명분도 충분한데요.

변호사  그게,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범인  뭐가요? 명분이요?

변호사  예, 이런 사건은 무엇보다 명분이 중요합니다. 명분이 없으면 여론을 이해시키기 쉽 지 않아요.

범인  변호사님은 제 변호사입니까, 여론의 변호사입니까?

변호사  물론 선생님의······.

범인  그 말.

변호사  예?

범인  그 말 쓰지 마세요.

변호사  어떤······.

범인  선생님이라는 말, 쓰지 마세요.

변호사  아······.

범인  듣기만 해도 속이 뒤집어지니까.

변호사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범인  어쨌든 명분 따위가 왜 그리 중요한 겁니까?

변호사  이미 피해자 쪽으로 여론의 추가 너무 많이 기울어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재판이 학 예회 연극만도 못한 우스운 촌극이 될 겁니다.

범인  어째서 여론이 그런 놈을 동정하는 겁니까?

변호사  그거야 사건의 성격상 어쩔 수 없습니다.

범인  오히려 동정을 받아야 할 쪽은 저 아닙니까?

변호사  그래서 명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범인  대화가 계속 도돌이표로 가네요. 대체 무슨 명분을 말하는 겁니까?변호사 곧 있으면 오실 분이······.

범인  누가 또 옵니까?

변호사  네, 그분이 잘만 된다면······. 명분을 만들어주실 겁니다.

범인  무슨 명분을 말입니까?

변호사  선, 아니 피고인의 신상에 대한······.

범인 제 신상이요?

변호사  네.

범인  제 신상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뭐가 더 필요합니까?

변호사  사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좀 있어서요.

범인  무슨 부분이요?

변호사  피해자와 피고의 관계 말입니다.

범인  그 새끼하고 제 관계요? 제 사건 파일 안 보셨습니까?

변호사  그게 문제입니다.

범인  어째서죠?

변호사  관계가 너무······.

범인  혹시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변호사  절대로 그런 건 아닙니다.

범인  근데 어째서 그놈과 제 관계를 의심하는 겁니까?

변호사  의심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보강하려는 겁니다.

범인  보강이요? 대체 저와 그 새끼 사이 어디에 보강할 사실이 더 필요합니까?

변호사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으니까요.

범인  그러니까 대체 그 빌어먹을 준비가 뭐냐고요!

변호사  먼저 피해자와의 첫 만남······.

범인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입니다.

변호사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범인  근데 왜 묻는 겁니까?

변호사  피해자의 나이가······.

범인  나이요?

변호사  예, 피해자의 나이가 서른여섯이니까요.

범인  네, 맞습니다. 그놈 나이가 서른여섯입니다.

변호사  분명 첫 만남이 이십 년 전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범인  네, 제가 초등학교 삼학년 때입니다.

변호사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범인  무리? 무슨 무리요?

변호사  피해자는 당시 열여섯, 중학교 삼학년이었습니다.

범인  변호사님이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변호사  저에게는 사실만을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범인  저는 언제나 사실만을 이야기 합니다. 제가 변호사님에게 숨길 사실이 뭐가 있겠습니까?

변호사  혹여나 어떤 의도가 있다든지······.

범인  무슨 의도요?

변호사  어떤 특정한 상황을 유도하여 재판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한 의도 말입니다.

범인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변호사님이야말로 이렇게 피고인을 의심하시면 안 되는 일 아닙니까?

변호사  저는 어떤 상황에서든 제 의뢰인을 믿습니다.

범인  네, 저도 마찬가지고요.

변호사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저에게 진실만을 이야기해주셔야 합니다.

범인  저는 변호사님에게 언제나 진실만을 이야기했습니다.

변호사  그럼 다시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피해자를 이십 년 전에 처음 만났다고 하셨죠?

범인  그렇습니다.

변호사  의뢰인은 현재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범인  서른입니다. 만으로 스물아홉.

변호사  그럼 이십 년 전에 피해자는 몇 살이었습니까?

범인  변호사님.

변호사  네?

범인  뭐하자는 겁니까?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변호사  사실관계를······.

범인  (일어서며) 집어치워!

변호사  흥분하지 마세요.

