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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마음으로] '이리=솝리', 특정 지역의 크나큰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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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14  20: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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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벌 전경. 벌 은 신라말로, 백제의 영토였을 당시에는 황산부리 로 불렸을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은 동굴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서 의사를 표현했고, 이후 한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지명, 인명 등을 한자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선조들이 우리말을 표기하려 한 방식에 대해 훑어보고, 나아가 세종대왕의 우리말에 대한 인식까지 알아보려 한다. /편집자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우리 선조들의 표기 방식에 대해 연재하려 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리' 내지 '솝리'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그 전에 쉽게 풀어간다는 측면에서 논산훈련소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논산에 왜 하필 훈련소가 있을까? 바로 황산벌 때문인 듯하다. 훈련소 위치가 황산벌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백제군사박물관 쪽 계단을 오르면 거기에 펼쳐지는 곳이 황산벌이라고 한다.
 국어국문학과의 국어사 시간이다. 강의를 하면서 복학생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논산훈련소 출신 있느냐고. 연이어 물어본다. 이상한 논리이지만 훈련소가 왜 논산에 있어야 하느냐고.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황산벌이 바로 논산에 있다고 이야기해 준다. 논산에는 유명한 큰 저수지 '탑정호'가 있다. 그 입구에서 위쪽 가까이에 백제군사박물관이 있는데 그 바로 북쪽 편이 바로 황산벌이다. 학생들의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를 다니지만 미륵사지에도 잘 가지 않는 듯하다. 손안의 멋진 기계 탓일지도 모른다. 백제군사박물관은 너무도 좋은 곳이다. 성인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굴렁쇠, 팽이 등 여러 가지 놀이가 있다. 활쏘기, 말타기 등도 할 수 있다. 성인에게나 아이들에게나 관광하기 매우 좋은 곳이다.
 잡설이 길어졌다. 학생들과 다시 대화한다. "왜 황산부리라고 하지 않고 황산벌이라고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보충 설명이 필요하겠다. '서라벌', '달구벌'을 알 것이다. 여기에서의 '벌'은 신라말이다. 이 '벌'은 백제에서는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충남 부여는 대략 1400년 전에는 '소부리'라 불렸다. 황산벌은 백제 땅이므로 적어도 '황산부리'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역사는 승자 입장에서 기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신라어 계열의 지명 요소인 '벌'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황산'이라는 한자어 지명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신촌'을 '새마을'이라고 하고 '웅진'을 '곰나루', '대전'을 '한밭'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  때(757년) 고유어 지명을 일률적으로 한자어 지명으로 바꾸게 된다. 그때 '한밭', '새말' 같은 고유어 유형이 '대전', '신촌' 같은 한자어 유형으로 바뀌게 된다. 논산 곳곳에 '놀뫼'라는 표기가 많이 보인다. '놀뫼'는 '노라-, 누르-'와 관계된다. 황산(黃山)이 '누를 황', '뫼 산'임을 감안한다면 '놀뫼'는 충분히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노랗다'는 '놀+앟+다', '누렇다'는 '눌+엏+다'로 어원을 상정할 수 있다.('검+엏+다=거멓다' 참조)
 '부리(夫里)'와 관련해 수원 창룡문 근처(사대문 안)에 '동창부리'라는 동네가 있다. 적어도 '부리'는 천오백 년 전의 지명이다. 한강 유역을 백제가 점령했을 때 지명이 그대로 계승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수원 밑 오산의 매홀중학교이다. '매홀'의 '忽(홀)'은 '부리(夫里)'에 대응되는 고구려의 말이다.(주몽의 부인 소서노(召西奴)에게는 두 아들 온조와 비류가 있었다. 온조는 한강 유역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류는 미추홀[현재 인천]에 도읍을 정했다) '매홀'은 장수왕이 밀고 내려온 이후 붙여진 지명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잘 아는 경주의 옛 이름은 '서라벌'이다. 金城이라고 적고 당연히 '서라벌(쇠 금, 벌 성)'이라고 읽어야 했다. '금성'이라 읽으면 음독이고 '서라벌'이라 읽으면 석독[뜻으로 읽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서라벌'에서 ㄹ이 탈락하면(나리>내) '쇠벌>서울'과 유사해진다. 또 '벌'의 ㅂ이 'ㅸ'이라면―'ㅸ'는 거칠게 말하면 'ㅜ'로 변한 것이다―그것은 '서울'과 흡사한 발음이 된다.
 삼국사기에 충남 부여는 '所夫里(소부리)'라 기록되었다. 익산에는 '이리(裡里, 솝 리, 마을 리)'가 있었다. 이리의 옛 지명은 '솝리[솜리]'이다. '솝리'의 '솝'을 두 음절로 발음하면 '소브'가 된다. 결국 '소부리'와 '솝리'가 같아졌다. '이리(裡里)'라 적고 '소부리' 비슷하게 읽었던 것이다. '소부리', '솝리'는 그 지역의 중심이라는 뜻이다.('솝>속', '솝리'를 익숙한 말로 풀어내면 '속 마을'이 된다) 중심지(core, center)일 것이다. '서라벌'도 신라의 센터이다. 곳곳에 '새말(新里)'이 많듯 '소부리[서울]' 관련 지명도 이따금 확인된다. '센터'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새말'과 같이 그리 흔해 빠진 것은 아니다. 센터라도 작은 구역의 센터는 아니었다. 이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적어도 특정 지역의 크나큰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언어학적으로 이해하였다.