범인  당신 뭐야? 지금 나 놀리려고 여기 온 거야? 당신도 내가 우스워?

변호사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세요.

범인  내 변호사라는 인간이 접견실에서 날 기만하는데 어떻게 진정을 해?

변호사  기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주 사소한 사실들조차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범인  내가 놈을 처음 만난 게 이십년 전이라고.

변호사  그렇습니다.

범인  그리고 놈은 서른여섯이라며.

변호사  네, 분명 지금 현재 피해자의 나이는 서른여섯이 맞습니다.

범인  (앉으며) 그런데 어떻게 그놈 나이를 제게 다시 물을 수가 있습니까?

변호사  단순히 사실 확인 차······.

범인  단순 산수가 아니고요?

변호사  사실 보강을 위한 좀 복잡한 절차죠.

범인  복잡이요? 0에서 0을 빼는 게 뭐가 복잡하다는 겁니까?

 

 

의사 등장.

 

 

의사  이런 벌써 시작하셨군요.

범인  누구입니까?

변호사  저희 재판을 도와주실 분입니다.

의사  반갑습니다, 심리협회에서 나온······.

범인  됐고, 뭐하시는 분입니까?

의사  의사입니다.

범인  의사? 재판에 왜 의사가 필요합니까?

변호사  의사의 전문적인 견해가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범인  그놈 몸 상태에 대해서 말입니까?

의사  (앉으며) 피해자의 몸 상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범인  무슨 뜻입니까?

의사  죽든, 아니면 살든 둘 중 하나니까요.

범인  그게 무슨······.

의사  그렇지만 여기 계신 분은 앞으로 여러 선택지가 남아 있죠.

범인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

의사  물론 그것도 맞지만 유죄 아니면 무죄라는 선택지가 있죠.

범인  정말입니까?

변호사  선, 아니. 제 의뢰인에게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 주지시켜주지 말아주세요.

의사  그리 터무니없는 것도 아닙니다. 피고가 제게 협조만 잘해주신다면 말이죠.

범인  제가 뭘 협조하면 됩니까?

의사  일단 그 시절의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범인  그 시절이라면?

의사  이십 년 전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군요.

범인  입이 닳을 정도로, 이미 수십 번은 더 했던 이야기입니다.

의사  어디보자, 아직 입은 멀쩡하시군요. 저는 피고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 다.

범인  변호사님?

변호사  네, 이분 말씀대로 가감 없이, 사실대로 전부 말씀해주세요.

2.교실
 
선생과 학생 등장. 선생은 허리춤에 각목을 차고 있다.
 
선생  왜 중앙 현관으로 등교한 거지?
학생  늦잠을 자서······. 지각할 것 같아서······.
선생  내가 저번에 뭐라고 했지?
학생  학생들은 중앙현관으로 다닐 수 없다고······.
선생  어째서?
학생  거긴 선생님들만 다니는 신성한 길이니까······.
선생  그럼 넌 누구지?
학생  학생입니다.
선생  그러면 좌측 현관이나 뒤쪽 현관으로 들어왔어야지.
학생  죄송해요, 늦잠을 자서······. 지각할 것 같아서······.
 
선생이 학생의 뺨을 때린다.
 
선생  그건 이유가 안 돼.
학생  죄송합니다.
선생  죄송하다는 말은 필요가 없는 거야. 죄송할 짓을 안 하는 게 더 중요한 거라고.
학생  네, 죄송합니다.
선생  또 그러잖아.
 
선생이 학생의 뺨을 때린다.
 
선생  도대체가 왜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거야? 네 부모도 그래.
학생  네, 죄송, 아니. 네.
선생  도대체 부모고, 자식이고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거니?
학생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  부모님한테 말씀 드렸니?
학생  네, 근데 어머니가 돈이 없다고······.
선생  그거야 너희 집안 사정이고.
학생  네.
선생  돈이 없는 건 너희 집안 사정이고, 돈이 필요한 건 내 사정이야.
학생  네.
선생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으면 너를 위해서라도 말귀를 알아먹어야 되는 거 아니니?
학생  그런 것 같아요.
선생  혹시 너희 부모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으시니?
학생  아니요, 사랑하세요.
선생  근데 왜 그러는 거냐고.
학생  오늘 다시 가서 말씀드릴게요.
선생  안 되겠다, 오늘은 잘하자는 의미에서 몇 대만 맞자.
학생  네?
선생  선생님은 너를 믿고 그냥 보내줬는데 너는 선생님의 믿음을 배신했잖니.
학생  그건······. 어머니가 돈이······.
선생  내가 말했지? 그건 너희 집 사정이라고.
학생  네.
선생  선생님을 기만한 죄로, 또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는 다짐으로 맞아야지.
학생  하지만······.
 
선생이 학생의 뺨을 때린다.

선생  말대꾸 하지 마.
학생  죄송합니다.
선생  또! 또 죄송하다는 말을 썼어!
학생  아······.
선생  아무래도 안 되겠어. 엎드려라.

학생이 엎드린다. 선생이 각목으로 학생을 때린다.

학생  선생님, 아파요.
선생  세상에 안 아픈 매가 어디 있니?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잖아.
학생  선생님, 너무 아파요.
선생  시끄러워.

선생이 각목으로 학생을 때린다. 학생이 쓰러진다.

선생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학생  선생님, 엉덩이가 너무 아파요.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선생  일어나라고 했다.
학생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선생  앉았다 일어났다.
학생  네?
선생  앉았다 일어났다 삼십 회.
학생  네?
선생  못 들었어? 오십 회, 실시.
학생  오십 회······.
선생  목소리가 작네? 백 회, 실시.
학생  백 회 실시······.
선생  이것 봐라? 아직도 작네. 이백 회, 실시.
학생  이백 회 실시!

암전. 바로 조명이 켜진다.

선생  일어나.
학생  선생님, 다리가 안 움직여요.
선생  일어나라고.
학생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요.
선생  더 두드려 맞기 전에 얼른 일어나.

학생이 일어난다.

선생  일어날 수 있는데, 거짓말을 해?
학생  선생님, 다리가 너무 아파요. 힘이 안 들어가요.
선생  엎드려.
학생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선생  엎드리라고, 이 새끼야!

학생이 엎드린다. 선생이 각목으로 학생을 때린다.

선생  내 별명 알지?
학생  (말없이 운다.)
선생  내가 물었잖아. 내 별명 아냐고?
학생  (훌쩍이며) 미친개······.
선생  잘 아네. 그럼 미친개를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지?
학생  네.
선생  앞으로는 체육복 잘 챙겨오고······.
학생  네.
선생  대답은 큰소리로.
학생  네!
선생  중앙현관으로 다니지 않고.
학생  네!
선생  대답할 때는 차렷 자세로!

학생이 차렷 자세를 취한다.

선생  부모님께는 잘 말씀드리고.
학생  네!
선생  이게 다 인생 공부인 거야.
학생  네!
선생  선생님도 알아, 선생님 세대는 너희 나이에 더 힘들었어.
학생  네!
선생  돈이 없다면서 옷은 비싼 걸로 입고 다니네.
학생  네! 네?
선생  우리 아들이랑 사이즈가 비슷한데.
학생  네!
선생  벗어.
학생  네?
선생  벗으라고.

암전.

조명이 켜진다. 학생이 입던 옷은 선생이 갖고 있고, 학생은 다른 옷을 입고 있다.

선생  선생님한테 빌려주는 거지?
학생  네······.
선생  대답은 어떻게 하라고?
학생  네!
선생  그래, 고생했다. 들어가 봐.

학생, 다리를 절며 퇴장.

선생  저희 집에서 개를 한 마리 기르는데요. 세상에,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손 하면 손을 척 내밀고, 물어 하면 콱 하고 물어오는데 얼마나 순한지 몰라요. 반면에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은혜란 걸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배은망덕한 놈들이에요. 열의를 다해 가르치면 기어오를 줄이나 알지 선생 무서운 줄 모르고 이길 생각만 한다니까요? 이런 놈들한테는 매가 약이 아니고 또 뭐겠어요? 아, 마침 저기 교감 선생님이 오시네요. 얼른 가서 인사드려야죠. 아, 충성!

 

3. 사무실

 

변호사와 의사 등장.