  임석규 교수(국어국문학과)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우리 선조들의 표기 방식에 대해 연재하려 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리' 내지 '솝리'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그 전에 쉽게 풀어간다는 측면에서 논산훈련소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논산에 왜 하필 훈련소가 있을까? 바로 황산벌 때문인 듯하다. 훈련소 위치가 황산벌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백제군사박물관 쪽 계단을 오르면 거기에 펼쳐지는 곳이 황산벌이라고 한다.
 국어국문학과의 국어사 시간이다. 강의를 하면서 복학생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논산훈련소 출신 있느냐고. 연이어 물어본다. 이상한 논리이지만 훈련소가 왜 논산에 있어야 하느냐고.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황산벌이 바로 논산에 있다고 이야기해 준다. 논산에는 유명한 큰 저수지 '탑정호'가 있다. 그 입구에서 위쪽 가까이에 백제군사박물관이 있는데 그 바로 북쪽 편이 바로 황산벌이다. 학생들의 반응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를 다니지만 미륵사지에도 잘 가지 않는 듯하다. 손안의 멋진 기계 탓일지도 모른다. 백제군사박물관은 너무도 좋은 곳이다. 성인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굴렁쇠, 팽이 등 여러 가지 놀이가 있다. 활쏘기, 말타기 등도 할 수 있다. 성인에게나 아이들에게나 관광하기 매우 좋은 곳이다.
 잡설이 길어졌다. 학생들과 다시 대화한다. "왜 황산부리라고 하지 않고 황산벌이라고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보충 설명이 필요하겠다. '서라벌', '달구벌'을 알 것이다. 여기에서의 '벌'은 신라말이다. 이 '벌'은 백제에서는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충남 부여는 대략 1400년 전에는 '소부리'라 불렸다. 황산벌은 백제 땅이므로 적어도 '황산부리'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역사는 승자 입장에서 기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신라어 계열의 지명 요소인 '벌'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황산'이라는 한자어 지명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신촌'을 '새마을'이라고 하고 '웅진'을 '곰나루', '대전'을 '한밭'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  때(757년) 고유어 지명을 일률적으로 한자어 지명으로 바꾸게 된다. 그때 '한밭', '새말' 같은 고유어 유형이 '대전', '신촌' 같은 한자어 유형으로 바뀌게 된다. 논산 곳곳에 '놀뫼'라는 표기가 많이 보인다. '놀뫼'는 '노라-, 누르-'와 관계된다. 황산(黃山)이 '누를 황', '뫼 산'임을 감안한다면 '놀뫼'는 충분히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노랗다'는 '놀+앟+다', '누렇다'는 '눌+엏+다'로 어원을 상정할 수 있다.('검+엏+다=거멓다' 참조)
 '부리(夫里)'와 관련해 수원 창룡문 근처(사대문 안)에 '동창부리'라는 동네가 있다. 적어도 '부리'는 천오백 년 전의 지명이다. 한강 유역을 백제가 점령했을 때 지명이 그대로 계승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수원 밑 오산의 매홀중학교이다. '매홀'의 '忽(홀)'은 '부리(夫里)'에 대응되는 고구려의 말이다.(주몽의 부인 소서노(召西奴)에게는 두 아들 온조와 비류가 있었다. 온조는 한강 유역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류는 미추홀[현재 인천]에 도읍을 정했다) '매홀'은 장수왕이 밀고 내려온 이후 붙여진 지명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잘 아는 경주의 옛 이름은 '서라벌'이다. 金城이라고 적고 당연히 '서라벌(쇠 금, 벌 성)'이라고 읽어야 했다. '금성'이라 읽으면 음독이고 '서라벌'이라 읽으면 석독[뜻으로 읽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서라벌'에서 ㄹ이 탈락하면(나리>내) '쇠벌>서울'과 유사해진다. 또 '벌'의 ㅂ이 'ㅸ'이라면―'ㅸ'는 거칠게 말하면 'ㅜ'로 변한 것이다―그것은 '서울'과 흡사한 발음이 된다.
 삼국사기에 충남 부여는 '所夫里(소부리)'라 기록되었다. 익산에는 '이리(裡里, 솝 리, 마을 리)'가 있었다. 이리의 옛 지명은 '솝리[솜리]'이다. '솝리'의 '솝'을 두 음절로 발음하면 '소브'가 된다. 결국 '소부리'와 '솝리'가 같아졌다. '이리(裡里)'라 적고 '소부리' 비슷하게 읽었던 것이다. '소부리', '솝리'는 그 지역의 중심이라는 뜻이다.('솝>속', '솝리'를 익숙한 말로 풀어내면 '속 마을'이 된다) 중심지(core, center)일 것이다. '서라벌'도 신라의 센터이다. 곳곳에 '새말(新里)'이 많듯 '소부리[서울]' 관련 지명도 이따금 확인된다. '센터'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새말'과 같이 그리 흔해 빠진 것은 아니다. 센터라도 작은 구역의 센터는 아니었다. 이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적어도 특정 지역의 크나큰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언어학적으로 이해하였다. 
임석규 교수(국어국문학과)
 
   
   
▲ 1995년 익산시로 개편되기 전 지명이 바로 '이리(裡里)'다. 과거에는 이 이리를 '솝리[솜리]'라 불렀는데, 위의 '솜리치킨'이나 '솜리커피', '솜리문화예술회관' 등은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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