의사  사무실이 휑하네요.
변호사  깡통 차는 변호사들이 다 그렇죠, 뭐.
의사  요즘 국선들은 경쟁률도 세고,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변호사  그것도 뭐······. 차 한 잔 드릴까요?
의사  아, 감사합니다. 커피 있으면 부탁해요.

변호사가 커피를 타온다.

변호사  주인 놈이 변변찮아 커피도 이런 놈들밖에는 없네요.
의사  잘 마실게요. (한 모금 마시고) 굉장히 훌륭한 커피인데요?
변호사  부끄럽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제대로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의사  명색이 변호사시라는 분이 사무실에 비서 한 명도 안 두십니까?
변호사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의사  제가 괜히 와서 살림살이만 축내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변호사  무슨 말씀을 그리 서운하게 하십니까?
의사  제가 괜히 불청객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네요.
변호사  불청객이라니요! 선생님은 엄연히 제가 정중하게 초대해서 모신 손님이십니다.
의사  농담인데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 문제의 의뢰인 때문이지요?
변호사  예······. 사실 돌아가는 판이 그리 순탄치가 않습니다.
의사  검사가 강경한 걸 떠나 내가 판사라도 속이 뒤집힐 겁니다.
변호사  어떠셨습니까?
의사  어떤 것 말입니까?
변호사  제 의뢰인······.
의사  조리 있게 말도 잘하고, 판단 능력이나 지적 수준, 사고나 인지 능력도 일반인과 하등 다를 바 없더군요.
변호사  그럼 역시 저한테 거짓말을······.
의사  그런데 또 그게 그리 딱 잘라 말할 문제는 아닙니다.
변호사  그게 무슨······.
의사  지금 문제시 되는 건 일종의 트라우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변호사  트라우마요? 일리는 있지만 재판에 영향을 줄 만큼 대단한 사안은 아니네요.
의사  심신미약을 가능케 할 만큼 강렬한 트라우마의 폭발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변호사  정말인가요? 단순히 트라우마 문제로 심신미약 주장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의사  변호사님이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어떡합니까. 저는 그저 의사로서 소견을 이야기할 뿐 나머지 법리적인 문제나 이치는 변호사님이 따지셔야죠.
변호사  네, 그렇죠, 참. 흥분한 나머지······.
의사  그자가 말하는, 어릴 때 겪었던 경험들은 모두 다 사실 같습니다.
변호사  설마요. 동란 때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고, 21세기에 어떻게 그런······.
의사  그 21세기 선생을 가르친 선생들이 동란 때 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자란 세대들 아니겠습니까?
변호사  아무리 그래도 제 의뢰인의 주장에는 너무 무리한 부분들이 많아요.
의사  오히려 그 부분들을 사실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심신미약의 근거로 작용할 여지가 커요.
변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의사  대상을 인지하는 능력에 극심한 혼란과 장애를 초래할 만큼의 엄청난 트라우마를 촉발시키기 위해선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즉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경험이 필요할 텐데······. 그 경험이란 게 그자가 말한 정도는 되어야 개연성이 좀 있지 않겠어요?
변호사  물론 그렇긴 한데······.
의사  그자가 주장하는 게 정당방위라지요?
변호사  예, 지속적인 폭행과 협박을 당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반격을 시도한 거라고 합니다.
의사  이해는 갑니다. 만약 그때의 기억이 특정 계기로 현재와 이어져 기억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면 그 갑작스러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러니까 그자 입장에서는 살기 위해 어떤 행동이든 취할 필요가 있었겠죠.
변호사  물론 그 행동의 대상이 되는 상대가 잘못되긴 했습니다만······.
의사  그자 입장에서야 절박했을 거요.
변호사  그렇지만 과거의 경험을 증명할만한 증거나 증인이 없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의사  애초에 이번 싸움이 어려울 거란 건 어느 정도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변호사  물론 그렇습니다만······. 혹시 재판에서 참고인으로 증언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의사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딱히 도움이 될 런지는 모르겠군요.
변호사  아주 큰 힘이 될 겁니다.
의사  그런데 변호사님은 그자를 구제하는데 꽤나 사력을 다하시는군요.
변호사  예, 어쨌든 제 의뢰인이니까요.
의사  요즘 국선은 옛날 국선이 아니라던데 그 말이 실감이 나네요.
변호사  그거야 뭐······. 어쨌든 제 의뢰인도 피해자라면 피해자니까요.
의사  그렇게 볼 수도 있죠. 물론 피해자 가족들에겐 죽일 놈이겠지만······.
변호사  저 학창시절 때도 참 고약한 선생들이 많았죠.
의사  변호사님은 저보다 젊으시니 좀 덜했겠지요. 나 때는 군인이 곧 교사인 시절이었어요.
변호사  저는 수업시간에 잠깐 졸았다고 머리채를 잡힌 채 운동장을 세 바퀴나 돌았습니다.
의사  저 중학교 때는 준비물 안 챙겨왔다고 구둣발로 불알을 차던 선생도 있었지요.
변호사  기에 머리를 박으라고 했던 선생도 있었습니다.
의사  몸 좋은 애들로만 골라 발가벗겨 놓고 춤을 추라 시킨 적도 있었지요.
변호사  지금이라면 고소당하고, 징계 폭탄을 받아도 할 말 없는 수준이었는데 말이죠.
의사  시대가 그랬으니까요.
변호사  얼마 전에 제 딸 학부모 참관 수업을 갔는데 그때와는 많이 다르더군요.
의사  요즘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반말도 함부로 못한답니다.
변호사  네, 옛날에 만연했던 권위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진 모양입니다.
의사  꿀밤이라도 한 대 맞으면 고소니, 인권이니 하며 덤벼드는 세상 아닙니까.
변호사  혹시 제 의뢰인의 선생이었던 자도 아직 교직에 있을까요?
의사  그렇겠죠. 아직 정년은 안 됐을 테니······.
변호사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의사  이빨을 숨긴 채 숨어 지내고 있겠죠. 원래 그런 놈들이 시대적응은 더 잘하는 법입니다.
변호사  손이 근질근질 하지는 않을까요?
의사  왜 안 그러겠어요? 그래도 참는 겁니다. 시대가 바뀌고, 제도가 정비되고,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으니······. 답답해도 참고 살겠죠.
변호사  바뀐 세상을 보며 잘못을 뉘우치진 않을까요?
의사  잘못이요? 인지부조화라는 심리학 용어를 아십니까? 그런 자들은 절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본인이 가진 오류나 잘못을 정정하기보다는 생각이나 가치체계, 신념 따위를 바꿔버리죠. 그게 더 쉽고, 간편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며 그 어떤 양심적인 이들보다도 더 잘 살고 있을 겁니다.
변호사  사람은 쉽게 바뀌진 않는군요.
의사  그래도 희망을 가져볼만 한 건 이번 사건이 어떤 메시지를 시사한다는 점입니다.
변호사  어떤?
의사  적어도 그 사람들이 뉴스나 신문 기사를 보고 서늘함이나 오싹함, 하물며 티끌만한 죄책감이라도 가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변호사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의사  그렇죠, 자기가 기르던 노예가 풀려나 망나니처럼 칼을 휘두르고 다니는데 제깟 놈들이 떨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변호사  오늘, 제 의뢰인이 저한테 묻더군요.
의사  (커피를 마신다.)
변호사  인간 대 인간으로서 묻는데, 자기한테 죄가 있는 게 맞냐고.
의사  그것 참 난감한 질문이군요.
변호사  그래서 대답을 못했습니다.
의사  잘 했습니다. 괜히 대답할 필요 없는 문제지요.
변호사  저는······. 사실 변호사로서 부끄럽지만 아직도 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의사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의학책을 펴면 머리부터 아픕니다.
변호사  그게, 저는 좀 더 다른 문제입니다.
의사  다른 문제요?
변호사  법의 효능감이라고 할까요.
의사  확실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변호사  법은 물건처럼 저울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재서 수치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의사  법이란 것도 관념을 구체화 시킨 일종의 암호문 아니겠습니까. 그걸 해석하여 필요한 부분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변호사가 하는 일이고.
변호사  이 일을 하다보면 죄를 지었건, 짓지 않았건 재판장에 들어서는 순간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의사  법보다 더 근본적인······. 사회나 제도의 문제일까요?
변호사  아까 법이 관념을 구체화 시킨 암호문이라고 하셨죠?
의사  맞습니다.
변호사  그렇다면 법보다 더 근본적인 사회나 제도, 또 그보다 더 근본적인 관념의 충돌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그 관념이 몹시 불안정하고 충동적이라는 거죠.
의사  흥미롭군요.
변호사  불완전한 관념이 불완전한 법이 되고, 그보다 더 불완전한 인간들이 그 법을 해석하고, 이행하고, 집행하고, 수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변호사 노릇이 제 적성에 안 맞는 걸 수도요.
의사  원래 이치를 하나씩 짚어 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변호사  이런 부끄러운 궤변이 무슨 이치씩이나······.
의사  이치도 보통 이치가 아니지요. 변호사님은 나쓰메 소세키라는 소설가를 아십니까?
변호사  예, 부끄럽지만 들어만 봤습니다.
의사  소세키가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소설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세상의 이치를 알아간다는 것은 곧 나이를 먹는다는 죗값이다.
변호사  굉장히 신랄한 해학성이 담긴 문장이네요.
의사  변호사님이 저나 나이를 먹는다는 부분을 좀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변호사  나이를 먹는다······.
의사  우리는 운이 좋아 그 죗값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변호사  운이 좋은 건가요?
의사  죄를 지어야 이치를 알 수 있다면 죄를 지어야지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때론 죄를 짓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의뢰인처럼.
변호사  제 의뢰인은······. 어쩌면 죄를 짓지 않는 삶을 강요당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의사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변호사 양반이 이번 문제에 마음이 심란한 겁니다.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을 변호해야 되는 거니까요.
변호사  한 가지만 더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의사  얼마든지요.
변호사  선생님은······. 제 의뢰인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의사  글쎄요······. 저야 한낱 의사 나부랭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변호사  다만?
의사  죄를 지을 선택의 기회······. 이걸 앗아간 자 역시 마땅한 죗값을 치러야지요.

(사이)

변호사  말씀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머리가 좀 맑아진 기분입니다.
의사  (일어서며)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변호사  (일어서며) 네,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의사  다음에 올 때는 예쁜 여비서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의사 퇴장.

변호사  (앉으며)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이라······.
 

4.교실

 

학생과 선생 등장. 선생은 허리춤에 각목을 차고 있다.

선생  왜 옆에 애가 떠드는데 말리지 않았지?
학생  저희 반에서 제일 질이 안 좋은 일진이었습니다.
선생  왜 앞에 애가 자는데 깨우지 않았지?
학생  별로 친하지가 않습니다.
선생  왜 뒤에 애가 딴 짓을 하는데 보고하지 않았지?
학생  친구를 고자질 할 수는 없어서······.
선생  이 모든 잘못은 연대책임으로 일벌백계의 필요성이 있는 사안이다.
학생  저는 수업에 집중했습니다. 떠들지도, 졸지도, 딴 짓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선생  하지만 네 주위에 다른 학생들은 그러지 않았지.
학생  네, 그래서 저는 억울합니다.
선생  억울하다고? 친구들의 책임을 나눠지는 게 학생이 가져야 할 올바른 도리다.
학생  저는 수업에 집중했습니다.
선생  너만 수업에 집중했지.
학생  저 말고 다른 학생들을 벌하세요.
선생  경각심을 더 돋우기 위해 연대책임으로 너까지 벌해야겠어.
학생  대체 제가 벌을 받거나 혼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선생  내 말을 따르면 돼.
학생  선생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왜 벌을 받거나 혼나야 합니까?
선생  제대로 따르지 않은 거지.
학생  대체 뭘 제대로 따라야 합니까?
선생  내 말을.
학생  어떤 말을요?
선생  너는 벌을 받아야 돼.
학생  어째서요?
선생  일단 벌을 받으면 알려주지.
학생  부당합니다, 이건 부당한 처사에요.
선생  내가 말했지? 내 말을 따르라고!
학생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선생  엎드려.
학생  싫습니다.
선생  엎드려!
학생  싫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등장.

학생2  엎드려!
학생3  빨리 엎드려!
학생4  우린 전부 맞았어!
학생들  엎드려! 엎드려! 엎드려! 엎드려!

학생이 엎드린다. 선생이 각목으로 학생을 때린다.

선생  내가!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기라고! 하면! 기는 거야!

학생이 쓰러진다.

학생  죄송합니다, 선생님.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선생  제발 부탁이야. 죄송할 짓을 하지 마.
학생  이번만······. 이번 한 번만······.
선생  내가 분명 기회를 줬잖아. 기회를 줬는데 차버린 건 바로 너야!

선생이 다시 학생을 때린다.

선생  야, 너희들 일로 와봐.
학생들  네, 선생님.
선생  한 명씩 돌아가며 이 새끼 때려.

선생이 학생2에게 각목을 건넨다. 학생2가 머뭇거린다.

선생  네가 맞을래?
학생2  아닙니다!

학생2가 학생을 때린다.

선생  다음!

학생3이 학생을 때린다.

선생  더 세게! 다음!

학생4가 학생을 때린다.

선생  이제 다 같이!

선생과 학생들이 학생을 때린다.

선생  보이십니까? 이게 바로 진정한 교육입니다! 한국식 학생 맞춤형 교육! 21세기 창의형 인재는 대한민국 교육이 만들겠습니다, 여러분! 믿고 지켜봐 주십시오!

암전.

끝.

 

희곡 부문 당선 소감

 

비상할 날, 간절히 희망
   직접 쓴 작가가 봐도 부족하고, 미숙한 부분이 잔뜩 드러나는 미완의 졸작이었습니다. 제가 잘했거나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상을 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심사위원 분들과 독자 여러분들의 기대에 만족하는 작품을 창작해내지 못한 점을 이 자리를 빌려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희곡은 연극으로 제작되어 무대에서 공연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세상 모든 희곡들이 고답적인 텍스트에서 벗어나 연극으로 공연되어 비상할 날이 오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긴 글 읽느라 고생하신 심사위원 분들, 독자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진하여 다음에는 더 좋은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희곡 부문 심사평

높아진 극작에 대한 관심, 반가운 일
   올해는 지난해보다 많은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극작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높아진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또 하나 고무적인 점은 다양한 극작 형식을 시도한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나의 상처투성이 가족」은 불안정한 가정, 서로 다른 자매, 우연히 만난 남녀, 친구의 애인, 애인의 배신 등, 극적 사건의 배경, 전개나 인물의 형상화가 너무 상투적이다. 이에 비해 아내에 대한 병적 집착이 딸에게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가정폭력을 다룬 「고래가 사는 집」은 극적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절제되어 있고, 영화적 상징도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작품 크기가 너무 작다. 희곡에서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감지된다. 하나는 형식적 실험을 도모한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새로운 소재를 찾는다는 점이다. 「다름이 아니라」와 「다음 주에도 또 오세요」는 여러 개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전달하려는 핵심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비행기 바퀴 칸에 숨어 밀항하는 소년과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버드보이」, 로봇을 부검하는 미래사회를 통해 동시대의 실존적 소외를 우화적으로 보여준 「사인」 등은 새로운 극적 소재를 발굴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다양한 폭력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이 많은 작품에서 감지된다.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의 폭력 문제를 다룬 「암실 밖으로」, 아이들 사이의 폭력을 상징적으로 그린 「비눗방울」, 학교폭력을 법정극 형식으로 형상화한「죗값」이 이에 속한다. 「죗값」은 학창시절 당했던 부당한 교사 폭력을 개인적으로 복수한 후에 전개되는 법적, 심리학적 반성이다. 그나마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본 작품은 「죽여주는 여관」이다. 노인 자살에 대한 반성을 다루는 이 작품은 제목과 달리 삶을 격려하며 '살게 해주는 여관'을 보여준다.
   최종적으로 「죗값」, 「죽여주는 여관」 두 편을 놓고 당선작을 논의했다. 모두 극적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갖춘 작품이다. 그중 좀 더 형식적으로 절제되고 사건의 인과를 극적으로 배치하고 대사가 유연한 「죗값」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선정되지 못한 작품에게는 격려와 위로를, 당선작에게는 축하를 보낸다. 모든 투고자들에게도 감사와 따듯한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이상복(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진(원광대학교 유럽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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